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 박영신

한낮 기온 0도, 해가 지면 영하 10도 이하로 뚝 떨어지는 강추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베를린은 흰 눈이 소복이 쌓여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리게 했지만 막상 땅에 발을 딛고 보면 '살을 에는 듯한'이라는 표현을 절감하게 된다.

열혈 팬들에게는 '베를리날레'라고 불리는 제55회 베를린영화제가 급작스레 불어닥친 한파와 함께 서서히 저물고 있다. 지난 10일(아래 현지시간), 우리에게는 영화 <인도차이나>(1993)로 기억되는 프랑스 감독 레지스 바르니에의 <맨 투 맨>으로 그 화려한 막을 올린 베를리날레는 총 52개국 343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1951년 6월, 동서로 나뉘어진 독일에서 처음 열린 베를리날레는 동서화합의 깃발 아래 통일 독일을 기원하는 영화제로 태어난 만큼 정치색 짙은 영화제로 유명하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영화들의 소재도 그렇지만 스크린을 떠나 장외에서 펼쳐진 크고 작은 사건들도 이 성격을 확실히 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10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개막 이튿날인 지난 11일 영화 <쇼생크 탈출>(1994)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영화배우 팀 로빈스가 베를리날레를 현 부시 행정부 성토장으로 만들면서 그 첫 발을 쏘아 올렸다.

팀 로빈스의 부시 공격부터 영사 기사들 시위까지

'평화를 위한 영화'라 이름 지워진 베를리날레 향연장에서 팀 로빈스는 각계각층 600여 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침공을 꼬집었다. "나의 예수는 기관총을 갖지 않았다"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말을 이은 팀 로빈스는 "전사의 영혼과 아티스트의 심장으로 미치광이의 주먹에 맞서야 할 것"이라며 장차 일어날 수도 있는 미국의 이란 침공을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한때 테니스 황제로 이름을 날렸던 보리스 베커는 "다음 미국 대선에서는 팀 로빈스 당신이 후보로 나가야 될 것"이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같은 행사에서 배우 더스틴 호프만은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나는 미국 밖에서 미국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미국은 분명 잘못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더스틴 호프만의 표현방식은 당시 전세계를 누비며 부시 정부를 향해 거침없는 속사포를 쏘아대던 다큐멘터리스트 마이클 무어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유도해냈다.

또다른 베를리날레의 정치 장외전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지난 15일, 현재 베를린영화제 초청 작품의 3/4이 상영되고 있는 멀티플렉스 '시네막스'의 영사 기사들이 파업을 위협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시위대가 뿌린 전단 내용을 보면 시네막스에서 일하는 영사 기사 1인당 월수입이 1098유로(한화 147만원 상당) 수준이라고 한다. 다행히 파업사태까지 치닫지는 않았으나 이번 사건은 현실정치 부분까지 건드리며 베를린을 진정한 정치무대로 확대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20일 폐막을 예고하고 있는 베를린영화제 포스터
ⓒ 박영신

르완다 학살, 베를린을 침공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제는 영화로 말한다. 레닌이 정치 집회의 막간을 이용해 단막영화를 상영하곤 했던 일화는 영화의 선동성과 대중적 파급효과를 잘 말해준다.

올해 베를리날레에서는 국제사회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1백만이 희생된 르완다 학살을 다룬 영화 두 편이 6일 간격으로 상영됐다.

 영화 <호텔 르완다>의 한 장면
ⓒ 베를린영화제
영국·남아프리카·이탈리아 합작, 테리 조지의 <호텔 르완다>는 후투 민병대의 무차별적인 학살의 광란을 피해 피난한 투치족 난민 1268명의 생명을 구한 한 호텔 매니저의 실화를 들려준다. 아이티공화국 출신 라울 펙 감독의 미국 영화 <4월 언젠가>는 아내와 자식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는 르완다 군인의 이야기다.

두 영화는 극단적인 폭력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후투 민병대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하비야리마나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촉발된 무수한 테러와 살육은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됐으며, 지난해 르완다 학살 10주년을 맞아서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속죄의 몸짓을 보였으나 이미 1백만의 생명이 피의 대가를 치른 뒤였다.

기자회견에 나타난 라울 펙은 <4월 언젠가>가 묘사한 르완다 학살은 순전히 사실에서 기인했다고 전하며 국제 언론의 역할을 언급, 국제사회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호텔 르완다> 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루세사바기나씨와 함께 자리한 테리 조지는 "지금도 다르푸르에서는 또 다른 르완다 사태가 진행 중"이라며 현재 수단 사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중동에서 드레스덴까지, 지옥의 역사를 흔들어 깨우다

"아시아보다 다르푸르로 가는 것이 그토록 힘든가?"

"르완다 사태를 외면한 서방국가들은 전적인 학살 공모자들이었다"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은 테리 조지는 "다르푸르에 갈 능력은 없으면서 쓰나미 피해자들을 위해 전세계가 발 벗고 나서고 있는 상황은 국제 사회의 수치"라고도 했다.

기자회견에서 르완다 학살 당시 프랑스의 역할 또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프랑스가 소수 투치족이 이끄는 현 르완다 정부로부터 무기판매설과 관련해 끊임없이 비난을 받고있는 가운데, 영화는 프랑스의 위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직격탄을 날린다. 구호를 요청하는 루세사바기나의 다급한 전화에 호텔 주인인 벨기에인이 대답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 사실을 알릴 곳은 아무데도 없어. 지금 후투 민병대에 무기를 팔고 있는 프랑스에 전화를 할 수는 없지 않나!"

 <소피 숄-희망과 저항>의 한 장면
ⓒ 베를린영화제
한편, 2차 세계대전 종전(드레스덴 폭격)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베를리날레를 통해 선보인 마르크 로테문트 감독의 <소피 숄-희망과 저항>도 역사의 비극을 유감없이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는 한때 히틀러유겐트(나치 독일의 청소년 조직) 단원으로서 나치에 열광했으나 진실을 깨닫고 '백장미단'에서 반나치 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처형당한 실존인물 소피 숄을 그리고 있다. 소피 숄과 함께 처형된 오빠 한스 숄, 그리고 그들의 친구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짧은 생애는 이들의 누이 잉게 숄의 수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야기다.

<소피 숄…>이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같은 시기를 다뤘으나 동시에 정반대의 시점을 그리며 베를리날레와 무관하게 올해 2월 초 개봉된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의 영화 <몰락-히틀러와 제 3제국의 종말> 영향도 컸을 것이다. <몰락…>은 최후의 날을 지나는 동안 고뇌하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면을 조명해 개봉과 동시에 뜨거운 찬반논쟁을 일으킨 화제작이다.

이밖에 지난 14일 상영된 이스라엘 출신 팔레스타인 감독 하니 아부 아사드의 <파라다이스 나우>는 자살 폭탄 테러를 앞둔 두 팔레스타인 청년의 일상을 그려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베를리날레에 난입한 섹스, 섹스, 섹스...

시적인 제목 <흔들리는 구름>과 함께 베를린을 찾은 차이밍량은 2001년작 <거기는 지금 몇 시니?> 이후 시네필들에 의해 오랫동안 기다려진 대만 감독이다. 물이 부족한 타이페이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사랑과 코미디, 섹스의 극단으로 몰고가는 이 영화에서 10분 이상 지속되는 포르노 영화 촬영 장면은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자리를 뜨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힘찬 박수로 환대하는 관객까지 양극으로 치닫는 반응을 유도한 <흔들리는…>은 증오와 환호의 한가운데에 던져졌다. 차이밍량은 지난 1997년 이미 영화 <하류>로 베를린 은곰상을 거머쥔 바 있다.

 다큐멘터리 <조지 마이클, 다른 이야기>
ⓒ 베를린영화제
이와 함께 영국의 팝스타 조지 마이클(41)의 등장도 베를리날레를 들뜨게 했다. 동성애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 등 화려한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조지 마이클, 다른 이야기>를 들고 베를린 비경쟁부문을 두드린 조지 마이클은 팬들의 환호 속에 지난 16일 처음으로 전세계를 향해 고백성사를 한 것이다.

자신의 노래 'I want your sex'에서처럼 도발을 즐겨온 조지 마이클이지만 실상 사생활 밝히기는 꺼려해온 까닭에 이례적인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죽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려주는 동시에 1999년 로스앤젤레스의 공중화장실에서 노출증 환자로 몰려 가수 인생을 마감할 뻔 했던 사건을 회고하거나 이라크 전쟁을 '완벽한 불법전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1987년 소울뮤직의 디바 아레사 프랭클린과 'I knew you were waiting'을 함께 불러 프랭클린과 녹음한 첫 백인 가수로 기록되기도 한 조지 마이클은 같은 해 음반 <페이스(Faith)>를 전세계 1500만장 판매하는 기염을 토한 주인공.

그밖에 1991년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함께 불렀던 엘튼 존이나 스팅, 마돈나도 다큐멘터리에서 만날 수 있다.

유럽에서의 10일, 금곰상 영예는 누구에게?

 과연 올해 금곰상의 주인공은?
ⓒ 박영신
경쟁부문에 한네 스퇴르 감독의 <유럽에서의 하루>가 포함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금년 베를리날레는 가히 유럽영화제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심사위원 7명 중 6명이 유럽인으로 구성된 것.

심사위원장을 맡은 독일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를 비롯해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니노 세루치 등 중국배우 바이링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이 다 유럽 출신이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작품들도 유럽영화가 강세.

특히 경쟁부문에 5편의 영화가 초청된 프랑스는 그야말로 베를린영화제의 귀염둥이다. 경쟁·비경쟁 부문을 통틀어 프랑스영화사 혹은 프랑스 합작 영화사에서 제작된 영화 총 19편이 베를린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경쟁부문만 말하면 미국영화가 4편, 독일영화가 3편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인 감독 레지스 바르니에의 <맨 투 맨>이 개막작으로 선정돼 지난 10일 베를리날레의 성대한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도 프랑스 영화의 위상을 가늠케 하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이같은 현상과 관련해 드바브르 프랑스 문화통신장관은 AFP통신 인터뷰에서 '독일이 이토록 우리를 환대하는 데에 대한 답례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올해 칸 영화제 분위기를 기대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를리날레 디터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프랑스 영화는 국적이 아니라 작품성 때문에 선정됐다"며 물론 "작품 선정에는 늘 정치적 색깔이 관여되지만 경쟁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영화"라고 일축했다.

한편 19일 수상작 발표를 앞두고 이번 베를리날레에 출품된 22편의 경쟁 작품 중 몇몇 작품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을 듣고 있는 가운데,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도청 스캔들을 폭로한 <샹드막스의 산책자>와 <4월 언젠가> <소피 숄…> <파라다이스 나우> 등 4편이 영예의 금곰상을 놓고 접전 중이다.

이 영화들은 정치적 목소리를 포함해 역사의 뿌리를 찾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금곰상이 종종 정치적 색채가 강한 영화에 수여돼온 사실과 견주어 볼 때 유력한 수상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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