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구약성서 시편 23편 1-2절)

왜 시편이 인용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영화는 시편 23편을 읊조린다. 그리고 마야인들이 이미 예언한 2012년 지구멸망이 그대로 이뤄진다고 본다. 그리고 그때의 이야기를 그린다. 성서의 예언을 기초로 한 영화가 아니기에 성서의 시각으로 들여다 본다는 것 자체가 그른 일인지 모르지만, 성서의 여러 부분들이 그럴싸하게 맞물려 있다.

세례 요한과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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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메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아낌없는 독설을 퍼붓는다. 그의 독설이 이미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바라고 성서는 말한다. 그게 구원자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일이라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중략)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신약성서 마태복음 3장 2-7절)

찰리(우디 헤럴슨)는 이상한 무전기 같은 걸(방송장비) 등에 짊어 메고 옐로우스톤 산등성이에서 외친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를, 그런 말을 외친다. '심판 날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쁨의 날이라는…'. 어쩜 세례 요한의 외침이 그랬듯 몇몇 사람들에게만 경고성 메시지로 들리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컴퓨터, 경쟁심, 국가, 종교…, 기독교인, 불교인, 이슬람인, 레스터패리언… 모두가 하나가 될 꺼야. 날아라. 새들아! 날아라. … 또한 인류의 최후의 시간이며 연기의 작은 입자처럼 은하수의 작은 점이 될 것이다. 나는 내 눈으로 지구가 가루가 되는 걸 지켜볼 것이다."

세례 요한이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한 메신저였다면, 찰리는 예견된 인류의 멸망을 즐기는 광야의 메신저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당시 현실에서 다음을 볼 수 있는 자들이다. 찰리는 외침만이 아니고 멸망과 함께 자신을 내어줌으로 멸망을 즐긴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찰리는 요한보다 한 수 위인지 모른다.

노아의 방주와 영화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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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기어이 마야인들이 예언하고, 모든 과학자들이 꼼꼼히 준비해 온대로 그 날은 닥쳐오고야 만다. 우주선이라고 해도 좋고, 방주라고 해도 좋다. 노아가 닥쳐올 멸망을 위해 방주를 준비하듯, 영화에서도 과학자들이 방주를 준비한다. 그런데 그 설정이 이채롭다.

방주를 만든 이들이 중국인들이다. 모든 나라의 대통령들이 중국으로 몰려든다. 방주 안으로 뛰어든다. 살려는 자들의 아우성! 왜 아니 영화가 되지 않겠는가?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영화의 스펙터클한 장면들은 관객을 숨 막히게 한다. 그 스케일이 압도하기 때문이다.

노아는 신의 명령을 받고 산꼭대기에 잣나무로 방주를 짓는다. 역청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짓는다. 120년간 걸려 짓는다. 그리고 그 방주로 들어가 홍수를 피한 사람은 오직 그의 가족들뿐이다. 그리고 방주는 오직 하나뿐이다. 유일한 구원선인 것이다.

영화는 방주가 몇 개다. 그리고 그 규모 또한 노아의 방주와는 게임이 안 된다. 신의 명령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비밀스런 명령에 의해 이뤄진다. 그것도 몇 년 만에 6호, 7호 하며 만들어진다. 첨단 과학의 최고 산물인 방주가 지금 막 뜨고 있는 나라, 중국에서 만들어진다.

노아의 방주가 공개된 신의 계획이며, 자신을 순종하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인데 비해, 영화의 방주는 비밀리에 만들어지는 유력 정치인들이나 재벌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주다. 어쩜 이렇게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괴팍한 오늘날의 심사를 잘 드러내는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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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신)이 경고한 종말의 날과 그들(마야인들)이 경고한 마지막 날은 그 날이나 시기에 있어 천양지차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 유사성 또한 만만치가 않다. 전 세계 곳곳에서는 지진, 화산폭발, 거대한 해일 등, 각종 자연 재해들이 발생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최후의 순간이 도래한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신약성서 마가복음 13장 7-8절)

'재난 블록버스터의 신혁명'이라고 광고한 <2012>, 그 스케일 면에서는 같은 재난 영화들의 스케일을 압도할 정도다. 하지만 지진, 화산 폭발, 해일 등의 잡다한 장면들이 뒤섞이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면에서 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스토리가 스케일에 묻혀 자칫 맥없이 호화찬란한 장면만 열거하다 끝나는 느낌이다.

성서의 눈으로 본 <2012>는 그 끝이 해피앤딩이란 점으로 볼 때, 인위적이다 못해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물론 다른 여타의 재난영화들이 그렇듯, 가족과 사랑이라는 근본 줄거리를 건지면서도, 인류멸망의 날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설정은 근본적으로 성서의 사상과는 정반대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충돌이 성서의 종말과 <2012>의 마지막 날에 칼을 세우며 싸우고 있다고 하겠다. 방송은 연일 '재미있는 지진 이야기'를 서로 나누자며 펀펀경영에 빠진 인간군상들을 부추긴다. 성서는 결코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극한 대결이지만 CG의 기막힌 포장으로 성서의 종말을 그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영화가 <2012>다.

덧붙이는 글 <2012>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주연 존 쿠색, 아만다 피트/ 제작 콜롬비아 픽쳐스/ 배급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상영시간 157분/ 개봉 2009. 11. 12.
2012 개봉영화 재난영화 존 쿠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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