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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 논란이 뜨겁다. 어느 유명 한국사 강사는 <건국전쟁>을 보지도 않고 이승만을 덮어 놓고 비판한다고 핏대를 세우기도 한다. 바닷물이 짠지 안 짠지는 먹어 보지 않아도 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비판받아야 할 첫 번째 문제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해산해 친일파가 활개 치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1948년 5.10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그해 9월 7일 찬성 103, 반대 6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헌국회가 세 번째로 제정한 법이기도 했다. 당시 시대가 부여한 중차대한 과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친일파를 등에 업고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반대했지만,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법안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에 의해 잘못 뀌어진 친일청산의 역사
 
1949년 열린 반민특위 공판 모습.
 1949년 열린 반민특위 공판 모습.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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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임시정부 문화부장 출신의 제헌의회 의원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았다. 반민특위 산하에는 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해 반민특위는 일본과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경찰과 군부대, 헌병대 등에서 첩자 등으로 활동한 자, 위안부와 학도병의 강제징용을 권유하거나 찬양한 자 등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7000여 명의 친일부역자를 파악, 일람표를 작성하고 검거에 들어갔다.

19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체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관동군의 끄나풀이었던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이었던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비롯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을 체포했다.

악질 일본 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 투사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내무부차관 장경근을 통해 '국회 프락치 사건'을 발표해 반민특위를 공격했다. 그런 다음 1949년 6월 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 아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갔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은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와 시경국장 김태선의 지휘 아래 전격적으로 이뤄진 폭거였다.

반민특위는 짧은 활동 기간 688명을 조사해 408명에게 영장을 발부했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으며 221건을 기소했다. 이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였고, 7명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애초 지목한 7000여 명의 친일부역자 중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원을 조사하는 데 그친 것이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원상 복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6월 9일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는 답변뿐이었다. 이로써 친일반역자를 단죄하기 위한 역사의 첫 단추는 잘못 뀌어지고 말았다.

제자리를 잃은 반민특위터 표석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가면 한국전력 서울본부, 명동N빌딩, 스탠포드호텔 명동 건물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 84(남대문로2가 9-1번지)에 있는 스탠포드호텔 명동이 바로 반민특위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반민특위는 처음 중앙청 청사(옛 조선총독부 건물) 205호에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 후인 1949년 1월 27일(추정, 자유신문 1949. 1. 28. 4면) 남대문로 84에 위치한 상공부 특허국 건물로 본부 사무실을 이전, 1949년 8월 31일 해산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반민특위 청사 이전을 보도한 자유신문(1949. 1. 28) 기사. ‘反民特委 청사 이전, 특별경찰대도 조직’(파란색 박스 부분)
 반민특위 청사 이전을 보도한 자유신문(1949. 1. 28) 기사. ‘反民特委 청사 이전, 특별경찰대도 조직’(파란색 박스 부분)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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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가 청사로 사용한 건물은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사옥 모습.
 반민특위가 청사로 사용한 건물은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사옥 모습.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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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반민특위 사무실은 1층과 2층 각각 100평 정도의 공간이었고, 1층에 칸막이를 만들어 제1·2·3조사부와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다. 김상덕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했다.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다. 반민 피의자의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해 총경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47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원들은 1층 구석 칸막이방을 사용했다"고 한다(정운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 증언 반민특위>).

반민특위터가 있었던 남대문로는 조선 시대 숭례문에서 광통교로 이어지는 한양의 중심가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등 금융기관이 자리 잡은 '경성의 월스트리트'로 반민특위 건물은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사옥(1921년 1월 24일 신축)이었다. 1962년 1월 서민금융 전담은행으로 국민은행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반민특위 건물에는 국민은행 본점이 입주했고, 얼마 뒤 국민은행은 건물을 신축하여 새롭게 개관(1972. 10)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국민은행 본점 입구 1층에 반민특위터 표석을 세운 때는 1999년이다. 화강암으로 제작된 표석에는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민족 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자처벌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
 
민족문제연구소는 1999년 반민특위터 표석을 국민은행 본점 1층에 설치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9년 반민특위터 표석을 국민은행 본점 1층에 설치하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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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이 세워지면서 알음알음 이곳이 반민특위터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2004년 1월 19일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 원 달성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국민은행 본점 앞에서 열리기도 했다. 당시 기념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독립군가인 <압록강행진곡>을 부르면서 반민특위가 못다 이룬 친일파 청산을 다짐했다.

그 뒤 반민특위터 표석의 수난이 시작됐다. 어느 때인가 국민은행 본점 입구 1층 화단에 설치된 표석은 건물 뒤편 주차장 출입구로 옮겨졌다. 다시 시간이 흐른 2017년 국민은행 본점이 마스턴투자운용과 미국계 대체투자 운용사인 안젤로고든에 2400억 원에 팔리면서 표석은 철거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국민은행 본점을 산 펀드사가 지하 3층, 지상 18층의 호텔 신축공사를 시작하면서 반민특위터 표석은 민족문제연구소 수장고로 옮겨지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2018년 8월 수장고의 표석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반민특위가 있었던 장소가 아닌 용산구 청파동에 설치됐다는 사실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부설 기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부득이하게 반민특위터 표석을 출입구 앞에 설치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적어 놓았다.
 
"이 표석은 옛 반민특위 터인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4, 당시 국민은행 본점 자리에 세워졌으나, 건물 신축공사로 방치되어 2018년 10월 이곳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50년 되는 1999년,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시민 성금을 모아 이 표석을 설치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설치한 반민특위 표석은 본래의 위치에서 쫓겨나 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 앞에 자리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설치한 반민특위 표석은 본래의 위치에서 쫓겨나 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 앞에 자리하고 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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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 앞에 놓인 반민특위터 표석 설명문
 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 앞에 놓인 반민특위터 표석 설명문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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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7일, 다시 설치된 반민특위터 표석

내가 반민특위터 표석의 애달픈 사연을 접한 건 2022년 4월이다. 종각에서 원효로로 이어지는 용산선 전차 답사를 진행하면서 반민특위터 표석이 본래 아닌 장소가 아닌 곳에 자리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됐다. 고심 끝에 서울시 문화본부 담당자에게 문의해 <표석 신설 신청서>를 작성해 관할 관청인 중구청에 접수(2022. 6. 8)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 석 달가량 흐른 2022년 10월, 서울시 역사문화재위원회가 열려 반민특위터 표석 설치가 합당하다고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설치한 표석을 옮겨 설치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서울시에서는 스탠포드호텔 측에 표석 설치 협조를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2023년 4월 서울시는 반민특위가 있었던 인근 인도에 표석을 세우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이 같은 사실을 알려줬다.

이즈음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 인도에 설치된 '광복단결사대 활동지 및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이 누군가에 의해 철거되는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반민특위터 표석 설치는 잠정 연기돼야 했다.

표석 설치 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친다는 서울시의 다소 애매한 답변과 함께 한동안 반민특위터 표석 설치는 보류됐다. 몇 달 후인 2023년 11월 서울시 담당자에게 표석 설치 현황을 문의했다. 담당자는 한 달 정도 공고를 거친 다음 표석을 설치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올해 2월 20일 서울시 담당자에게 전화해 보니, 2월 17일 반민특위터 표석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설치 사실을 확인한 후 근처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전송받았다. 지인이 보내준 반민특위터 표석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1948년 제헌헌법 부칙과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출범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통칭 반민특위)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친일부역자들을 조사, 처벌하여 국민적 지지를 받았으나 반대 세력의 방해와 반발로 5개월간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2024년 2월 서울특별시"
 
작은 입간판 모양의 반민특위터 표석을 세우는데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서울시가 반민특위터 표석을 세운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용산구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 앞에 본래의 표석이 놓여 있는 현실과 친일파가 득세하는 현재 상황이 겹쳐 보여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서울시는 2024년 2월 17일 스탠포트호텔 명동 앞 인도에 반민특위터 표석을 세웠다.
 서울시는 2024년 2월 17일 스탠포트호텔 명동 앞 인도에 반민특위터 표석을 세웠다.
ⓒ 하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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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민특위터표석, #반민특위, #반민족행위처벌법, #이승만, #건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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