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일본의 작은 산골 마을 하라사와, 개울물을 직접 떠다 마실 정도로 개발이 되어 있지 않고 또 깨끗하다. 개척이주 3세 타쿠미는 학교에서 어린 딸을 픽업해야 한다는 걸 까먹을 정도로 건망증이 심하다. 그렇지만 그의 딸 하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숲 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옆마을 구리하라에선 사냥꾼이 사슴 사냥을 하는 듯 가끔 총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날 사업설명회가 열린다. 플레이모드라는 도쿄 소재 연예기획사가 마을에 글램핑장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글램핑장에 외지인이 많이 찾아올 테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도움을 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코로나 정부지원금을 타먹으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만들려는 시늉만 해도 정부에서 많은 돈을 준다는 것이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짓을 하려 하니 마을 사람들이 탐탁지 않게 보는 게 당연하다. 마을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사업설명회를 개최한 플레이모드의 두 직원은 사장과 외부 컨설팅 회사 관계자를 데려다 제대로 된 사업설명회를 열기로 한다. 그러며 마을의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심부름꾼 타쿠미에게 도움을 청하려 한다.

두 직원은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들어 사업 전반을 수정하거나 사업 자체를 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사장과 외부 컨설팅 회사 관계자가 반대한다. 외부 컨설팅 회사는 마을 사람들 의견을 모두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타쿠미를 매수해 글램핑장 관리인으로 앉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한다. 플레이모드의 바람은 이뤄질까? 타쿠미의 대응은?

인간은 객체, 자연이 관조하는 듯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일본 굴지의 도쿄대를 졸업하고 도쿄예술대에서 석사를 마친 수재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스승의 저서로 영화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고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직접 사사를 받았다고 한다. 석사 졸업 후 2010년대 들어 엄청난 행보를 보인다. 칸과 아카데미까지 접수하며 2021년을 자신의 해로 만든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유명하다.

그 밖에도 <아사코>가 칸에 초청되었고 <우연과 상상>이 베를린에서 수상했으며 각본에 참여한 <스파이의 아내>가 베니스에서 감독상(구로사와 기요시)을 수상했다.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베니스에서 수상하며 3대 영화제와 아카데미까지 접수했다. 40대 중반의 많지 않은 나이에 사실상 모든 걸 이룬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의 자리에 올랐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최신작으로 일본보다 한 달여나 빨리 한국에서 개봉했다. 굉장히 이례적인데 해외 개봉에 관대한 편인 듯하다. 작품은 상당히 관조적이다. 숲으로 이뤄진 산골 마을의 자연환경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 안에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자연 속 객체에 불과한 것 같다.

영화 곳곳에서 오랫동안 나오는 롱테이크들이 빛을 발한다. 숲 속에서 보는 하늘, 숲을 걷는 사람들, 개활지의 사람들 등 흘러가든 가만히 있든 인간이 아닌 자연이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지도 않다. 지켜보는 시선조차 인간이 아닌 자연인 듯하니까 말이다. 롱테이크를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자연에선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극 중에서 타쿠미는 마을 이장님을 제외한 모두에게, 그러니까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한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데, 그의 캐릭터성을 보여준다기보다 그에게 내포된 상징성을 보여준다. 마을의 심부름꾼이지만 실상 자연의 심부름꾼인 것이다. 그러니 평등하게(?) 모두를 반말로 대하는 게 아닐까.

그런가 하면 평소 별말이 없는 타쿠미의 말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가 영화의 핵심이다. 그가 지향하고 마을이 지향하고 자연이 지향하는 단 한 단어가 '균형'일진대, 플레이모드라는 연예기획사가 정부지원금을 타먹고자 글램핑장을 만들겠다고 찾아온 것 자체가 균형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위가 아닐까.

잔잔하기 이를 데 없이 흘러가던 영화는 극후반 몇 분에 눈이 화들짝 커지고 오감이 열릴 만한 충격적 결말을 담고 있다. '도대체 왜?' 하며 그 자체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겠으나 영화를 돌이켜 하나하나 뜯어보면 받아들일 만하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균형'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대자연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제 의식 면에서 그리고 주제 의식과 맞물린 영화적인 측면에서도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작품으로 말이암아 자신을 한 단계, 아니 몇 단계는 훌쩍 넘어선 걸로 보인다. 이런 메시지를 이런 스타일로 선보인다는 것 자체가 대담하다. 40대 젊은 패기를 앞세우되 거장으로서의 품격이 단단한 주춧돌로 영화를 떠받들었다. 그의 작품은 무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과 contents.premium.naver.com/singenv/themovie에도 실립니다.
악은존재하지않는다 하마구치류스케 자연 인간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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