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누군가를 보면 공연히 가슴이 떨린다. 말을 하려하면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돌아서면 후회감에 가슴을 친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만 떠오르고 남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도 공연히 가슴이 설렌다. 그 때 우리는 '이게 사랑인가?'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이 70이 넘은 할머니에게 어느 날 그 감정이 찾아왔다. 우연히 나타난 젊은 남자, 그 남자를 볼 때마다 할머니의 가슴은 초조해진다. 손자뻘인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니, 참 다 늙어서 뭔 주책인가 싶다. 그래도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젊은 여자에게 묘한 질투심마저 들 정도로 그 남자만 보면 더 잘해주고 싶고 더 친절하게 대하고 싶다. 나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 것일까?

2004년 제작되어 4년 만에 수입 공개된 찰스 댄스 감독의 <라벤더의 연인들>은 뒤늦게 찾아온 할머니의 수줍은 감정을 바이올린 선율에 담은 아름다운 영화다. 영국을 대표하는 두 중견배우 주디 덴치와 매기 스미스의 앙상블만으로도 기대를 갖게 하지만 많은 상영관에서 상영하지 않고 있어 영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 정말 아쉬울 뿐이다.

나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 것일까?

 우슬라(주디 덴치)는 점점 젊은 안드레아(다니엘 브륄)에게 연정을 갖게 된다

우슬라(주디 덴치)는 점점 젊은 안드레아(다니엘 브륄)에게 연정을 갖게 된다 ⓒ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1930년대 영국의 한 바닷가 작은 마을. 이곳에 두 할머니 자매, 지넷(매기 스미스 분)과 우슬라(주디 덴치 분)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폭풍이 지나간 아침, 자매는 바닷가에 쓰러져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달려가 보니 이 남자, 정말 잘생긴 '꽃미남'이다.

그 남자는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안드레아(다니엘 브륄 분). 미국으로 가려던 그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이곳 영국의 바닷가로 떠내려온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게 되지만 두 할머니의 간호 속에서 안드레아는 점점 기운을 차려가고 간단한 영어도 조금씩 배우게 된다.

젊은 시절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채 처녀로 늙어 버린 우슬라는 안드레아를 만나면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영어에 서툰 안드레아를 위해 집안 가구에 영어 단어를 써놓으며 의사 소통을 시작하는 우슬라는 조금씩 안드레아를 손님이 아닌 남자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안드레아의 음악을 좋아한다며 수시로 나타나는 올가(나타샤 멕켈혼 분)는 질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젊고, 아름답고, 안드레아도 호감을 표시하는 올가는 마치 젊은 시절 우슬라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질투심으로 인한 우슬라의 돌발 행동 때문에 안드레아와 우슬라 사이에 오해가 생기는 일도 생긴다.

긴장감보다 편안함에 치중한 영화 스타일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두 여배우, 주디 덴치와 매기 스미스다. <007> 시리즈의 'M' 역으로 잘 알려진 주디 덴치는 이 영화에서 때로는 철없어 보이기까지 한 우슬라로 변신했다. <시스터 액트>와 <해리포터> 시리즈로 낯이 익은 매기 스미스 또한 마음 여린 동생을 따뜻하게 안아 주는 언니로 나와 관록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라벤더의 연인들>에서 호연을 보여준 매기 스미스(왼쪽)과 주디 덴치

<라벤더의 연인들>에서 호연을 보여준 매기 스미스(왼쪽)과 주디 덴치 ⓒ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이들은 연극 무대에서도 자주 섰고 실제로는 나이가 동갑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 정말 매기 스미스가 언니 같고 주디 덴치가 동생 같다. 때론 관록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오는 법이다. <레드 바이올린>의 연주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과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협연해 만든 영화음악 또한 이 영화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영화의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종반으로 갈수록 안드레아와 올가를 의심하는 마을 사람의 눈초리가 매서워지고 이를 지키고 숨겨주려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긴장감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또한 안드레아를 향한 우슬라의 연정을 좀 더 건드렸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대신 영화는 극적 긴장감보다 바닷가의 평안함, 그 바닷가의 자연을 닮은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동화되는 안드레아의 모습을 더 중시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착한 사람들이 주는 평안함을 느끼며 마음 편히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사랑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음을...

 바이올리니스트 안드레아(다니엘 브륄)

바이올리니스트 안드레아(다니엘 브륄) ⓒ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처음과 끝은 두 자매가 바닷가를 산책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소녀 같은 모습으로 장난을 치던 처음의 산책과는 달리 마지막은 바닷가를 따라 나란히 걷는 두 할머니를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바다가 흘러가듯이 자매는 살 것이다. 짧지만 행복했던, 가슴 아픈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편안했던 그날의 추억을 가슴에 담으면서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라는 생각도 함께 담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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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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