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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음정, 박자를 잘 지켜 노래를 불러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사람들은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금융회사도 형식적 판매절차를 지켜 수익을 올리더라도 만족스러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 소비자로부터 인정받기 어렵다. 어느 금융회사도 소비자보호를 가볍게 여긴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수익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소비자보호를 부수적으로 생각한다면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한다.

금융상품은 무형의 약속만을 대가로 제공하고 개념은 추상적이어서 소비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소비자는 회사가 우월한 협상력을 이용해 사실과 다르게 설명하거나 중요 내용을 알리지 않아 속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여러 규제장치를 두어 계약의 신뢰성을 보완하고 있다.

2020년 금융위가 실시한 '금융소비자 보호에 대한 인식조사'에서도 국민은 금융회사에 대해 "사고가 생기면 책임을 회피한다", "어려운 상품내용, 과도한 영업관행"에 불만을 표시하는 등 낮은 신뢰도를 보여주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저서 <트러스트 Trust>에서 사회가 지닌 신뢰 수준에 따라 국가나 산업의 경쟁력이 결정된다며, 신뢰를 사회적 자본의 핵심요소라고 강조했다. 금융업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진정한 소비자 보호를 하기 위해서는 금융회사, 당국, 소비자 세 가지 축 모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상품 제조단계부터 철저히 통제

먼저 소비자와 접점에 있는 금융회사의 노력을 살펴보자.
 
첫째, 금융회사는 경영 비전에 소비자 보호에 대한 명확한 신념을 새겨 넣어야 한다. 소비자의 권리 보호를 이해하는 정직하고 유능한 리더를 선정하는 것이 출발이 될 것이다.

소비자를 위한 경영이념이 경영진부터 직원까지 체화되어 조직문화로 스며들어야 한다. 경영의 목표는 회사의 이익과 소비자의 혜택이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융회사의 가장 기본 의무인 '신의 성실'을 해치는 것이다.

둘째, 소비자 보호의 경영목표가 금융상품 제조, 판매 프로세스에 구체적 행동양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금융상품은 기간이 길고 대량으로 판매되어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수습이 매우 어려운 특성이 있다. 따라서 '상품 제조단계'부터 소비자보호에 대한 철저한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 상품 선정단계에서 위험관리에 소홀해 커다란 수습비용을 치른 사례는 너무나 많다.

또한 금융이 파생상품을 이용하여 실물과 별개로 이익을 창출하고, 금융상품 제조와 판매가 분리되는 현상이 늘어나는 환경에서, 부실사모펀드·ELS 사태, 보험 독립대리점(GA)의 밀어내기 영업 등의 불완전판매가 지속되고 있다. 소비자의 희생 위에 미래의 회사 수익과 평판을 해치며 현재의 이익만 채우는 단기 성과주의는 소비자보호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단기수익 위주 판매전략, 성과보상(KPI)체계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
 
15일 홍콩지수 ELS 피해자 모임 등은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홍콩 ELS 대규모 손실 사태 관련 금융당국에 대한 감사원 공익감사 청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15일 홍콩지수 ELS 피해자 모임 등은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홍콩 ELS 대규모 손실 사태 관련 금융당국에 대한 감사원 공익감사 청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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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회사는 실효성 있는 내부통제, 민원 사후관리, 외부 규제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상시적으로 소비자보호에 나서야 한다. 내부통제가 철저한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의 소비자보호 평가나 금융사고 발생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경영진은 내부통제를 중요한 '운영리스크 관리'로 인식해 적극 대응해야 한다.

또한 회사는 소비자 민원을 단순한 이해 다툼으로 볼 게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경고 신호로 보아 '문제의 예방'→'문제점 해결'→'시스템 개선'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

시장의 선의에 기댄 정책은 위험

다음은 금융당국의 대응을 생각해보자.

첫째, 당국은 금융정책, 감독을 계획할 때 소비자보호의 가치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종전에는 산업분야와 유사하게 금융업의 규모를 키우는 것을 정책 목표로 해 금융업의 내부통제 수준을 넘어서는 규제완화가 이루어지곤 했다.

금융사고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하는 안이한 마음, '시장의 선의'에 기댄 정책을 시행한 후 터진다. 금융 역사에서 이례적인 사건은 항상 있었고, 시장 참가자의 이익 추구는 규제의 약한 부분을 노릴 뿐이다. 정책을 세울 때에는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수준을 고려하고, 시행 후에는 모니터링, 규제의 재조정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2020년 만들어진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을 환경변화에 맞게 보완해 실질적인 소비자보호를 위한 법으로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금소법은 불건전 영업행위에 대한 절차 책임이 대폭 강화되었다. 그러나 일선 창구에서는 고객이 '알지 못하고 하는' 형식적 동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분쟁시 금융회사의 면책근거로 활용될 뿐이다. 또한 금소법은 판매행위 규제에만 중점을 두고 있어, 상품설계 단계부터의 능동적 대응이 부족한 면이 있다.

아울러 날로 커지고 있는 온라인 환경에서의 소비자보호, 빅테크·GA 등에 대한 책임성 제고 및 취약계층에 대한 포용금융 강화에 대해서도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공정하고 엄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해 소비자보호 기반을 튼튼히 해야 한다. 고객은 금융회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복잡한 상품에 가입하는데, 한쪽만 거래에 대해 확실성을 갖거나 설명 내용과 실제가 달라서는 공정하지 않다.

2022년 중 금감원에는 8만 7113건의 민원이 접수되었는데, 그 중 부당권유, 상품설명 불충분 등 불건전 영업행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모든 업권에서 영업 관련 민원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 영국에서는 금융회사의 불완전판매에 대해 천문학적 수준의 벌금을 부과한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BOA, JP모건 등에 수십조 원의 벌금을 부과한 바 있다.

금융회사가 '실질적' 내부통제에 실패해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에는 과징금, 인적제재 등 책임을 엄격히 물어야 한다. 엄정한 사후제재는 미래의 사고예방을 위한 중요한 처방이 될 것이다.

"금융문맹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금융소비자 스스로의 권리보호에 대해 살펴보자.

금융소비자는 거래의 당사자로서 권리와 책임을 인식하고, 거래내용에 대해 관심을 갖는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생활용품을 구입해도 용도, 가격을 자세히 따지는데, 정작 소중한 자산을 맡기는 금융거래에는 금융회사 직원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

골드만 삭스에 입사해 자부심을 갖고 일하던 그레그 스미스(Greg Smith)가 은행이 이익 추구에만 골몰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 실망해 쓴 책 <내가 골드만 삭스를 떠난 이유 Why I left Goldman Sachs>에서는 월스트리트가 고객의 공포와 탐욕을 요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는 은행이 고객을 1) 기관투자가 같은 현명한 고객, 2) 게임을 하는 영악한 고객, 3) 느리고 단순한 고객, 4) 사람을 잘 믿고 질문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고객으로 분류하는데, 4번째 부류의 고객은 회사의 이익착취 대상이 될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현명한 소비자는 합리적인 금융거래 습관을 갖고, 평소 금융상품 활용 능력을 기르는 고객일 것이다. 금융습관은 어릴 때부터 가정, 학교 등에서 갖추는 것이 효과적이다. 특히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 신용관리 등 금융지식을 배우는 것이 절실하다. 청년들이 금융지식이 부족해 위험자산에 올인하거나, 불법사금융 피해를 입는 일은 너무나 안타깝다.

생활금융교육의 필요성은 모두가 인정하나 교육부는 과목 간 형평성을 이유로 선택과목에 일부 배정할 뿐이다. "문맹은 생활을 불편하게 하지만, 금융문맹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격언은 그냥 수사가 아니다. 미래세대의 건전한 경제생활을 위해 교육과정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

현명한 소비자가 된다는 것은 정보화, 고령화 시대에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이다. 소비자는 금융역량 함양을 위해 파인(fine.fss.or.kr) 등 금융 정보포탈 활용 등의 노력을 하고, 금융거래 시에는 모르는 것을 끝까지 물어 알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상에서 소비자보호를 위한 금융회사, 당국, 소비자의 노력을 살펴보았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눈앞의 성과에 몰두하는 '근시안적 태도'이다. 금융회사는 미래의 지속 가능한 성과를 희생하였고, 당국은 규제정책에 치밀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부분적 대증처방만 하는 것은 "비린내 나는 고기를 옆에 두고 눈 앞의 파리떼만 쫓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하늘을 나는 새도 두 날개가 균형되어야 하듯 금융회사, 소비자의 권익도 형평을 이뤄야 금융업이 건전하게 발전할 것이다. 우리는 소비자 보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하라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의 마음으로 우리가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태그:#금융소비자보호, #금융의신뢰, #현명한금융소비자, #금융교육강화, #금융소비자보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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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에서 30 여년을 근무하고 부원장보를 마지막으로 퇴직했습니다. 건전하고 공정한 금융질서 확립과 금융소비자보호라는 조직의 존재이유와 내 본성, 가치추구와의 어울림이 커 업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올바른 금융시장을 위한 고민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글이 금융업의 공정성제고를 위한 생산적 논의의 장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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