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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평소 존경하는 김마리아 열사 동상 앞에선 하라다 쿄코, 도다 미츠코 씨, 기자, 이양순 동문(오른쪽 부터)
▲ 김마리아 열사 동상 앞에서 평소 존경하는 김마리아 열사 동상 앞에선 하라다 쿄코, 도다 미츠코 씨, 기자, 이양순 동문(오른쪽 부터)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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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1892~1944)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서 아버지 김언순과 어머니 김몽은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상진이고 이명은 김근포이다.
 
아버지가 일찍(2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7살 때에 소래학교에 입학하여 4년 후 졸업했다. 13살에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언니들 밑에서 성장하는 아픔을 겪는다.
 
1906년 언니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 와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큰 언니가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명한 큰숙부가 서울에서 구국계몽운동 단체인 서우학회 등에 관계하고 있었다. 또 작은숙부는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구국활동을 하였다. 김마리아는 숙부들의 이러한 영향으로 일찍부터 구국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머니가 운명하면서 가족들에게 "막내딸만큼은 반드시 외국에 유학을 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김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담대했다. 부모의 유산이 있어서 자식들의 생계와 교육에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김마리아는 2주 만에 이화학당을 자퇴하고 연동여학교로 전학했다. 언니들이 다니는 연동여중으로 옮긴 것이다.
 
김마리아가 전학한 후 연동중학교로 개명한 이 학교는 1887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엘러스가 서울 정동에 설립한 기독교 계열 학교였다. 교과 과목은 성경·한문·국어·역사·지리·산술·도화·체조·음악·과학·천문 등 근대적 모든 과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기독교 정신과 애국심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크게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08년 세례를 받았다. 연동중학교에서 모든 학과목에 좋은 성적을 받고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학생이 되었다. 연동중학교는 1909년 교명을 정신여학교로 변경하였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는 1910년 6월 전남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결혼할 나이였으나, 나라가 어려울 때 여성들의 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교직으로 나간 것이다.
 
일본 유학시절 김마리아 열사는 당당하게 한복을 입어 조선인임을 알렸다. 둘째줄 오른쪽 첫째가 김마리아 열사.(정신여고 제공)
▲ 일본 유학시절 김마리아 열사 일본 유학시절 김마리아 열사는 당당하게 한복을 입어 조선인임을 알렸다. 둘째줄 오른쪽 첫째가 김마리아 열사.(정신여고 제공)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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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아여학교에서 나라가 망한 것을 지켜보면서, 그럴수록 실력 있는 여성을 길러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의 유언을 생각하면서 1912년 도쿄여자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을 현장에서 알아보고 일본의 교육제도 등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여자유학생 10여 명과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1915년 5월에는 도쿄여자학원 본과에 들어갔다.  
 
김마리아는 안재홍·신익희 등이 중심이 된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참여하는 한편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에 피선되어 기관지 <여자계>의 발행을 통해 남녀평등과 재일 한인들의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초에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자 적극 참여하고, 2·8독립선언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사건으로 피체되어 취조를 받고 풀려나 <2ㆍ8독립선언서>를 품고 부산을 통해 귀국길에 올랐다.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널리 반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귀국한 광주의 고모 김필례 집을 방문하고 서석병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량 복사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6일 천도교의 보성사를 방문하여 이종일 사장과 만나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전하고 서울의 독립선언 문제를 논의했다. 이종일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 되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의 책임자였다.
 
도쿄에서 함께 활동하던 황에스더가 서울에 와 있었기에 그와 만나 3·1혁명에 여성들의 참여 문제를 논의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나혜석·박인덕 등 여성 지도자들과 항일부녀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실행 간사로 뽑혔다. 
 
김마리아는 3월 6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경무총감부에 갇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신문을 받았다. 검사국으로 송치되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김마리아는 극심한 고문으로 코의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유양돌기염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치료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다시 정신여학교 교사로 들어갔다. 항일여성운동을 조직·강화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여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해 9월 19일 자기 숙소에서 여성계 대표 18명과 비밀결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결성, 회장으로 선출되어 국내외 지부결성과 군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동안 모금된 2,000원과 애국부인회 취지서 등을 보냈다. 애국부인회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창생이고 동지인 오현주와 그의 남편이 경찰에 밀고한 것이다. 김마리아와 간부 18명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지방조직의 간부들도 검거되어 총 52명이 구속되고, 이 중에 김마리아 등 핵심간부 9명은 대구감옥으로 송치되었다.
 
김마리아는 주동자로 밝혀지면서 또 가혹한 고문을 받고 사경을 헤매이게 되었다. 일제는 그가 감옥에서 숨지기라도 하면 민중들의 봉기가 두려워서 병보석으로 출감시켰다.  
 
3·1혁명은 일제의 포악한 진압으로 많은 국민이 죽거나 부상되고 투옥되었다. 이 해 7월 그는 극비리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23살 때였다. 고모부 서병호의 주선으로 무사히 상하이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젊은 처자의 단신 망명에 감격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의정원회의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했다. 임시정부에 자리를 잡은 그는 공부를 더 하고자 난칭의 금릉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1923년 2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에 선임되고 활동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리어 격심한 분란 속에 빠져있었다.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해 6월 상하이를 출발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김마리아는 1924년 10월 미주리주 파크빌에 있는 파크대학에 3학년으로 등록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모든 학점을 따고, 1927년 시카고대학 대학원 연구생으로 1년간 수학했다. 1928년 연초 뉴욕에 있는 여성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여성단체 근화회를 조직, 회장으로 선출되고, 9월에는 콜롬비아대학 사범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에 입단했다.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의 단체이다. 미국의 여러 도시를 돌며 독립에 관한 강연을 하고, 1932년 캐나다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10년 동안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치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어서,  귀국했다. 일제는 그의 형기가 이미 오래 전에 만료되었지만, 다시 구속했다. 경기도경찰서에 갇히게 되었다. 어쩌면 호랑이 굴로 스스로 들어온 셈이 되고 말았다. 
 
김마리아는 귀국길에 서울역에서 잡지 기자가, "말씀드리기는 좀 거북합니다만, 고국에 오신 후이니 앞으로 결혼문제는 어찌하시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결혼이요? 도무지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합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집회에서 거듭 같은 질문에 "나는 대한독립과 결혼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1933년 봄 총독부의 취직 정지 명령이 소멸되어 마르타윌슨 여자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교단에 서게 되었다. 1934년 연초에 한국교회 내의 여성차별적 현실과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종교시보>에 썼다. 이 글에는 다음의 대목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 일남일녀를 창조하시고 인권에 대한 차별이 없이 아담과 이브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명하였으며 예수께서는 부부는 한 몸이라고 가르치셨고 여자를 열등시키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보수적 교단으로부터 심한 항의가 있었다. 그럼에도 장로교여전도회 총회에서 제7대 회장으로 선출되고, 이후 4대에 걸쳐 회장을 맡아 여전도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일제는 1935년부터 먼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이어서 교회에 이를 강요했다. 이런 시점에 여전도회 회장이 된 김마리아는 여전도회 연합대회 소집을 유회시키고 실행위원들을 소집하여 다른 안건만을 처리하여 신사참배의 결정을 회피했다. 신사참배 결정이 유회되자, 일제경찰은 그를 체포하고자 했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그리고 신사참배 거부 소식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막고자 하여 이번에는 구속을 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전도회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더욱 일제의 심한 탄압을 받게 되고, 여전도회 역시  활동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1941년 여전도회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평양 서문박교회에서 연합대회를 개최하고, 평양신학교 여자부 설치 추진 위원과 이사에 선정되어 활동을 계속했다.
 
총독부는 이 학교를 폐교시키고 탄압이 더욱 극렬해졌다. 김마리아는 지쳐가고 있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축농증과 중이염이 크게 악화되고, 일제의 감시와 압박은 견디기 어려웠다.
 
1943년 12월 7일 밤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졌다. 12시간 만에 깨어났으나 다시 혼절하였다. 고문과 망명생활로 약할 대로 약해진 그는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1944년 3월 13일 평양기독교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52살의 한창 일할 연세였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김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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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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