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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22일 창간한 <오마이뉴스>가 올해로 창간 24주년을 맞았습니다. '청년'이 된 오마이뉴스가 같은 해에 태어난 대한민국 2000년생들이 어떤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2024년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편집자말]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누구나 유년기 시절부터 무수히 들었을, 짧지만 그 의도가 명확한 질문.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답하기 어려워진다. 아마도 단순한 '직업'이나 '직장'에 대한 질문이 아닌 '진로(앞으로 나가갈 길 혹은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한 물음이란 사실을 한 살, 두 살 먹으며 알아가게 되기 때문 아닐까. 

20대, 삶의 다양한 도전과 선택을 마주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도전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선택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4년여 전, 2000년생으로 막 스무살이 된 내 선택도 그랬다. 

내 선택이 나전칠기였던 이유
 
나전칠기 공방을 열기 전후로 운영을 위해 이런저런 배움을 이어갔는데 거기서 배운 게 펀딩시장이었다.
 나전칠기 공방을 열기 전후로 운영을 위해 이런저런 배움을 이어갔는데 거기서 배운 게 펀딩시장이었다.
ⓒ 박진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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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무살의 난 덴마크 시민학교로 유학을 준비했다. 내가 선택한 학교는 한국과는 달리 하반기에 학기가 시작하는데, 그로 인해 약 6개월 동안 여유로운 시간이 있었다. 이 6개월을 허비하기 싫어서 그동안 무엇을 해볼지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나전칠기였다. 전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 외국인들과 소통할 때 유리하리라 생각했고, 당시 현지 플리마켓에 대한 흥미도 갖고 있었다. 또한, 플리마켓 참여 시에 돋보일 아이템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6개월 과정을 들었는데, 마칠 즈음에 나전칠기가 예상보다 훨씬 흥미롭게 느껴졌다. 당시 유학 준비도 생각보다 미흡한 상태여서 추가로 6개월을 더 배워 과정을 완성했다.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계획하던 유학이 어려워졌다. 사실 2020년이 찾아왔을 때,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옻칠나전뿐이었다. 함께 일을 배웠던 동료들은 이미 본격적으로 관련 프로젝트를 하며 움직이고 있었고, 나 또한 소심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일을 시작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외국 유학 후 계획은 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상품들을 발굴하여 국내 유통하는 것이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업을 시도하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제품을 찾아내며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방을 열고 처음 한 일은 프로젝트 단위로 상품 기획하는 것이었다. 공방을 열기 전후로 운영을 위해 이런저런 배움을 이어갔는데 거기서 배운 게 펀딩시장이었다. 나는 평소 필요한 물건을 판매자로부터 바로 구매하는 편이었다. 그게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펀딩시장'에는 돈을 넣어놓고 몇 달씩 기다려가며 상품을 받아가는 소비자들이 있었다. 나는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팔고 싶은 물건과 팔 수 있는 물건의 경계

물건을 내놓고 반응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반응을 먼저 살피고 물건을 파는 구조였고 판매자에게 많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특히 '팔고 싶은 물건'과 '팔 수 있는 물건'의 경계를 찾아 헤매던 나에게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가 되어줬다.

일단 가장 팔고 싶은 빨대를 먼저 올려봤다. 나전칠기 빨대를 팔아보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일회용 빨대가 편하다", "재사용 빨대를 쓴다고 한들 싼 재사용 빨대 널렸는데 비싼 빨대를 사진 않을 것이다" 등등. 사실 나 또한 펀딩사이트를 둘러보기 전까지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는데 펀딩사이트를 둘러보고 나니 내 물건도 그곳에선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펀딩사이트에는 더 비싸고 더 기다리더라도 지향하는 가치가 맞으면 기다려주는 소비자가 많았다. 몇 달이 지나 내 첫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왔고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게 나왔다. 그렇게 수차례 펀딩을 하고 펀딩을 마치면 내 사이트에 물건을 올리는 식의 일을 이어왔다. 

공방을 열고 알고자 했던 '팔리는 물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궁이다. 그러나 물건을 파는 전체 과정에 대해서 많이 배운 것 같았다.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도 겪어봤는데 결과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배운 것이 많았다. 내가 가치지향적으로 물건을 팔다 보니 소비자로부터 많은 응원도 받았었는데, 그동안 나는 소비자는 권리를 지향하고 판매자는 수익을 지향한다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다른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음에 큰 흥미를 느꼈다.

또한, 회사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상품제작을 했던 적도 있는데, 이 때 미팅 등을 통해 각 회사의 의사처리 방식을 겪어보며 배운 것도 있다. 이런 식으로 펀딩과 회사들을 상대하면서 운영하다 보니 다른 공방들과 차별점도 생겼다. 다른 공방들은 상품 하나하나 큰 공을 들여 완성도를 높여 가치를 올리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나는 생산성을 늘리는 방법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 과정으로 확장성도 갖추게 된 것 같아, 나름 만족한다. 

앞으로 나는 우선 공방일을 이어서 할 생각이지만, '옻칠나전'만 할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인테리어도 배우고 다른 상품군의 상품도 하며 본격적으로 범위를 확장해갈 생각이다. 일단 올해는 그 걸음이 될 배움을 쌓아 갈 생각이다. 

또 다른 스물넷 이재준씨 이야기
 
현재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중인 이재준씨
 현재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중인 이재준씨
ⓒ 이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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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 스물넷 중엔 나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삶의 방향을 이리저리 설정하는 이가 또 있다. 현재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중인 이재준씨 또한 그렇다. 

이씨는 군대 전역 후 전공을 살려 농사를 짓고자 했다. 하지만 농사 준비가 막막하게 느껴졌고, 어떤 땅에 어떤 종자를 어떻게 심고, 일 년 동안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어려웠다고 한다. "돈을 벌기보다는 우선 돈을 투자해야 하는 현실이 제로베이스에서 농사를 시작하는 데에 어려움을 줬다"는 그는 돈을 모을 방법을 고민하다가 호주에서 타일 일을 하다 온 동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워킹 홀리데이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말했었다. 이씨는 그 말을 계기로 워킹 홀리데이를 선택하게 되었고, 전역 시기가 비슷한 친구들과 함께 준비했다.

이씨는 워킹홀리데이 준비가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구글 지도를 켜 공장이 많은 도시를 찾았고, 멜버른으로 낙점을 한 뒤 무작정 비행기를 예약해 몸을 실었다. 그는 결정하고 출발하기까지 걸린 시간보다, 도착 뒤 정착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더 컸다고 말했다. 

"어학원에 돈 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미국 드라마를 반복해서 보면서 회화를 익혔다. 또 도착하자마자 현지 지게차 운용 자격증을 땄다. 2주 정도면 딸 수 있었다. 호주의 알바천국 같은 어플이 있는데 그걸로 일자리를 알아봤다. 한국에서 알아본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일자리가 있었고, 급여도 한국에서 알아봤을 때보다 더 넉넉했다."

그의 경험은 다른 이들이 해외경험을 위해 하는 워킹홀리데이와는 조금 결이 다른 듯했다. 그 스스로도 "허리띠 졸라매고 외화벌이하고 있다. (웃음) 해외 경험이 주목적인 다른 워킹 홀리데이랑은 분명 다른 결이 있다"라며 "그래도 호주까지 온 거니 처음 두 달은 이곳저곳 많이 다녀봤다. 그러나 이제 좀 가다 보니까 이제 다 거기서 거기다. 예쁜 산 좀 있고 예쁜 바다 좀 있고. 그게 전부다"라며 웃었다. 

삶은 예측 불허의 여정

그럼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이재준씨가 가장 신기하게 느꼈던 건 뭐였을까. 그는 나이의 제약이 없다는 사실을 첫 손에 꼽았다. "40대, 50대 누구든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라며 이씨는 "호주 아저씨들 틈에서 혼자 아시안계 청년으로 일했는데 다들 잘 대해주고 츤데레처럼 챙겨줘서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라고 소회했다. 

"지금은 비자 연장을 위해 닭농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기도 분위기 좋고 휴일과 쉼이 확실해 큰 불편함은 없다. 확실히 여기 임금이 높고 일자리가 많다 보니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 여기서 이런저런 사람도 많이 사귀었고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

만족하는 이씨의 모습에 지인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니, 비자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으로 안 돌아올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는 비자가 만료되는 2년 뒤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어 돌아가고 싶다"는 것. 

다만, 이씨의 심경엔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농사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것이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선택할지에 대해선 아직 미지수라고.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큰 선택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왔던 경로를 수정해 다시 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재준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건 아마도 그가 스물넷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와 이재준씨 모두 각자의 선택과 경험을 통해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만나며 성장하고 있다. 삶은 예측 불허의 여정이며, 우리는 앞으로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순간을 마주하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다. 
 

태그:#사는이야기, #나전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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