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소 영화 워낭소리 스틸컷

▲ 할아버지와 소 영화 워낭소리 스틸컷 ⓒ 워낭소리 공식블로그


자신을 다 쏟아놓은 일생

"어르신 이제 일을 좀 쉬셔야 돼요. 지금처럼 일 계속 하시면 세상 등질 수도 있어요."

경북 봉화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져온 최원균 할아버지. 새벽같이 일어나 해가 지도록 논에 나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촌로에게, 의사는 진지하게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의 걱정에도 할아버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집을 나서기를 멈추지 않는다. 매일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아지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9남매를 키웠다.

할아버지의 농사가 쉬운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는 낱알을 많이 흘려버린다면서 평생 기계를 이용하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지어왔다. 거기에다가 농약도 치지 않아 농약을 치는 다른 사람들의 농사보다 몇 배의 수고를 더 해야한다. 이런 할아버지의 고집은 인생의 반려자인 할머니에게까지 피곤한 인생을 선사했다. 그 덕에 할머니는 제일 많이 이 말을 외친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마 할아버지와 40년 간 손발을 맞추어온 소도 말을 할 줄 알았다면, 할머니와 같은 소리를 내뱉고 한 참 전에 집을 나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뼈만 남아, 한 걸음 내딛기도 힘에 부쳐보이는 소는 40년 동안 할아버지의 고집이 가능하도록 한 1등 공신이다.

할머니와 소의 팔자타령 뒤에는 그보다 더 큰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다. "우리도 농약 칩시다" "우리도 기계를 씁시다"라는 할머니의 말에도 아랑곳 없이 낫을 들고 들로 나가는 할아버지에게 "남편을 잘 못 만나 이렇게 나만 고생"이라고 타박을 하면서도 할아버지가 죽으면 자신도 같이 따라갈 것이라고 고백한다. 40년을 한결같이 '혹사'당해 온 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매일 새벽같이 나가 밭을 갈고, 읍내까지 주인을 실어나르는 자동차 역할까지 하며 살아 온 소는 주인과의 동행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할머니의 할아버지에 대한 타박을 동반한 애정과 소의 우직한 동행은 어디로 부터 비롯되었을까? 나는 할아버지의 삶 자체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먹고 살길이 없어 남의 집 살이로 시작된 할아버지의 인생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모든 것을 논과 밭에 쏟아놓는, 자기 안의 에너지를 모두 불태운 삶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들로 나가고, 의사의 경고에도 아랑곳 없이 오늘도 기계와 농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할아버지의 삶이 없었다면 할머니와 소는 자신들의 삶을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삶이 아닌 말로 살아가는 나에게, 그래서 내 몸 안에 너무도 많은 잉여 에너지가 남아 방황하고 있는 나에게 할아버지의 삶은 숙연해지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말못하는 짐승 소. 그래서 할머니가 "저게 말을 못해서 그렇지, 못한다고 하고 도망갔을 거야"라고 동정했던 소 또한 할아버지와 같이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서로 그렇게 잘 표현을 못하지만, 사료를 사다 먹이지 않고 날마다 쇠죽을 끓여 바치는 정성으로 함께 살아 온 할아버지와 소는 그렇게 잘 맞는 'Old Partner'로 서로의 일생을 복되게 했다. 나도 그렇게 내 안의 모든 것을 태워 사는 인생이기를, 그렇게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과 동행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부부 영화 워낭소리

▲ 부부 영화 워낭소리 ⓒ 워낭소리 공식블로그


누가 뭐래도 너는 500만원 짜리다!

40년을 충실하게 살아 온 소는 이제 뼈가 드러난 몰골로 자신의 일생을 증거하고 있다. 오르막길에서는 숨이 차 한 걸음 옮기기도 힘에 벅찬 소를 할머니와 가족들은 이제 내다 팔자며 할아버지를 압박한다. 소가 가여웠는지 할아버지도 결국 소를 팔기로 하고, 소시장에 데리고 나가 흥정을 해본다. 이제 수명이 얼마남지 않은 소는 시장의 사람들에게 헐값 취급을 받는다. "이 소 죽으면 고기가 60만원 어치도 나오지 않는다"며 비아냥 대는 사람부터, "이 소 때문에 다른 소 거래까지 못하니까 빨리 가시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 틈에서 할아버지는 "500만원 준다고 하는 사람 없으면 안팔아!"라고 선포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볼품없고 힘없어 젊은 소에게까지 구박받는 소. 이제는 다 늙어 버려 아무런 가치가 없어서 시장에 나가 500만원을 받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500만원 이하로는 흥정이 불가능 하다는 고집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할아버지는 소를 팔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한걸음 떼기도 힘들어 곧 저 세상으로 가버릴 소를 헐값에라도 파는 것이 조금은 경제적이었을 텐데, 할아버지는 평생을 동고동락한 소에 대해 이렇게 마지막 예의를 다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봤기에 할아버지와 소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소가 사람보다 낫다"는 할아버지의 고백은 빈말이 아닐 것이다. 동네 사람들도 "주인과 소가 참 잘 만났다"고 인정하는 천생연분. 소가 먼저 죽으면 "내가 상주질 할 거라"고 웃으며 말하는 할아버지의 무한한 애정 속에 할아버지와 소가 함께 해온 인생이 묻어난다.

어느 날 아침 소는 할아버지의 다그침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할아버지는 "에이!"라는 말만 거듭할 뿐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쳐 9남매를 키워 낸 소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를 정성스레 묻어주고도 할아버지는 절을 찾아 소의 명복을 빌만큼 쉽사리 소를 잊지 못한다. 옆의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곁에서 "소가 계속 생각나요?"라면서 할아버지의 마음을 보듬고 안는다.

모든 것을 다 바친 소와 함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자녀들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소는 없다. 그러나 그 소가 남긴 일생은 이제 할아버지 가족 뿐 아니라 우리에게 기억됐다.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 남은 여생 두 분이 행복하게, 소에게 주지 못한 사랑 서로에게 쏟아부으며 살아가시길 바래본다. 소야 정말 수고 많이했다.

이 영화,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꼭 보시길 권한다.

덧붙이는 글 권오재의 블로그 '오재의 화원'(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워낭소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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