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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기자말]
교육과정을 위한 협의회 중 한 교사가 입을 열었다. 한국사-뮤지컬 중심의 융합 수업에 대해, 너무 아픈 역사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상당히 힘겹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자랑스럽고 재미난 역사도 많은데 항상 무겁고 참혹한 이야기에만 집중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순간 지난 2년이 떠올랐다. 그리고 공감했다. 나는 뮤지컬 수업 담당자로서 2022년에는 제주 4.3항쟁을, 2023년에는 사북항쟁을 다루면서 20여 곡을 썼다. 어느 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만 명의 끔찍한 희생을 음악으로 만드는 시간 동안 마음이 지친 탓이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밝음이 느껴졌다. 오히려 그와의 대화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아픈 역사에 관한 공부를, 긴 시간을 통해 뮤지컬이라는 예술 장르로 마무리하는 과정이 가진 교육적 효용성에 관한 이야기다.
  
담당교사가 공연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하고 있다.
▲ 공연 직전 담당교사가 공연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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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이 되어서야 2023학년도 초반에 기획했던 융합 수업 중 통합기행과 뮤지컬이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7박 8일로 다녀왔던 통합기행은 3월부터 10월까지의 사전 수업 후 10월 중순 막 시작된 가을빛 강원도 산속에서의 이동학습을 정점으로 하여 100쪽짜리 단행본을 인쇄하는 것으로 수업을 마무리했다. 방학 중에도 나와서 수고한 아이들이 있었다.

뮤지컬은 9곡의 창작곡과 30분 정도의 연극 대본을 엮어 1시간이 넘는 한 편의 공연을 완성했고 12월 29일 저녁 성황리에 마쳤던 공연 실황을 녹화한 후, 장면을 편집하고 자막까지 세세하게 넣어 외부에 배포하기 위한 영상을 만드는 것으로 마지막 작업을 마쳤다.

사북항쟁에 관련된 내용이니만큼, 당시 사건의 재평가와 재심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계신 분들에게 전달되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이 교과서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사북항쟁의 내용을 알고 당시 민주화 운동, 노동인권운동의 흐름 안에서 본 사건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 창작뮤지컬 <내 사랑 사북> 전체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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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손에서 탄생한 창작뮤지컬

2022년 공연한 <4.3의 언덕 너머에는>을 만들고 익히던 당시에도 글로 이루 다 쓸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맨땅에 헤딩한다'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을 닦달하고 곡을 쓰고, 공연 직전까지 반주 영상을 수정하며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다.

이번 뮤지컬도 그런 모습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학생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창작뮤지컬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발전이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다. 전년도 아이들보다 눈에 띄게 창작 욕구가 높은 학년인 것도 큰 원인이었고, 4.3항쟁을 다루었을 때보다 조금은 덜 무거운 마음으로 역사적 사실을 대할 수 있기도 했다.

사건의 당사자 처지에서 보면 모든 일이 동일한 수준에서 끔찍하고 무거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배우고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두 사건이 조금 달랐다. 무게감의 차이였다. 1948년 전후 제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너무도 규모가 크고 처참한 일이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압박감이 있었다.

읽기 자료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고 당시 제주의 상황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 이미 아이들의 감수성은 그 한계를 보이는 듯했다. 대본을 만들어본다든지 가사를 써본다든지 하는 활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창작은 고스란히 교사인 나의 몫이 되었다. 심지어 실수로 인한 폭소를 예방하기 위해 거의 모든 내용은 미리 녹음된 노래로 연결되었다.

그때와 비교해보면 사북항쟁을 공부할 때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사건을 만날 수 있었다. 이옥수 작가의 <내 사랑 사북>이라는, 우리 뮤지컬의 원작이 되어준 소설 덕분이기도 했다.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중학생을 화자로 둔 명랑 청소년 소설이었다. 오히려 그 영향으로 우리는 사북항쟁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었다.
  
무대의 배경이 될 그림을 학생이 직접 그렸다.
▲ 이강현 학생의 그림 무대의 배경이 될 그림을 학생이 직접 그렸다.
ⓒ 이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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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뮤지컬의 창작자는 나를 포함한 우리 학생들이 되었다. 나는 악곡의 멜로디와 반주를 만드는 데에 전념했고, 모든 대사는 아이들이 썼다. 30여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큰 악곡의 안무는 뮤지컬 강사 선생님이 만드셨지만 그 외의 학급별 안무는 아이들이 만들었다.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이들이 만들어준 가사였다. 가사와 음악을 동시에 생각하다 보면 타성에 젖게 되는데,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준 가사로 악상을 떠올리니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사를 써준 학생에게 두 시간 만에 전화를 걸어 아이처럼 외쳤던 일이 아직도 선하다.

"인아야! 와서 들어볼래? 완성했음!"
"우왁! 진짜요? 대박. 대박.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달려갑니다!"


작사는 두 학생이 해 주었다. 아이들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시어를 전달해주었다. 그 가사들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꽉 막혔던 머릿속에 작은 바늘구멍을 내주었다. 
 
바람(작사 이유리)

오늘도 하루를 바치며 걸어가
언제쯤 이곳이 바뀔 수 있을까
캄캄한 바람 속 우리 앞에 존재하는
외로운 낙엽은 아무렇지 않게 죽어갈까

누구 하나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이 곳에서
시간과 감정은 사치일 뿐
밝은 햇살을 보며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는 소망일 뿐

비참한 이 삶을 물려줄 순 없어
하지만 이곳이 나아질 수 있을까
공허한 바람 속 우리 앞에 존재하는
푸르른 초원은 가까이 있는데, 어딘가에

누구 하나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이곳에서
시간과 감정은 사치일 뿐
이치에 맞는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고 싶은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는 소망일 뿐

우리의 바람은 하나 모두에게 전해지는 해방!
우리의 바람은 하나 모두에게 전해지는 해방!
 
위 악곡은 노동자들이 하루를 마치고 마을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며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가족 등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와 소리를 높인다. 2절은 여자들만 부르는, 자식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작한다. 마지막은 오케스트라 반주가 매우 강하게 함께하며 커다란 합창으로 끝난다.

아래 악곡은 광업소 앞에서의 집회가 무산된 후 경찰이 시민을 차로 치고 지나간 장면이 끝나고 나오는 노래다. 그동안 받았던 설움과 울분을 담아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한다. 위, 아래 둘 다 학생의 작품이다.
 
투쟁(작사 김인아)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지 부당하단 생각조차 못 했지
그들과 우리는 존재부터가 다른 관계
우리는 탄가루를 쥐고 났고 그들은 권력을 쥐고 났네
가진 것이 없는 건 나요 배운 것이 없는 것도 나요

그러니 그냥 순순히 당할 수밖에
바보처럼 복종할 수밖에

그러나 그들은 선을 넘었고 우리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었네
우리도 이젠 사람답게 살고 싶어
우리의 저항은 정당하네 우리의 거친 몸부림은 하나뿐인 수단!
이 비극 멈추기 위해 단합해야만 해

저 하늘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온 세상 무너져라 발을 구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의 억울함 닿게 하리라
그러니 막지 마, 화약고를 털어서라도 저항할 테니!
 
하지만 이렇게 어둡고 무거운 곡만 있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희극이다. 주제에 따라서 결말이 어두운 경우도 있지만 중간에 반드시 관객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장면이 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뮤지컬과 비극 오페라의 차이점이다. 나는 여기에서 뮤지컬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발견한다.

내면화 한 아픈 역사를 예술과 해학으로 외면화 하다

4.3항쟁을 다룬 뮤지컬의 후반부는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벌어지는 내용이었다. 역사 수업 시간에 초임 교사와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매우 발랄한 곡으로 연결되고,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이 책상 위로 올라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모두 폭소를 터트린다.
  
발랄한 멜로디와 안무를 가진 악곡이다. 가운데 고동색 상의를 입은 학생이 곧이어 대사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 <4.3의 언덕 너머에는> 중 10번 악곡 발랄한 멜로디와 안무를 가진 악곡이다. 가운데 고동색 상의를 입은 학생이 곧이어 대사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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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을 그린 뮤지컬에서는 첫 장면에 중학생인 수하와 광호 이야기가 익살스럽게 펼쳐진다. 청년 광부인 '정욱'과의 삼각관계 또한 흥미진진하며 천연덕스러운 아이들의 연기에 관객들은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방을 치우면서 구시렁대는 엄마의 모습 또한 웃음 포인트였다.

뮤지컬 공연을 집중해서 준비하는 한 달 정도의 시간 동안 아이들도 나도, 그동안 견뎌야 했던 무거운 마음은 온데간데 없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가해 주체에 대한 적대감이나 피해자를 생각하며 터트린 울분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큰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을 뿐이다.

애초에 학생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끈기와 인내를 익히는 것이었고, 커다란 과제를 완성해보는 경험을 얻는 것이었다. 한국사, 통합기행, 뮤지컬을 중심으로 한 1년짜리 주제통합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내가 의도한 것을 확실히 배운 듯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완성이 될지 불안했던 순간도 모두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1980년 당시 중학교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나누는 대화
▲ 관객들이 많이 웃었던 장면 1980년 당시 중학교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나누는 대화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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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가장 큰 배움이 되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픈 역사에 대한 배움을 예술과 해학으로 외면화하여, 발산하고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며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던 시간 동안, 공연 당시 관객과 함께 폭소를 터트린 시간 동안 말이다.

우리는 아픔 속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에서 튀어나와 시를 쓰고 춤을 만들었다. 가사와 멜로디에 관현악을 옷 입혔고 그들의 이야기를 나의 목소리로 대변했다. 끔찍하고 처참한 채로 두지 않고 말랑하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머릿속에서 몸 밖으로 분출시켰다. 나는 이것을 '극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극복하는 방법을 체득시켰다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거운 순간들이 있다. 수업을 진행한 교사뿐 아니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픈 인간사를 수업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새로운 세대가 미래의 주역이 될 때, 역사를 기억하되 상처투성이로서가 아니라 극복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교육언론 창>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태그:#대안교육, #미래교육, #사북항쟁, #창작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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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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