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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내는 등 단체행동에 돌입하는 가운데 지난 1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사집단행동 대응 관계장관회의에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참석하고 있다. 왼쪽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의대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내는 등 단체행동에 돌입하는 가운데 지난 1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사집단행동 대응 관계장관회의에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참석하고 있다. 왼쪽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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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의대를 반대한다고 나섰던 게 본과 2학년 때이니 4년만에 다시 의대 정원 논란이 돌아왔다. 논의가 시작된 건 몇 달 전이니, 관계부처에서 VIP의 의중을 실현하기 위해 그간 얼마나 부산스러웠을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항간에서는 선거를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그런 복잡한 정치적 셈법을 일개 인턴이 다 알 리는 없다. 다만 이제 대학병원의 의료 현장을 체험해 나가는 사람으로서 의사들이 반대하는 이유가 세상에 회자되듯 적폐 기득권 의사들의 카르텔 유지를 위한 것만은 아님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의료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문제다. 이해관계자도 너무 많고, 보험 제도와 떼어 놓을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 의료의 공급 단계(개원의/봉직의/대학병원 교수)와 분과 별로(흉부외과와 진단검사의학과와 내과는) 별개의 직업군이라 보아야 할 정도로 균질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를 한 번에 조망하는 건, 그리고 증원 같은 단순한 정책으로 해결하는 건 아주 조악하고 제한적인 접근만이 될 뿐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차선의 문제 (현실적인 한계로 완벽한 균형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는, 눈 앞의 문제 하나만을 교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전체적인 효용을 저하시킬 수도 있다는 것)처럼.

1. 의사는 정말 부족한가?

의대 증원을 추진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당연 의사 수 부족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건 OECD 보건 통계다. 실제로 우리나라 의사 수는 인구 1000명 당 2.6명으로 해당 통계에서 두 번째로 낮다. 그래서 의사 증원은 직관적인 호소력을 갖기 쉽다. 문제는 쉬운 만큼 함정도 많다는 것.

노동경제학을 배우다 보면 유효 노동이라는 개념을 마주하게 된다. 단순한 노동자의 수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생산적이며, 얼마나 오래 일하고, 또 실제로 얼마나 집중하는 지가 중요하기 때문. 따라서 부족한 의사 수가 의료 공급 부족의 진정한 지표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루에 2시간만 일하는 의사 10명보다는 하루 4시간씩 일하는 의사 6명이 더 많은 의료 서비스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의료 서비스는 크게 보아 외래와 입원으로 나뉜다. 따라서 외래 횟수와 입원일은 결국 사람들이 실제로 제공받은 의료 서비스의 양을 대변한다. 그런데 같은 OECD 통계에서 우리나라의 1인당 외래 진료횟수는 연 15.7회로 OECD 1위, 입원 환자 당 평균 재원일수는 18.5일로 2위다. 더군다나 OECD에 제공하는 국내 기초 자료인 <의료서비스경험조사>에서 평균 외래 진료 대기 시간은 14.6분, 입원 대기는 평균 6.3일이며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2017년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전문의를 만나기 까지의 대기 시간이 분 내지 시간 단위인 나라가 세계에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구체적인 것을 다 따지기 전에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지금의 처참한 출생율이라면 의대 정원을 지금처럼 유지해도 그리 머지 않아 1000명당 의사 수는 OECD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양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의료서비스 공급은 적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수위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적은 인력이 노동을 갈아 넣어서든,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설계해서든 충분한 양의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다. 물론 이게 능사는 아니다. 3분 진료나 부주의에 의한 의료 사고 등 질적인 측면이 그 과정에서 희생되기에 의사 수를 늘려 공급량을 유지하면서도 의료 서비스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의사 수가 부족해서 의료 서비스가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건 어불성설. 의료 공급량을 의사 수로 측정하는 것부터 잘못되었다.

2. 무엇을 이루려는가?

정책이란 무릇 목표하는 바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아무리 정부 정책을 읽어보아도 의대 2000명 증원이 "필수 의료와 지방 의료 불균형을 해결한다"는 구호만 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증원은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는 데 합목적적인 해결방식이 아니다.

2.1. 필수/응급의료 강화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증원을 통한 필수/응급 의료 공백 영역의 충원이다. 이른바 '낙수효과론'으로, 의사 수를 늘려서 일반의 시장의 급여 수준을 붕괴시켜 차라리 전공의를 택하는 편이 낫도록 하자는 것. 이 역시 직관적으로 꽤나 와닿는 설명이고, 특히나 의사 집단에 적대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지만 역시나 따져보아야 할 구석이 많다.

일단 그렇게 일반의 시장이 붕괴하여 수련을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더 이득인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련을 택하고, 이른바 낙수효과로 기피과에도 인력이 충분히 공급된다고 가정해보자. 그 논리의 끝은 결국 기피과 전문의의 공급 증가로 인한 기피과 전문의의 페이 감소로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GP보다 하방이 더 안정적인 진로가 될 수 있을 지언정 경제적 유인으로 필수/응급의료 인력을 충원한다는 건 다시 난관에 봉착한다. 더군다나 급여 진료에 의존해야 하는 필수/응급과들의 전문의에 비하여 비급여 진료를 통한 상방 개척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일반의가 다시금 상대적으로 나은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도 크게 두 가지의 대안이 제시되는 것 같다. 하나는 필수/기피과들의 수가를 올려주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용 통증 검진 등의 일반의 시장을 간호직 등 기타 직역에 개방하여 대우 수준을 더더욱 깨부수면 된다는 것.

이 중 첫번째에 대해선 의사들의 시선과 일반적인 시선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다. 당장 의사들이 현장에서 목격하는 건 이른바 기피과라고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응급의학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등 전문의들이 대학병원에선 자리를 찾지 못하고 로컬에 나가선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한 채 결국 미용, 통증, 척관, 정맥류 등 비 필수적인 영역에 뛰어드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당신은 뇌종양 수술, 심장 판막 수술, 소아 선천기형이나 항암치료를 로컬 의원에서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의사의 입장에선 어차피 기피과 처우개선과 수가 인상 등을 통해 인력을 충원해야 하는 것이라면, 의사를 2000명 더 키워내서 뭘 할 시간과 비용으로 차라리 지금 당장 충원 가능한 전문의 인력들에게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영리 병원 허용 논의도 보류된지 오래이고, 3차병원 재정이 정부에 상당부분 구속되는 상황에서 입원 전담의, 진료 교수 및 교수 등을 더 많이 확보하는데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억지로 의대생을 2000명 더 길러내서, 일반의 시장을 붕괴시켜서, 어쩔 수 없이 기피과로 흘러 들어오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물론 적당량의 증원이 위와 같은 상황까지 치닫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의사의 밥그릇을 적당히 깨고 대신 인력 공급을 늘려서 기피과로의 낙수효과를 일으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낙수효과론은 기피과가 왜 기피되는지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논의이다.

실제로 기피과가 기피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1차 의원으로의 개원이 어려워 대학병원 교수 자리가 아니면 사실상 자신의 전공을 살린 진료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종착지는 일반의들이 종사하는 미용, 통증 등 이 모든 정책의 저격 대상이 된 시장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의 시장은 붕괴는 곧 기피과 전공의들의 하방 붕괴와도 같다.

당장 지금 인턴을 수료한 우리의 동기들 중 원하는 분과의 레지던시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도, 특히나 지금처럼 증원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조차 기피과의 수련이라도 받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매우 적다. 오히려 다들 내년에, 안되면 내후년에라도 자신이 원하는 과에 재지원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즉 증원은 '레지던트 재수'를 더욱 확대할 뿐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각 분과 전문의는 사실상 의사라는 공통점 말고는 거의 별개의 직업이라 봐야할 정도로 특성이 다르다. 애초에 본인의 적성과 흥미가 다른 상황에서, 원하는 과에 떨어지면 억지로라도 기피과로 흘러들어갈 것이라는 기대는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나아가 이러한 논의에서 간과되고 있는 건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의사의 비임상 진로다. 만약 의사의 밥그릇이 적당히 깨지면 의사들이 소송 및 피해보상 리스크가 상존하는 기피 임상 영역으로 흘러들어가기 이전에 임상약리학, 법의학, 의료관리학, 제약/바이오 기업 등의 자리가 먼저 채워질 것이다. 그러면 정작 우리가 추구했던 기피과 인력 충원은 도대체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필수/기피과를 제외한 의사가 진출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의 밥그릇이 충분히 깨졌을 때까지?

두 번째, 그러니까 의사 진로 자체의 경제적 메리트를 충분히 희생시키자는 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우선 미용 시장 개방이든 2000명이 아닌 의대 20000명 증원이 되었든 의사 진로 자체의 경제적 매력을 희생시켜서 산업계로의 취업 및 진출을 장려하고 메디컬로의 인재 유출을 억제하자는 것. GP 시장의 타 직역 개방에 따르는 여러가지 역량 확보 및 책임 소재 문제를 별론으로 하더라도, 개인적으론 이것이 정말 장기 저성장 시대에 제조업 중심 수출 주도 경제의 국가에서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충분히 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하나의 의문은 우리가 어디까지 의료의 질 하락을 감수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냐는 것이다. 인턴을 하면서 더욱 느꼈지만, 의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노동집약적이고 공급자 의존적이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의사라는 진로 자체의 매력이 떨어지면 예과/본과 6년 + 인턴 1년 + 레지던트 4년 + 펠로우 1~2년의 과정의 젊은 10여 년을 갈아 넣는 이 길을 택할 우수한 인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실제로 지금 그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북경대 의대 입결이 자연계 최하위를 맴돌고, 그래서 상위권 의대의 학생들 상당수가 우리의 의학대학원에 와서 연구 기술을 배워 가 중국의 바이오/제약 기업으로 취업하고 있다. 우리는 임상인력의 퀄리티를 포기할 것까지 각오했는가, 아니면 막연히 의료의 질은 유지될 것이라고 은연 중에 가정하고 이런 일을 추진하고 있는가? 잠깐만, 의료의 공급량이 아니라 질을 개선하는 게 의대 증원의 본래 목적 아니었던가?

2.2. 도농간 의료 불균형 해소

다음으로 떠올려 볼 수 있는 증원의 명분은 도농간 의료 불균형 해소다. 의료 행위 가능 지역을 제한하든, 지역 의대 TO는 강제로 그 지역에 묶어두든, 아니면 또 다시 낙수효과에 기대든지 하여 의사 공급을 늘리고 도농간, 서울-지방간 의료 불균형을 해소하자는 것.
 
2021년 OECD 보고서 중 도농격차 지표에서는 한국의 일본 다음으로 의사의 도농격차가 적다고 말한다.
 2021년 OECD 보고서 중 도농격차 지표에서는 한국의 일본 다음으로 의사의 도농격차가 적다고 말한다.
ⓒ OE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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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OECD 통계는 우리의 urban-rural physician density(도농간 의료 인력 밀집도) 차이가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핵심 근거로 삼은 그 OECD의 2021년 자료를 보면 주요 국가 중 일본과 더불어 도농 격차가 최하위로 기록되고 있다. 더군다나 이 질문 자체가 꽤나 잘못되어 있다. 부산까지도 KTX로 편도 2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나라에서 아무런 경제적 타당성에 대한 고려 없이 도농 격차 해소를 외치는게 얼마나 의미있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전공의 선발 과정에서는 수도권-지방 전공의 TO 비율을 현재의 6:4 수준이 아닌 5:5 수준으로 맞추라는 정부 지침이 있어 대대적인 TO 조정이 있었다. 예컨대 서울대 피부과가 전공의를 1명 뽑은 반면, 부산대 피부과가 4명의 TO를 가져갔다. 이에 반해 보라매병원 내과에서 근무할 때 하룻밤 배정되는 인턴은 1명인데 살펴야 하는 환자의 수는 270명 대였다.

의료 전달 체계와 1, 2, 3차의 구분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고, 특진비도 없어진 지 오래이며, 교통 발달로 수도권 의료에 대한 접근성이 이렇게나 좋은 마당에 의사 수를 늘리고 전공의 비율 조절해서 도농격차를 해소한다는 게 얼마나 현장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는가. 전달 체계가 무너져 당뇨약이나 고혈압 약만을 반복 처방 받기 위해서 환자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지방의 3차병원에서는 어려운 케이스에 대한 경험이 쌓이지 않다 보니 해당 분야를 다룰 수 있는 의사가 점점 적어지고 그에 대한 트레이닝 역시 불가하다. 그럼 환자들은 그런대로 또 다시 서울에 있는 병원을 찾게 된다. 그럴수록 수도권으로 사람들은 더욱 몰리게 된다. 이걸 아주 인위적인 방식으로 의사수를 늘려서 지방에 배치한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의사가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료 전달체계를 먼저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여기에는 학술적 근거도 있다. 2002년 NEJM에 실린 <hospital volume and surgical mortality rate in the US>를 보면 식도암, 췌장암의 경우 여타의 제도적 변화 없이 centralization(어려운 케이스를 여러 병원에서 나눠하기 보다는 한 곳에서 지속적으로 수술하는 것)만으로 수술 후 장기 생존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니까, 무작정 지방 의료를 살리고 의사를 보내는 것이 정말 환자를 이롭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맹장염 수술과 같이 응급하면서도 centralization의 효과가 없는 수술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지방에서 충분히 해결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달 체계 개선의 구체적 의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사 수를 무작정 늘리고 인위적으로 지방에 묶어 두는 해괴한 방식 보다는 각 분과의 영역와 특성에 맞추어 전달 체계부터 다시 정비해야 한다는 것. 무엇을 지방에서 반드시 해결하도록 하고, 무엇을 서울에 올라와 치료할 수 있게 할지 교통정리를 하는 것.

2.3. 면허 수 제한으로 지대를 누리는 의료 카르텔 혁파

의대 증원의 근거로 자주 등장하는 논리가 바로 국가의 면허 수 통제를 통한 지대(rent)의 혁파이다. 오랜 기간 증원을 하지 않아 의사가 지나치게 지대를 많이 누리니 이를 혁파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를 논의함에 있어 하나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의료 시장은, 특히 필수의료에 가까울수록 전례없는 비탄력적인 수요를 가진다. 면허 수 제한을 통한 공급 제한에 대한 공분만큼이나 가려져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 의료 시장은 공급 통제 못지 않은 가격 통제 시장이다. 일례로 췌장암 환자에게 적용되는 유문보존식 췌장십이지장절제술(PPPD)의 2022년 심평원 수가 자료를 보면 대략 건당 440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길게는 12시간 넘게 지속되는 걸 본 적이 있는 이 수술에는 집도의, 보조의들, 마취과, 스크럽 간호사, 써큐 간호사, 복강경 등 장비, 기타 소모성 재료 등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요구된다.
 
심평원의 유문보존식췌장절제술 자료.
 심평원의 유문보존식췌장절제술 자료.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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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 본과 실습 때 흉부외과 교수님께서 본인이 지금 하시는 수술을 미국에서 하면 몇 달 치 월급을 하루만에 벌 수 있다고 하신 적이 있다. 수술 받지 않으면 얼마 못가 죽지만, 수술 받으면 적어도 몇 년 이상 더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수술의 적정한 가격이란 게 있을까? 필수 의료 영역은 필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탄력적인 수요를 보이는 시장 중 하나이다. 따라서 왜 의사만 공적 자원을 투입해서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냐는 지적도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소아과, 흉부외과, 신경외과의 수가제한을 풀면 위 과들은 자생적으로 먹고 살 가능성이 있고, 병원에서도 위 분과의 의사들을 적극적으로 고용할 유인이 충분해진다.

의사 수를 충분히 늘려 경쟁을 유도하고 실력 있는 사람만 살아남게 하겠다는 시장주의적인 발상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순간 그건 우리의 인도주의적 선을 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런 자유 경쟁의, 말하자면 미국적 모델로 나아갈 경우 안 그래도 정보 비대칭이 심한 의료 영역에서 의사의 게이트키핑 권한이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 1억 내고 재발확률 1%인 수술을 받을 지, 5000만원만 내고 재발 확률 5%인 수술을 받을지, 1000만원만 내고 재발 확률 20%인 수술을 받을지 골라야 한다면, 그리고 심지어 당신에겐 의사가 그 정도의 실력을 정말 갖추고 있을 지 판단할 수 있는 정보조차 없다면 어떨까. 그러면 미국은 어떻게 하냐 물을 수 있으나, <브레이킹 배드>같은 미드에서 그려지듯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보험사들이 자신의 보험을 적용해줄 수 있는 병원이나 의료진을 지정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민간보험의 대가는 알다시피 비싸다. 

3. 우리는 의사를 2000명 더 길러낼 수 있을까?

위의 논의들이 다 해결되었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000명의 의사를 길러낼 수 있을 지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2000명이 다 전문의가 되든, 아니면 전부 일반의로 흘러들어가 일부 주장과 같이 낙수효과를 거쳐서 기피과의 전공의 및 전문의 인력으로 거듭나든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필수과의 전문의 인력을 상당 수 양성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금의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없어진 서남대 의대가 폐교된 이유도 수련환경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아서였다.

지금도 상당 수의 서울대 교수님들이 약리학, 기생충학 등 지방 의대의 기초 강의를 위탁받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각 대학에서 모든 기초 교실을 운영할 재정적, 상황적 역량이 안되기 때문이다. 본과 교육에서야 어떻게든 커버한다 해도 이후의 수련과정에서 2000명의 인력을 감당해 내는 건 더 큰 문제다. 의학적 술기는 도제식 교육을 요하는 분야기 때문이다.

인턴을 하며 살펴보니 일부 수술과들의 전공의들은 입원 환자 케어 업무가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어 3년차, 4년차가 될 때까지 수술장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래서 의사 수를 늘리고, 기피과 전공의 TO를 그에 맞춰서 조절하면 주치의 업무를 경감시켜 지금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수술 경험을 쌓고 수련을 더 잘 받을 수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효율성과 합목적성의 문제에 다시금 부딪친다. 그럴 거면 지금도 자기 전공 못 살리는 기존의 기피과 각 분과의 전문의들을 입원 전담의로 채용하는 데 재원을 투자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또 전달 체계 개선을 통해 굳이 수도권에서 해결하지 않아도 될 케이스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어 전공의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마치며

물론 의사들도 반성해야 할 지점이 많다. 증원 계획 발표 이후 여론의 반응에서 보이듯 의사들이 대리수술이나 의료사고 등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기에 이렇게 공분을 사는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주장을 하려면 내부적인 자정 시스템 역시 정비되어야 한다.

나아가 의료 제도 자체에 개혁이 상당 부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본과만 졸업한 GP의 추가적인 수련, 현행 인턴 및 전공의 수련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입원전담의나 진료교수제도의 활성화와 같은 내부적 개혁에서부터 의료 전달 체계 확립, 건강 보험 제도 개편, 보험 보장 범위 및 항목의 조절 등등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큰 문제를 내포하는 필수의료 패키지는 살펴보기도 이전에 의대 증원만을 따져보아도 정부가 주장하는 필수 및 기피의료 인력 부족의 해결과 지방 의료 확충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앎이 짧아서 일수도 있다. 의대에 들어오기 전과 들어오고 나서, 또 의대에 들어오고 난 뒤와 인턴으로 일하고 나서 의료 제도에 대한 생각이 정말 많이 바뀌었으니까. 만약 전공의가 되면, 또 그 이후에 스태프 또는 개원의가 되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그 땐 생길 수도 있다.

몇 달 전 한국은행 총재님의 말씀처럼 우리 사회엔 근본적이고 창의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하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시장질서에 상당부분 맡긴 미국형 모델로 갈지, 보편적 복지로 접근한 영국 내지 캐나다형 모델을 택할지,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따라잡기의 전략이 먹히지 않을 만큼 발전한 우리의 처지를 고려하여 중부담 중복지의, 이른바 K-의료모델을 새롭게 개선해 나갈지. 제조업을 넘어 서비스 강국의 면모를 살려 의료 서비스를 하나의 수출 경쟁력으로 발굴해 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이미 서울대는 중동에 병원도 위탁운영 하고 있지 않은가.

"의사를 늘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라고 주장하긴 쉽다. 하지만 그것이 왜 현실적으로 합목적적이지 않은지 설명하기 위해선 이렇게나 긴 논의가 필요하다. 점점 강대강의 구도로 격해져가는 갈등 구조 속에서 정부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정책을 수정하고, 의사는 환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기울여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태그:#의대증원, #필수의료패키지, #정부, #의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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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을 꿈꾸는 어느 의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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