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타임즈 영화 포스터  출처 네이버 출처 네이버

▲ 모던 타임즈 영화 포스터 출처 네이버 출처 네이버 ⓒ 김호원

세상이 어수선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뒤숭숭하다. 집값이 오르고, 라면 값이 오르고, 대학등록금이 오른다. 젊은이들의 한 달 노동의 대가가 80만원이라고 한다. 사람의 가치가 고작 80만원이라니? 너무 하지 않은가? 희망을 찾아야 하는데 나락의 긴 터널만 보인다. 필자와 같은 완전실업자에게는 이러한 현실이 다른 이들보다 짜릿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이렇게 암울한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새해 벽두부터 두 편의 우리 영화가 개봉됐다. 차태현·하지원 주연의 정신장애인 ‘승룡’이의 아름다운 순애보를 다룬 <바보>와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착각하는 간질병(정신질환) 앓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황정민·전지현 주연의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가 그것이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본 싶은 메세지는 결론적으로 "누가 진짜 바보일까요?" 라며 물음표의 공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바보'라는 표현은 장애인을 비하한다는 '바보'라는 표현이 아니다. 보통 자기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어릴 때 TV를 통해 즐겨보던 추억의 '바보' 비실이·땅달이·영구·맹구…. 이들은 하나같이 1970년대, 80년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웃음으로 애환을 그리고 사회를 풍자 했다. 웃기면서도 비판하고, 비판하면서도 웃기는 걸 보고 '냉소'라고 말한다.

 

그런데 서양에는 우리보다 반 세기나 앞선 영국 런던 태생의 원조 바보가 있었다. 비평가 버나드 쇼가 20세기의 진정한 천재라며 찬사를 보냈던,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권위주의를 냉소하듯 중절모와 남루한 옷차림과 지팡이, 우스꽝스런 팔자걸음의 주인공, 그가 바로 원조 바보 찰리 채플린이다. 그리고 채플린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마지막 무성영화'라 알려져 있는 <모던 타임즈>다.

 

영화 모던 타임즈  출처 네이버

▲ 영화 모던 타임즈 출처 네이버 ⓒ 김호원

진정한 천재, 그는 '바보'였네
 

<모던 타임즈>는 제작·각본·감독·주연·음악을 채플린이 담당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항기에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는 인간 소외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1936년작 미국 영화다. 무성영화는 따분할거라는 선입견이 부끄러울 정도로 서정적인 클래식 음악과 채플린의 뛰어난 연기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한 마디로 재밌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벨트 공장에서 나사를 죄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찰리(찰리 채플린 분)는 점심시간에도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급기야 이상행동(평소와는 다른 행동)이 보이자, 정신병원으로 실려가서 정상적인 생활리듬을 찾지만, 실업자가 된다. 거리를 방황하다가 우연하게 시위 군중에 휩싸여 오해를 사서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 끌려가게 되고 곧 모범수로 석방된다. 다시 조선소 직공 등으로 전전하나 실수투성이 되자 또 쫓겨난다.

 

한편 부둣가에서는 바나나를 훔친 굶주린 소녀(포렛 고다드 분, 채플린의 부인)가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녀에게는 어린 동생들과 실직한 아버지가 있었으나 사고로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소녀는 또 다시 거리에서 빵을 훔친다. 경찰에게 찰리는 빵을 훔친 사람은 자기라며 소녀를 도와준다. 둘은 서로의 처지를 감싸 안으며 가까워지게 되고 부푼 미래를 꿈꾸게 된다.

 

찰리는 따뜻하고 근사한 집을 사기 위해 백화점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하기도 하고, 철공소에서 일을 하나 번번이 소동으로 막을 내린다. 소녀의 도움으로 부두 식당에서 종업원과 가수로 일하게 된 찰리는 소녀를 추적하는 사람들을 피해 함께 도망치고 결국 다시 거리의 떠돌이로 남는다.

 

채플린은 기술과 자본이 위협하는 현상을 인간 소외로 파악했다.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 속에 나타난 인간 소외 문제를 톱니바퀴 속에 낀 인간의 모습으로 압축시키면서도 냉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한 그를 사회주의자로 몰았으나 영화에서 소녀가 동생들이 있는 고아원행을 거부하고 찰리와 함께 자유를 찾기 위해 추적자들을 따돌린다. 이건 분명히 당시에 맹위를 떨쳤던 소련의 전체주의 사회를 겨냥한 것이라 추측 된다.

 

영화 모던 타임즈 출처 네이버

▲ 영화 모던 타임즈 출처 네이버 ⓒ 김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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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던 타임즈 출처 네이버 ⓒ 김호원

 

웃으며 걸어라, '바보'처럼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들 때까지 무수히 많은 시장 속에서 물건이나 서비스를 소비하고 때론 판매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간은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까지도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팔아먹어야 한다.

 

한 사회에 일원인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비합리적인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란 보통에 노력 가지곤 어림도 없다. 말이 경제규모가 세계 10위라고 하지만 휴대폰 30% 정도 깎아주는 걸로 소득보장제도라고 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서울이 토박인 내가 사는 집은 공공임대아파트다.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십년 전에 복덕방에 들러 단칸방에 월세를 물어보면 서울 강북에선 10만원 선 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보통 25만원이다. 가난한 사람에겐 단 만원도 아쉽다. 우리나라 제일가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께선 다른 건 몰라도 장애인의 주거문제만큼은 확실하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미국이 이라크를 두 번이나 침공한건 단지 석유 때문이 아니다. 무너진 이라크에 기반 시설을 토목하고 건설하는데 막대한 이익이 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건설회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 정부에서 추진 중인 대운하 사업이나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황폐화하고 파괴해야지만 정체성이 유지 되는 사회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를 비판했다고 해서 부정하자는 게 절대 아니다. 좀 더 발전되길 바라고 애정과 관심이 있기 때문에 문제를 지적하고 고민하는 좋은 방향으로 나가자는 것이며, 좀 더 인간을 닮은 사회를 지향하자는 의미다.

 

<모던 타임즈>의 라스트 신에서 거리에 나선 찰리는 절망감에 싸인 소녀에게 웃어보라고 청한다. 그런 두 사람이 길게 뻗은 가운데 길로 내일의 희망을 안고 걸어가는 뒷모습은 유명한 장면이다. 나 역시 가슴 찡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인간은 어떤 사회에 살건 간에 이익에 측면에서가 아니라 존재에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가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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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던 타임즈 출처 네이버 ⓒ 김호원

2008.03.11 18:34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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