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성들의 연애와 결혼을 소비지향적으로 그려낸 <어깨너머의 연인>

30대 여성들의 연애와 결혼을 소비지향적으로 그려낸 <어깨너머의 연인> ⓒ 싸이더스 FNH

노처녀 언니들의 이야기가 이제 스크린에서 붐을 일으킬 모양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브라운관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왔던 언니들. 그래서 각양각색의 언니들의 삶을 통해 우리 주변에 노처녀들의 이야기와 30대 여성의 라이프를 엿볼 수 있었다.

 

30대를 넘어선 여성들은 으레 사회적인 통념상 연애와 결혼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 드라마의 소재로 이용된 것. 이러한 소재를 이제 브라운관을 넘어서 스크린에서도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어깨너머의 연인>이 그것이다.

 

물론 <어깨너머의 연인>은 유이가와 케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이지만 기본적인 뼈대를 빼고는 여러 이야기들을 가지치기 해 노처녀의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이언희 감독은 원작의 다양한 현대인들의 삶 대신 서른을 넘은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배경에는 아마도 서른 살 넘은 여성들의 삶에서 한국적인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란 생각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원작에선 동성애, 원조교제 등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너무 일본적이고 그들의 취향이 물씬 풍긴다. 아마도 감독은 그런 이야기들이 한국인들 정서에 맞지 않았음을 간파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배경 덕분에 영화 <어깨너머의 연인>에서는 일단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른 살 노처녀들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만나 볼 수 있다. 여기에 이언희 감독은 관객을 유혹하고자 두 가지 코드를 내세웠다.

 

지극히 영화적인 사랑의 의미 모색한 <어깨너머의 연인>


대게 연애와 결혼이라는 것에 따라서 여성들이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연애를 좋아하는 여성, 결혼이 체질인 여성으로 나뉜다. 물론 그러한 여성 분류법은 어디까지나 영화적인, 드라마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분류법에 의해 정완(이미연), 희수(이태란) 두 여성이 표현하는 연애관과 결혼관도 지극히 영화적이다.

 

결혼보다는 연애에 치중하는 정완, 결혼이 체질이며 여왕처럼 사는 것이 제 격이라는 희수. 자기만의 직업적 철학이 뚜렷한 포토그래퍼 정완. 정완은 결혼보다 일이 우선이며, 연애를 즐긴다. 반면 희수는 자신만의 일보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에 평안한 삶을 누리는 스타일로 결혼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두 여성이 대하는 사랑 방식이 너무나 쿨해 포토그래퍼 정완은 자신이 일하는 스튜디오 사장 영후와 연애를 시작하고,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또한 희수는 촌스럽고 아저씨 같아서 자신만을 바라볼 것 같은 남자와 결혼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쿨함은 역시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두 주인공들은 종반에 이르러 깨닫는다.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연애에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았지만 정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자신만 바라볼 것 같은 남자가 겨우 22살인 여자아이와 외도하는 사실을 알고, 어린 여자아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분개해 이혼을 감행한다. 

 

이처럼 영화는 그녀들의 쿨한 연애와 결혼 사고방식을 종국에 ‘쿨하지 않은’ 그녀들의 모습을 대비시켜 사랑의 의미를 모색하려한다. 하지만 영화는 사랑의 의미를 모색하려는 일련의 과정을 소비지향적인 패턴에 의해 철저하게 묘사하고, 두 여성의 캐릭터를 지극히 영화적으로 한정시킨 탓에 30대 여성들의 삶의 공기가 묻어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이 실종되버린 것이다.

 

 그녀들의 소비생활 패턴은 지극히 영화적이어서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그녀들의 소비생활 패턴은 지극히 영화적이어서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 싸이더스 FNH

 

거침없는 입담의 한국판 <섹스 앤더 시티>


대신 한국판 <섹스 앤더 시티>가 탄생했다. 영화는 두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섹스 앤더 시티>에서 보여주었던 소비지향성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렇다 보니 진짜 30대 여성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마놀로블라닉 구두에 집착하고 사고 싶은 구두가 있으면 몇 정거장을 걸어가야 할 것을 감수하면서 워커홀릭을 자청하던 뉴요커 캐리와 사랑도 중요하지만 섹스도 중요하다고 굳게 믿는 사만다, 냉소적이지만 진심어린 사랑을 추구하는 미란다, 안락한 결혼생활에 치중하려는 샬롯과 비슷한 캐릭터들이 모사된 듯 보일 뿐 그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초반 <섹스 앤더 시티>의 주인공들을 복사해 놓은 듯한, 정완과 희수의 화려한 소비생활이 먼저 눈에 띈다. 강남의 45평 아파트와 브런치, 수 백만 원을 호가하는 루이비통 핸드백 등. 정완과 희수의 소비생활은 30대 보통 여성들이 따라한다면 밀린 카드 값에 허덕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뉴요커 네 명의 여성들이 소비하는 문화패턴을 정완과 희수가 고스란히 답습하고 연애와 결혼을 소비로 규정해버리는 <어깨너머의 연인>이다. 하지만 한국판 <섹스 앤더 시티>라고 하기엔 뉴요커 4명의 여성들의 진전성까지 따라하지 못하고 그들의 겉모양에만 치중해 버렸다.

 

사실 마놀로블라닉에 심취한 캐리도 소비생활 때문에 집세를 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친구들도 그녀의 소비생활에 적잖은 충고를 한다. 섹스를 탐닉하는 사만다는 적어도 홍보업체 대표를 겸하며 주체적인 섹스 라이프를 즐긴다. 하지만 정완과 희수가 즐기는 연애와 결혼은 모두 남성성에 기댄 채 이뤄지며, 일반적인 트렌드를 추구하는데 그쳐버렸다. 대신 그러한 미완성을 거침없는 입담으로 무마하고자 한다.

 

“전신운동 되겠다.”

“일주일에 세 번만 하면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대.”

 

이러한 섹스 관련된 대사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정완과 희수의 입담은 서로 경쟁하는 듯 직접적이고, 거침 없다. <섹스 앤더 시티>에서 사만다가 내뱉는 야릇한 발언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거침없는 입담은 이미 우리가 예전부터 줄곧 들어왔던 것이기에 영화에서 미처 추구하지 못한 30대 여성들의 진전성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거침없는 입담은 그녀들의 소비지향적인 사고방식과 맞물려 ‘쿨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이러한 연애와 결혼을 소비지향적인 패턴으로 이해하던 그녀들의 결말이 ‘모성’으로 집약되면서 중간에 이뤄져야 할 일들이 생략되어 일을 벌려 놓고 수습하지 못하는 형국이 되고 만다.

 

특히 여성들의 삶의 결론을 ‘모성’으로 결론짓는 것은 구태의연하다. 모든 갈등과 위기가 여성들의 모성성을 되찾는 과정으로 마무리되어 일순간 갈등과 위기가 사라져버리는 방식은 식상해 이제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쿨한 정완과 희수가 아닌, 우리들의 캐릭터였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쿨한 정완과 희수가 아닌, 우리들의 캐릭터였다. ⓒ 싸이더스 FNH

 

때가 어느 때인데, 언니들 정신 차려!


때문에 영화는 그들의 결론 보다 그들이 벌이는 소비지향적인 연애와 결혼에 그저 대리만족해야 할 뿐, 그 이상의 것을 얻어갈 수 없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면 막돼먹은 영애 언니가 “이런 젠장, 때가 어느 때인데!”라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스크린과 달리 브라운관에서는 이제 30대 여성들의 삶이 진전성을 찾고 있는 시기여서 <어깨너머의 연인>의 정완과 희수의 캐릭터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브라운관에서 눈이 높아진 관객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시작한 노처녀 열풍은 그녀들의 겉모습보다 내면에 치중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현재 현실성을 가미해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30대 여성들의 모습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어깨너머의 연인>에서의 정완과 희수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이다. 가령 포토그래퍼인 정완의 삶을 보자. 아무리 이름을 서서히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이지만 정완의 삶은 자신의 직업 수준에서 격상되었고, 남편의 경제력에 기댄 채 쇼핑을 일삼는 희수의 삶도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상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는 간판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인 평범한 영애(김현숙) 언니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난희(수애) 언니의 모습이다. 제대로 연애 한 번 하지 못한 뚱뚱한 영애 언니는 회사에서 상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하고, 백마 탄 왕자님은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난희 언니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열정만큼 소질은 별로 없고, 연하남과의 사랑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괴롭기만 하다.

 

그런데 영애 언니와 난희 언니의 삶에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혹은 우리들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에서 재현해 낸 정완과 희수의 인생은 너무나 판타지적이며, 영화적이어서 거부반응을 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30대 여성들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영화적인 판타지의 대리만족 보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보여줘 공감대를 형성이 인기비결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깨너머의 연인>은 그러한 인기비결을 모르는 듯싶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먼 나라의 이야기만 같고, 그녀들이 보여주는 30대 여성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부와를 별개로 느껴지다 보니 공감하기 보다는 그저 쓴웃음을 짓게 만들 뿐 그 이상의 진전성을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곳곳에 거침없는 대사는 웃음을 주기도 하고 공감대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전체적인 영화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관객에게 어필하기엔 역부족이며, 영화는 결국 관객들에게 판타지를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2007.10.21 10:45 ⓒ 2007 OhmyNews
영화 어깨너머의 연인 노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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