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한 편의 영화가 대한민국 경찰을 긴장시켰다. 당국은 영화를 상영금지시켰고 영화를 상영하려는 대학교에는 전투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영화를 끝까지 상영하기 위해 학생들은 '사수대'로 나섰다.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며 영화는 상영됐다.

그렇게 영화를 관람한 관객수는 어림잡아 30만명. 비공식적이지만 학생·노동자의 지지를 얻었던 이 영화는 세월의 흐름 속에 차츰 잊혀져갔다. '정부의 탄압을 받은 영화'였다는 사실은 역사에 남았지만 그로 인해 80·90년대 영화현실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8년이 지난 2008년, 그 때 그 영화인들이 다시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때 그 필름을 DVD를 통해 복원시켰고 18년이 지난 지금 다시 공안정국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대한민국 서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987년, 치열했던 노사분규 속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던 영화 <파업전야>, 그 영화를 만든 '장산곶매'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

"누구나 만들고 싶었지만, 용기 내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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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인디스페이스 개관 기념으로 상영한 <파업전야>가 적은 관객 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호응을 보이자, 이에 고무된 영화인들이 DVD 출시를 기획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DVD 복원을 통해 일반 관객들에게 선을 보이게 됐다. 소문으로만 듣던 문제작을 이제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10일 열린 <파업전야>DVD 출시 기념회에서 그 때 제작에 참여햇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파업전야>는 영화 자체도 극적이지만 만들어진 과정도 정말 영화 같았다. 1년여 전,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오! 꿈의 나라>를 만든 장산곶매인들은 이번에는 카메라를 노동자의 현실로 돌리기로 결정한다. 이 영화를 제작한 이용배 감독은 "그 때 영화인들이라면 누구나 노동자 문제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만 정부의 탄압이 무서워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이다.

젊은 영화인들은 용기를 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투쟁의 방법은 바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예산은 부족했고 장비 또한 부족했다. 게다가 날은 엄청 추웠다.

그 추위 속에서 영화인들은 정상조업 재개 투쟁이 한창이던 인천 한독금속 사업장에서 합숙을 하며 촬영을 했다. 6개월간의 촬영 속에서 영화인들은 스태프가 되기도 하고 엑스트라가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장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젊은이들의 열정 하나만으로 <파업전야>는 만들어졌다.

"다들 영화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었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한번도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공통된 생각이 있었으니까요." 

총연출을 맡았던 장동홍 감독의 말이다.

"열정 쏟아부었기에... 후회는 없다"

이렇게 고생을 하며 만든 영화였지만 상영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예상대로 당국은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고 경찰들은 상영을 힘으로 막으려 했다. 그렇게 '상영투쟁'이 이어졌다.

"당시 <파업전야>를 봤던 몇몇 노동자들이 다니던 회사에서 불이익을 겪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탄압을 가한 것이죠. 게다가 영화 상영장을 지키던 대학생이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어요. 영화 상영을 막으려고 젊은 학생들까지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올랐죠. 그 학생의 치료비를 모금했을 때 열렬한 호응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용배 감독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파업전야>를 한 번이라도 더 상영하는 것이 바로 공권력과 군사 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 투쟁의 여파는 장산곶매의 다음 작품인 <닫힌 교문을 열며>에도 이어진다.

"그 때만 해도 정부는 상영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근데 그 생각을 우리가 완전히 바뀌게 만들었죠(웃음). 해서 <닫힌 교문을 열며>를 만들 때는 아예 녹음실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면서 녹음을 하면 세무조사 등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을 해댔어요. 결국 일본까지 가서 녹음을 해야 했습니다."

장산곶매 사람들 중에는 지금 충무로에서 활동 중인 이은·장윤현·공수창 감독을 비롯해 이용배 감독과 장동홍 감독, <닫힌 교문을 열며>를 만든 이재구 감독 등이 있다. 지금도 영화계에 몸담은 이들이 있지만 영화계를 떠나 사업 등 다른 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파업전야>는 자신의 열정을 다 쏟아부었던, 잊지 못할 추억이다.

"십년 정도 영화판에 있다가 결국 영화계를 떠났는데 전혀 후회가 없었어요. <파업전야>에서 내 열정을 모두 쏟았기 때문에. <파업전야>를 만들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이 있었기에 아무 미련없이 영화판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편집을 맡았던 정성진씨의 말이다.

배우 중에는 얼마 전 개봉한 <안녕! 허대짜수짜님>에 출연한 엄경환씨가 눈에 띈다. "대학에서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영화를 하자고 해요. 작품을 보고 뜻이 맞아서 출연을 하게 됐지. 대부분의 배우들이 비록 연기 경험은 적었지만 뜻이 통했기에 망설임 없이 출연을 결정했고 고생을 같이 했어요. 추위 속에서 같이 밥도 먹고…."

하지만 지금도 엄경환씨는 자신의 연기가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DVD 편집을 맡았던 권혁구씨는 95년 대학 입학 당시 <파업전야>를 본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번 작업에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고 말한다.

"동아리에서 영화를 보는데 정말 제겐 충격이었어요. 새로운 현실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었죠. 후배들에게 이 영화 보라고 막 권유하기도 했어요(웃음)"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파업전야>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영화인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공동 창작'을 시도했다는 것이 우선 의의가 있고, 이 영화를 시작으로 이제 영화인들이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하면서 90년대 영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파업전야>는 80년대에서 90년대 영화로 넘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영화였습니다."

"18년, 현상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아"

장산곶매 사람들은 <파업전야>를 '시대를 잘 타고난 작품'이라고 말한다. 군사 정권의 탄압이 한창일 때 영화가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고 18년이 지나고 다시 공안정국으로 돌아설 무렵 DVD를 통해 또 한번 비판의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영화 관련 사진 슬라이드 쇼와 함께 DVD 부가영상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소 장산곶매>는 의미심장하다. 장산곶매 사람들의 최근 모습과 함께 촛불집회를 촬영한 이 다큐멘터리는 18년전의 상황과 지금 상황이 결국은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18년이란 세월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관객들에게 <파업전야>를 다시 선보이는 이유다.

"18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현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본질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젊은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비록 옛날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장동홍 감독)."

덧붙이는 글 19일 저녁 8시 인디스페이스에서 <파업전야> DVD 부가영상이 상영됩니다.
파업전야 장산곶매 닫힌 교문을 열며 오 꿈의 나라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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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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