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위기>를 본다고 했을 때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가문의 위기>는 익히 알다시피 2002년 520만 관객을 동원했던 <가문의 영광> 속편이다. 예고편을 통해 독자들도 짐작했겠지만 영화는 전편의 성공요소들을 고스란히 가져와 재탕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조폭 가문이 그대로 등장하고, 엘리트와 조폭 자손의 연애 이야기를 끼워 넣는 구도 역시 전편과 똑같다. <가문의 영광> 성공에 힘입어 많은 카메오들이 등장하고, 주연, 조연과 카메오 모두가 오로지 웃기겠다는 일념 하에 뭉친 듯 오버 연기에 집중한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학벌과 관련된 우리사회의 콤플렉스의 한 단면을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지만 그것은 '풍자'나 '비아냥'과는 거리가 멀다. 깊이 있는 웃음을 통해 사회 문제에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성적인 농담과 부담스런 오버연기만을 웃음의 전략으로 내세우며 '평범한' 조폭 코미디 영화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문의 위기>를 보며 몇 가지 흥미로운 코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폭 코미디에서 발견한 그 무엇














▲ <가문의 영광>이 남자 학벌에 대한 사회적 선망을 보여줬다면, 속편인 <가문의 위기>는 여자 학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은근한 시기심과 위기의식을 보여준다.

ⓒ 태원엔터테인먼트

<가문의 위기>의 전편인 <가문의 영광>만큼 우리 사회 '학벌'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영화는 없었다. 우리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거나 '학벌 보다는 능력'이라는 슬로건을 지지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당당하게 긍정할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조폭 집안의 신분상승을 위해 딸을 엘리트 남자와 맺으려고 하는, 그 와중에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가문의 영광>은 그러나, 섣불리 학벌의 불합리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려 하지 않았다. 학벌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희극성'에 그대로 의지해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에 주력하는 것만으로도 흥행에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속편 <가문의 위기> 역시 '학벌'을 둘러싼 가문의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영화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풍자'에는 관심이 없다. 전작이 '남성 학벌'에 대한 사회적 선망을 보여줬다면, <가문의 위기>는 '여성 학벌'에 대한 은근한 시기심과 위기의식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내 관심을 끈 것은 영화의 내용보다 소재였다. '똑똑한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포심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해피 엔딩'이라는 제작진의 집착이 그 공포심의 근원인 가부장제 해체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 보인다는 점도 재밌다.

왜 가문의 '위기'인가

우선 전편과 비교해 제목을 보자. 제목에서부터 남녀의 학벌을 보는 이중적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학벌 좋은 남자와의 결혼이 신분상승을 기대할 수 있는 <가문의 '영광'>이라면, '검사'라는 드센 여자와의 결혼은 대뜸 <가문의 '위기'>로 비화된다. 영화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고래의 유서 깊은(?) '똑똑한 여성'에 대한 공포증을 현대적 각색으로 보여준다.














▲ <가문의 위기>의 한 장면. 영화가 '가문의 유지'나 '사랑의 결실’ 중 한 가지 방식을 선택하면 이 중 한 쪽을 거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이 깨지거나, 가문이 깨지거나.

ⓒ 태원엔터테인먼트

여주인공 진경(김원희)은 조폭 잡는 강력부 검사다. 조폭 집안의 장남 정인재(신현준)가 이런 여성과 사귄다는 건 가문의 '자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설정은 딜레마를 초래했다. 코미디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려면 '학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를 지나치게 거스르지 않되, 해피 엔딩으로 끝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가문의 유지'나 '사랑의 결실' 중에 한 가지 결말을 선택하면 이 중 한 쪽을 거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이 깨지거나, 가문이 깨지거나.

영화는 결국 진경과 인재가 맺어지는 해피 엔딩을 선택하는데, 이 때문에 관객들은 문제의 드센(?) 여자가 '가문'을 파괴해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시점부터 '풍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이 영화는 조폭적 남성 문화를 뒤흔드는 '여성 영웅'의 이야기가 돼버린다.

결사적으로 형의 사랑을 반대하는 막내 경재(임형준)와 둘의 사랑을 훼방 놓는 봉 검사(공형진)의 치졸한 행태를 비웃으며 진경은 꿋꿋하게 사랑을 성취한다. 그녀는 가문을 계승해야 할 장남인 인재를 흐트러뜨려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수갑을 채우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진경의 모습은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악녀'다.

그러나 진경은 관객들에게 '악녀'로 비치지 않는다. '가문의 계승'이라든지 '한국식 온정주의'는 더 이상 긍정적 가치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들을 보는 사회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똑똑한' 여성들이 이미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폭적' 남성 문화의 위기

이 영화의 상징적 장면 하나. 인재가 도끼파에 쫓기던 진경을 구해준 날 밤, 진경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인재는 진경의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순간 남성의 관음적 시선을 질타하듯 잠꼬대를 하던 진경의 손이 인재의 성기를 움켜잡고 비틀어 버린다.(무의식이었는지 고의였는지 모르지만) 남성 문화의 상징인 '남근'을 비트는 이 장면이 내겐 조폭적 남성 중심 문화를 해체하는 '여성'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 진경이 인재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성은 남성 중심 문화가 결여하고 있던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 태원엔터테인먼트

완고한 남성 중심 문화가 구축한 우리 사회의 서열주의, 연고주의, 혈연주의 등은 가히 '조폭적'이라 불릴 만한 병폐들을 가져왔다. 나이, 학벌, 돈, 지역 같은 남성 중심주의를 지탱해주는 가치들(남근)은 크기의 확대를 위한 허위의 '다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싸구려 다마가 아닌 새 다마를 넣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알맹이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새 다마를 추천하는 비뇨기과 의사(박희진)에게 인재가 한 말대로 "이제 그런 것들 청산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차례가 된 것이다.

























김수미, '어머니'에서 욕망하는 '여성'으로














여주인공 진경 못지 않게 백호파의 두목 홍덕자 여사(김수미 분)도 주목할 만 하다. 김수미의 변신은 <마파도> 이후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따라서 조금은 식상해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중견 배우들이 으레 따르는 전통적 어머니상으로부터 '일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핏 극중 그녀의 역할은 아들을 위해 조직을 포기하는 '희생적 어머니'의 역할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직 두목의 멍에를 벗는 순간 그녀는 전통적인 여성의 굴레마저도 벗어 버린다.

이 영화 최고의 반전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의 양가 부모의 상견레 장면이다. 진경의 아버지(백일섭 분)가 홍 여사에게 '자신의 첫사랑'이었음을 고백하고 홍 여사가 '몰라몰라'라며 앙탈을 부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단연 압권. "니들 아직 젊으니까 결혼은 나중에 해도 돼야!"라면서 상견레 자리를 백일섭과의 데이트 자리로 전환해버리는 그녀의 발랄함.

'어머니'에서 욕망의 주체인 '여성'으로 변신한 김수미는 올 한국 영화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서열보다 관계를 중시하고, 남성보다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경이 검사 자리까지 박차고 사랑을 택한 것은 자신의 지위나 서열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성의 특징은 완고한 남성 중심 문화에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 사회에 여성성이 필요한 것은 기존의 남성 중심 문화의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구조 안에서는 남성조차도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어쩌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집안'의 붕괴는 더 이상 사회 전반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조폭적' 남성 중심 문화의 붕괴일 뿐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이다.

헬렌 피셔는 미래를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녀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분명한 것은 진경처럼 '똑똑한'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증가하고 있고 그것이 완고한 남성 중심 문화를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문의 위기>라는 현실 위에서 우리들은 구시대의 '위기'에 서 있을까, 혹은 새 시대의 '가능성'에 투기하고 있을까.





2005-09-07 09:0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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