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기자는 멕시코에 유학중인 시민기자 입니다. 이 기사에는 장 기자가 지난 12월 도미니카 공화국을 방문해 도미니카 윈터 리그를 취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편집자말]
 
카리브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바바라 해변 도미니카 공화국은 그림같은 카리브해를 즐길 수 있는 휴양지이기도 하다

▲ 카리브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바바라 해변 도미니카 공화국은 그림같은 카리브해를 즐길 수 있는 휴양지이기도 하다 ⓒ 장혜영



콜럼버스는 이곳에 처음 도착한 뒤 "여기가 파라다이스다"라 말했다. 카리브해 에스파뇰라 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메렝게 리듬의 고향으로, 유럽과 북미의 중상류층에겐 비교적 값싼 비용으로 그림 같은 카리브 해 바다를 즐길 수 있는 대표적 관광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메이저리그의 명선수들을 배출한 '야구의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2007년 시즌에도 메이저리그 개막전 로스터에 등록된 선수 849명 중 무려 98명의 국적이 도미니카였다. 도미니카의 전체 인구가 900만명이 채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실로 경이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 중에는 알폰소 소리아노(시카고 컵스), '빅파피' 데이빗 오티즈(보스톤 레드삭스),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뉴욕 메츠), '괴수' 블라디미르 게레로(LA 에인절스) 등 쟁쟁한 '슈퍼스타'들도 대거 포함돼 있다.

야구의 나라답게 이 섬의 주민들은 야구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야구 프로리그 시기엔 모두들 저녁 시간에 TV 채널을 야구 중계에 맞추고, 케이블 TV를 달지 않은 주민들은 간이 의자를 들고 동네 슈퍼의 대형 TV 앞에 모여들곤 한다. 시원한 맥주 한 병, 메렝게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며 야구를 보다 보면 하루의 피곤이 다 날아간다는 도미니칸들 특유의 야구 타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메이저리거까지 참가하는 도미니카 겨울 리그

레오네스 델 에스코히도 팀의 팬들. 산토도밍고 키스케야 야구장은 도미니카 겨울리그의 시작과 동시에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사자 (레온) 는 산토 도밍고 연고팀의 하나인 에스코히도 팀의 마스코트다.

▲ 레오네스 델 에스코히도 팀의 팬들. 산토도밍고 키스케야 야구장은 도미니카 겨울리그의 시작과 동시에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사자 (레온) 는 산토 도밍고 연고팀의 하나인 에스코히도 팀의 마스코트다. ⓒ 장혜영



산토 도밍고 키스케야 야구장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 도밍고 키스케야 야구장은 한국이나 미국에 비해도 손색없는 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외야 쪽엔 관중석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 산토 도밍고 키스케야 야구장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 도밍고 키스케야 야구장은 한국이나 미국에 비해도 손색없는 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외야 쪽엔 관중석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 장혜영


도미니카 겨울리그(Liga dominicana del béisbol inviernal)는 메이저리그가 끝나는 10월 말에 시작해 12월 말까지의 정규 시즌과 1월의 포스트 시즌을 통해 우승팀을 가린 뒤 카리브해 4개 나라 우승팀들이 합동으로 펼치는 2월의 카리브해 시리즈(Serie del Caribe)를 치른다.

수도인 산토 도밍고 연고의 '리세이'와 '에스코히도', 도미니카 제 2의 도시인 산티아고 데 로스 카바예로스 연고의 '아길라스', 라 로마나 연고의 '아수카레로스', 그리고 유명한 투수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작은 도시 산 페드로 데 마코리스 연고의 '에스트레야스 오리엔탈레스', 그리고 이름이 비슷한 도시인 산 프란시스코 데 마코리스 연고의 '히간테스 델 시바오', 이 6개 팀이 경쟁을 펼친다.  

이러한 겨울리그는 도미니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다. 수도 산토 도밍고의 경우 결코 입장료가 싸다 할 수 없음에도 경기장이 거의 매일 가득 찬다. 선수들 또한 상당한 경기력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도미니카 출신들이 미국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와 상당수 팀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덥고 추워서 뛸 때와 쉴 때가 뚜렷한 한국이나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도미니카 공화국은 '덥거나 아주 더운 날씨' 뿐이다. 그래서 도미니카 출신의 선수들은 1년 내내 꾸준히 야구를 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특별한 부상이 없으면 겨울에도 자국리그에서 뛰면서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또한 타 리그 선수들에게 한껏 문이 열려있는 이 도미니카 겨울리그는 비단 자국 선수들에게만 열려 있는 게 아니다. 예전 박찬호도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자리를 굳히기 위한 기로에 서 있었던 1996년, 겨울에 한 달여 간 이 도미니카 리그서 활약, 2승 2패, 1.3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결국 이듬해 팀의 5선발 자리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작년 멕시칸리그에서 활약한 호세 리마처럼 도미니칸이지만 왕년에 유명했던 올드 스타급 선수들도 이 리그에 합류 했다. 두 리그를 통해 계속해서 안정된 투구를 보여준 호세 리마는 이미 한국 KIA 팀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상태이다.

한국 선수 만나러 갔더니, 일본 선수만...

 도미니카 유소년 선수들의 연습 장면

도미니카 유소년 선수들의 연습 장면 ⓒ 장혜영



한편 도미니카 겨울리그는 자국 정규리그가 끝난 한국이나 일본 젊은 유망주들의 유학처가 되기도 한다. 올해의 경우, 수도 산토 도밍고 연고의 에스코히도 팀에 한국 롯데 자이언츠 팀 소속의 허준혁·강영식 선수가 합류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사실 멕시코에 살며 한국에 몇 년 동안 못 가봐서 이 선수들의 얼굴은 잘 모른다. 어쩌면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름다운 카리브해 바다에 '풍덩' 하는 것 보다 야구장 가는 게 더 급했던 것도, '이 한국 선수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허둥지둥 도착한 산토 도밍고 끼스께야 야구장의 에스코히도 팀 더그아웃에 젊은 동양인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쁘게 손을 흔든 것도 잠시, 돌아오는 대답은 서툰 스페인어로 하는 "저 한국사람 아닌데요"가 아니겠는가.

내가 만난 선수는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스 소속의 투수 카와이 스스무로. 리그 시작한지 절반을 좀 넘어선 시점이었던 2007년 12월 2일, 그날의 선발 투수였는데, 그 선수 말인즉슨 한국에서 온 두 선수는 얼마 전 원 소속팀의 부름을 받고 급하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사실 메이저리거까지 합류하는 이 도미니카 겨울 리그에서 한국 선수들이 출전기회를 자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 오늘 선발이에요"라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이 배짱 좋은 일본 좌완 투수의 경기를 도미니칸들과 함께 즐기기로 했다.

카와이 스스무 이날 에스코히도 팀의 선발 투수였던 카와이 스스무는 시즌 초에 이주의 선수로 뽑히는 등 좋은 활약을 했다.

▲ 카와이 스스무 이날 에스코히도 팀의 선발 투수였던 카와이 스스무는 시즌 초에 이주의 선수로 뽑히는 등 좋은 활약을 했다. ⓒ 장혜영



도미니카의 야구 경기는 그야말로 '축제'다. 공수 교대 때마다 흘러나오는 메렝게 음악에 맞춰서 경기장을 꽉 채운 전 관중은 물론 맥주를 파는 판매원들까지 몸을 흔들면서 음식을 갖다 준다. 이 열기 넘치는 경기장 한가운데 선 카와이 스스무는 다소 좀 긴장해 보였는데 위기를 잘 막아서 4회까지 1실점 비자책으로 잘 버텼다. 그러나 야수들이 잇단 실책으로 주자를 내보내자 "잘 던지고 있으니 바꾸지 마라"고 외치던 에스코히도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도미니카의 영웅, '외계인'와 '괴수'를 직접 보다

한편 12월 첫째주의 주말 경기 때는 리세이 팀 출신 영웅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뉴욕 메츠)에 대한 시상식이 있었는데 라틴계로서 메이저리그에서 3천 탈삼진을 기록한 건 그가 처음이라 마련된 자리라고 한다.

이날 마르티네스는 주변 교통 체증 때문에 상당히 늦게 도착했는데, 다소 지루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관중들의 시선을 끄는 이가 있었으니, 조용히 운동장 한편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던 블라디미르 게레로(LA 에인절스)였다. 

이날 현장에서도 수줍게 사인만 하던 이 괴수(게레로의 별명)는 한 여성 사회자가 "블라디, 이제 그만 부끄러워하고 이리로 좀 와요"라고 부르니 웃으면서 뛰어와 마르티네스에게 축하의 포옹을 해주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괴수'도 고향에 오니 소박한 청년으로 변했다.

페드로 마르티네스 메이저리그에서 라틴계로는 처음으로 3천 탈삼진을 기록한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리세이 팀으로부터 기념상패를 받고 있다

▲ 페드로 마르티네스 메이저리그에서 라틴계로는 처음으로 3천 탈삼진을 기록한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리세이 팀으로부터 기념상패를 받고 있다 ⓒ 장혜영



게레로와 마르티네스의 포옹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3천 탈삼진 기록을 축하하는 시상식에 온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마르티네스와 포옹하고 있다

▲ 게레로와 마르티네스의 포옹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3천 탈삼진 기록을 축하하는 시상식에 온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마르티네스와 포옹하고 있다 ⓒ 장혜영


한편 듀오 디나미코의 명곡이자 진정한 투사에게 바치는 노래라 할 수 있는 '저항하라 (Resistiré)' 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좀 늦게 등장한 마르티네스는 아직 부상 재활 기간이라 그런지 몇 번의 연습 투구 뒤 던진 시구 때 무리한 투구를 하지 않았다. 몸이 나아지면 리세이 팀에서 이번 겨울리그에 뛰고 싶다는 의견도 피력했으나 이후 불발되었다.

도미니카 사람들에게 야구의 의미는?

도미니카 야구를 실제로 접해보니 '왜 도미니칸들이 세계 야구계를 휘어잡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첫째로 타고난 좋은 체격이 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카리브해 사람들은 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체격이 좋은 걸로 소문이 나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본인들은 그저 '하늘이 준 선물' 이라고 한다. 어쨌든 더운 지방사람 특유의 유연성과 좋은 체격이 한 몫을 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1년 내내 야구를 할 수 있는 따뜻한 기후도 한 몫을 한다. 하지만 사실 여름에는 너무 덥고 햇빛이 살인적이기 때문에 야구를 하기에 적절한 기후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 물론 그 기후가 만들어내는 푸른 잔디는 또 하나의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19세기 말인 1890년에 이미 프로팀이 창설된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 '전 국민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야구를 사랑한다'는 그 열정과 저변이 아닐까.

에스코히도 팀의 선물 판매소 키스케야 구장을 홈으로 쓰고 있는 두팀 중 하나인 레오네스 델 에스코히도 팀의 선물 판매 센터 모습, 뒷쪽에 도미니카 야구의 현역들인 블라디미르 게레로와 다비드 오르티스의 포스터가 보인다

▲ 에스코히도 팀의 선물 판매소 키스케야 구장을 홈으로 쓰고 있는 두팀 중 하나인 레오네스 델 에스코히도 팀의 선물 판매 센터 모습, 뒷쪽에 도미니카 야구의 현역들인 블라디미르 게레로와 다비드 오르티스의 포스터가 보인다 ⓒ 장혜영


도미니카 공화국은 일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판잣집들만 가득한 그런 저개발 후진국은 절대 아니다. 나름의 사회 체계를 갖추고 있고 고급 아파트촌도 있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나라다. 하지만 극빈자들에 대한 보호가 부족한 나라 체계 때문에, 그들에게 '가난 탈출의 방법은 야구로 성공하는 것'이란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내가 산토 도밍고에서 야구 경기를 보던 그 12월의 첫 주에, 현 텍사스 레인저스 팀 소속인 또 한 명의 '도미니칸 야구 영웅' 새미 소사의 생일과 그의 600홈런을 자축하는 파티가 있었다.
     
유명 인사들이 즐비했던 그의 화려한 생일 파티 소식과 아내와의 요염한 메렝게 춤 장면은 1주일 내내 도미니카 TV에 방영되었다.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날 때 선물을 살 돈이 없어 길에 나가 구걸을 해 받은 1페소로 겨우 어머니께 선물을 드렸다"는 새미 소사의 이 말은 TV 전파를 타고 모든 이의 심금을 울렸다.

도미니칸 들에게 야구는 꿈이요, 현실의 위안이요, 미래의 희망이다, 이런 목표를 가진 선수들이기에 그들은 1년 내내 야구를 하는 것도, 나이 오십이 다 돼서도 야구를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꿈이 존재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꿈을 가지고 달려가 결국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야 마는 도미니카 야구 선수들의 집념과 노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그들은 적어도 '꿈' 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고,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던 듀오 디나미코의 노래 '저항하라 (Resistiré)'처럼, 그들은 야구를 통해 자신의 가난한 환경과 맞서 싸운 저항자들이기 때문에.

덧붙이는 글 도미니카 겨울리그의 6 팀의 정식 명칭은 Tigres del Licey, Leones del Escogido, Aguilas Cibaeñas, Azucareros del Este, Estrellas Orientales, Gigantes del Cibao 입니다.
도미니카 윈터 리그 메이저리그 페드로 마르티네스 블라디미르 게레로 한국 프로야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