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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말씀드렸지요. ‘부치지 않은 편지’는 제가 가장 아끼는 노래입니다. 아마도 ‘부치지 않은 편지’를 쓰게 되려고 그랬나 봅니다. 오늘은 가시나무새처럼 슬프면서 파랑새처럼 희망어린 어느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잿빛 톤에 잔잔한 격정이 흐르는 포스터에 끌리듯이 보게 된 영화는 <퍼>라는 작품입니다. 주연배우가 니콜 키드먼이었습니다. 그녀는 <도그빌>과 <디아더스>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지요. 그녀가 꼭 몇 백 년 된 나무처럼 크게만 보였던 영화였습니다. 시선을 던지거나 움직일 때마다 대숲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큰 배역에 도전했더군요.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허문 사진가 디앤아버스

퍼는 디앤아버스(1923-1971)의 전기 영화입니다. 사실 디앤아버스라서 좀 놀랐습니다. 그래요. 디앤아버스는 꽤 유명한 사진작가죠. 장애인, 기형아, 성전환자 등을 대놓고 찍었던 용감한 그녀. 음지식물처럼 어디선가 숨어 지내던 그들을 액자에 담아 양지바른 곳에 데려다놓았습니다.

그녀를 일컬어 다큐사진을 거대담론에서 한 개인의 심리로 옮겨왔다고도 하고 아름다움과 추함,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질문을 던졌다고도 하대요. 암튼 디앤아버스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사진가입니다. 그리고 그녀 덕분에 저 또한 불편한 진실을 아프게 환기했습니다. 원래 불편한 건 미세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신경이 쓰이고 은근히 아리지요.

퍼는 디앤아버스의 파란만장 생애를 전부 다 담지는 않습니다. 디앤이 사진작가로 서기까지의 3개 월 간 초기단계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실제 현실에는 없었던 다모증에 걸린 이웃집 남자 라이오넬이 등장합니다. 라이오넬은 얼굴과 온몸이 온통 털로 뒤덮여있습니다. 디앤은 동화나라 공주님 같은 원피스 입고 사는 상류층 부인이고요. 미녀와 야수처럼 둘이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남편의 어시스턴트이자 두 딸의 엄마였지요. 내조 9단의 주부였던 그녀가 사진가로서 자아를 찾아갑니다.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자신의 욕망과 천재성을 일깨워갑니다. 그러니까 퍼는 밀도 높은 심리드라마이자 몽환적인 멜로드라마입니다. 전기영화라기보다 성장영화이자 여성영화, 소수자인권영화에 가깝습니다.

‘내면의 거울’ 앞에선 그녀, 나를 찾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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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앤이 ‘나도 내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먹는 최초의 계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공식석상에서 남편 옆에서 모피 숄을 두르고 ‘누구의 아내’로 인형처럼 서 있는 그녀에게 한 부인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요. “모델의상도 챙기고 다림질도 하고 남편을 돕는다”라고 주섬주섬 머뭇머뭇 말하다가 울컥합니다.

그곳을 뛰어나갑니다. 마치 유아가 처음으로 자기 모습을 거울로 보고 낯선 감정과 당혹감에 빠지듯, 그녀는 뒤늦은 나이에 심리적 거울단계를 경험합니다.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는 계기는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일상을 살던 그녀였으니 내면의 모습을 볼 기회도 필요도 없는 삶이었던 게지요. 그 부인이 무심코 던진 돌이 그녀를 흔들어놓습니다. 때가 무르익었기에 그렇게 강한 통증을 느꼈겠지요.

아파 몸을 떨면서 디앤은 내면의 섬세한 파동을 관찰합니다. 축제였던 인생이 느닷없이 숙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을 성찰합니다. 그러고는 답을 찾지요. 까맣고 무거운 카메라를 하얀 목덜미에 척하니 걸칩니다.  

‘내게 필요한 건 자유가 아니라 출구다’라고 카프카가 말했습니다. 그녀도 그렇습니다. 삶의 무대가 집안이었던 그녀가 자아를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가야하나요. 그런 그녀에게 열쇠가 떨어집니다.

하늘에서 운 좋게 떨어진 게 아니라 억척스런 그녀가 발견합니다. 세면대에 물이 막혀서 배수구를 몸소 수리하던 중 홈통에 걸려 있던 털 뭉치와 열쇠를 힘껏 뽑아냅니다. 그 열쇠를 들고 나섭니다. 길 아닌 곳으로 들어서지 말라는 계(戒)를 깨버립니다. 한 계단 위, 길 밖 세상을 향해 미친 듯이 나아갑니다. 물론 그 곳에서 색(色)도 경험합니다.

운명적 사랑과 자아탐험을 동시에 경험하는 그녀는 행복합니다. 얼굴까지 털에 싸인 라이오넬을 털 없는 다수의 척도로 보지 않습니다. 차이를 ‘승인’하는 게 아닙니다. 둘은 차이를 ‘생산’으로 승화합니다.

트라우마를 지고 살아온 그를 동경합니다.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촉발시킵니다. 각자의 특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 감응을 이룹니다. 진정한 교감과 사랑을 이루는 그 시간이 둘은 꿀처럼 달콤합니다.

장애인, 기형아, 성전환자와 벌이는 일상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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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넬을 통해 디앤은 더 넓은 세계를 겪습니다. 그의 친구들인 난장이, 거인, 성전환자 등을 초대해 집안에서 파티도 벌입니다. 남편은 온통 서커스단 같은 무리들 뒤치다꺼리하는 당신이 낯설다고 울분을 표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사진 찍으라고 했지 집안 내팽개치라고 했느냐고 소리도 치대요.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남편들은 비슷한가봅니다. 

하지만 그녀는 외려 이해받지 못하는데 영광이 있다는 듯 의연합니다. 고집스런 예술가의 기질이 돋보입니다. 아니, 진정성의 힘이겠지요. 우리는 상대편에게 무엇인가 말해주고 싶어 할 만큼 충분히 다르지만, 또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비슷하다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압니다.

디앤은 라이오넬을 단 한 번 원망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많은 그녀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곧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그에게 말합니다. “이러려고 날 사랑하게 했나요.” 달빛같이 시린 시선을 응시하며 눈물 흘립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라이오넬은 그러려고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많은 친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라이오넬은 없지만 그녀는 갈 곳이 많아졌습니다. 더 많은 라이오넬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 더 큰 차원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디앤은 그렇게 길을 떠납니다. 라이오넬표 긴 털망또를 걸쳤습니다. 그의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그녀는 갑니다. 카메라 둘러메고 사람 숲으로 사라집니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 부치지 않은 편지 중

디앤아버스 부치지 않은 편지 니콜키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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