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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편집자말]
신안군 선도(蟬島)는 작은 섬이다. 그 모습이 매미를 닮았다고 해서 선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안군 압해도 기룡항과 무안군 신월항에서 선도를 오가는 배가 다닌다. 배를 타고 선도 선착장에 다다를 즈음, 먼발치로 노란 지붕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착장에 내리면 노란 글씨로 '선도 수선화섬'이라고 쓰여진 표석이 보인다. 그 옆엔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 시비가 세워져 있다. 글씨는 노란색이다. 바로 뒤로 이 섬에서 하나뿐인 마트가 있다. 간판은 노란색 톤이다. 옆으로 농협창고가 있고 그 외벽에 수선화가 그려져 있다.

현복순 할머니의 30년 수선화 사랑

선도는 수선화 섬이다. 배에서 내려 선도마트와 농협 창고 사잇길을 따라가면 주동마을이다. 조금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수선화 단지가 펼쳐진다. 이 길로 올라가면 바닷가 수선화 둘레길이다.

그냥 직진해 쭉 들어가면 선도교회가 나오고 그 옆에 '수선화의 집'이 있다. 건물 한 채에 주변은 꽃밭. 앞마당 아이들과 수선화 조형물이 반갑게 맞이한다. 지금 2월엔 꽃을 볼 수 없지만 3월 말~4월 초가 되면 주변엔 온통 수선화가 만발한다.
 
신안군 선도 수선화 문화의 메카 역할을 해온 선도 ‘수선화의 집’. 현복순 할머니는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선화와 여러 꽃을 가꿨다.
 신안군 선도 수선화 문화의 메카 역할을 해온 선도 ‘수선화의 집’. 현복순 할머니는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선화와 여러 꽃을 가꿨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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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은 90대의 현복순 할머니. 목포 출신의 현씨가 선도에 정착한 것은 30여 년 전. 부산 서울 등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남편이 퇴직하면서 고향 선도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꽃을 좋아했던 현씨는 선도에 집을 짓고 주변에 개나리 덩굴장미 같은 꽃을 심기 시작했다.

뭍에 나갔다 올 때마다 꽃을 구해다 심고 가꾸었다. 동백, 매화, 히아신스, 백합, 분홍보라 상사화, 꽃양귀비, 국화…. 2000년대 초에는 수선화 구근(球根)을 구해와 심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현씨 집 주변은 1년 내내 꽃향기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수선화가 단연 두드러졌다.

2018년 초 박우량 신안군수가 선도를 찾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박 군수는 주동마을 현복순 할머니 집 마당에 활짝 핀 수선화를 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수선화에 꽂혔다. '수선화의 섬', '수선화 축제' 아이디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박 군수는 곧바로 수선화 프로젝트에 착수해 '신안군 수선화섬 조성 및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수선화 재배를 안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여름 제주도와 지리산 등지에서 수선화 구근을 구입했다. 이것으로 부족해 네덜란드에서 5억 원어치 수선화 구근을 수입해 수선화 단지를 조성하고 이듬해 2019년 3월 말 제1회 수선화 축제를 열었다.
 
신안군 선도의 수선화 단지. 매년 3월 말이 되면 100여 종, 200만 송이의 수선화가 활짝 피어난다.
 신안군 선도의 수선화 단지. 매년 3월 말이 되면 100여 종, 200만 송이의 수선화가 활짝 피어난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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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하면 그리스 신화 속의 청년 나르키소스가 떠오른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해 목숨까지 잃고 끝내 꽃이 되어 버린 슬픈 주인공. 그래서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사랑, 자존심, 고결, 신비다.

수선화는 노란 꽃도 있고 하얀 꽃도 있다. 노란 수선화는 2주 정도, 하얀 수선화는 한 달 정도 꽃이 핀다. 개화 기간이 짧다 보니 "수선화는 어쩌면 피어날 때부터 질 준비를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수선화는 슬퍼서 더 아름다운 꽃, 미련을 남기는 꽃이다.

선도의 수선화 단지는 12.3ha 규모에 관람 동선은 약 3km. 100여 종의 수선화 200만 송이가 장관을 연출한다. 수선화의 집에서 선착장에 이르는 바닷가 둘레길 주변이 그 핵심이다. 해안선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이 펼쳐지고 그 주변이 온통 수선화다.

중간에 선도 쉼터(선도 카페)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수선화 꽃밭과 그 너머 바닷가, 그 옆의 느티나무 군락(수령 30여 년 된 느티나무 450여 그루), 전봇대를 활용한 수선화 조형물 등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수선화 꽃다발, 하트, 액자틀과 같은 기분 좋은 포토존도 있고 노란색 느린 우체통도 있다. 수선화 둘레길 풍경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광고 속의 한 장면 그 자체다.
 
선도 수선화 단지의 둘레길. 옆으로 바닷가가 쫙 펼쳐지면서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선도 수선화 단지의 둘레길. 옆으로 바닷가가 쫙 펼쳐지면서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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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를 활용한 수선화 조형물. 노란 수선화, 초록 대파와 마늘, 갈색 모래밭, 파란 바다와 멋진 조화를 이룬다.
 전봇대를 활용한 수선화 조형물. 노란 수선화, 초록 대파와 마늘, 갈색 모래밭, 파란 바다와 멋진 조화를 이룬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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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수선화에 관한 시를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매력이다. 유배지 제주에서 열심히 수선화를 키웠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신석정, 이해인, 나태주, 이순희 시인 등의 시를 만날 수 있다. 수선화의 집 앞에서 이해인 수녀의 '수선화'를 감상해본다.

"초록빛 스커트에/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조용한 목소리의/언니 같은 꽃/해가 뜨면/가슴에 종(鐘)을 달고/두 손 모으네/향기도 웃음도/헤프지 않아/다가서기 어려워도/밝은 눈빛으로/나를 부르는 꽃/헤어지고 돌아서도/어느새/샘물 같은 그리움으로/나를 적시네."

밝고 상쾌하면서도 아련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수선화는 선도의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꽃 같다. 올해 수선화 축제는 3월 29일부터 4월 7일까지 열흘간 열린다. 축제 때마다 1만2000여 명이 이곳을 찾는다. 조용하던 작은 섬이 열흘 동안 뭍에서 온 손님들로 들썩거린다고 할까. 축제 기간에는 선도에 들어오는 배편도 늘어나고 카페도 운영한다.
  
수선화 단지 둘레길에서 만난 매미와 수선화 벽화. 선도(蟬島)는 그 모양이 매미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수선화 단지 둘레길에서 만난 매미와 수선화 벽화. 선도(蟬島)는 그 모양이 매미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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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의 집을 떠난 현복순 할머니

지금 수선화의 집에 현복순 할머니는 없다. 바로 옆 선도교회 관계자는 "할머니가 건강 때문에 몇 년 전 딸이 사는 경기도로 옮기셨다. 뒷집에 사는 사위분이 수선화 집을 보살피고 다른 자녀분들도 종종 들른다"고 알려주었다. 수선화의 집은 맏사위 나승두(76) 씨가 관리하고 있다.

나씨는 경기도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5년 전 퇴직하고 이곳에 내려와 장모 현씨와 함께 수선화와 여러 꽃을 가꾸었다. 나씨 또한 꽃 전문가다. 수선화의 매력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제주도 수선화는 2월에 피고 선도 수선화는 3월에 핍니다. 태안 수선화는 4월에 피지요. 꽃이 귀할 때 꽃을 피우니 수선화는 더 대접을 받습니다."
 
현복순 할머니의 2016년 일기장. 현 할머니는 20년 동안 꼼꼼하게 꽃 재배 일기를 썼다. 맏사위 나승두 씨의 도움을 받아 촬영했다.
 현복순 할머니의 2016년 일기장. 현 할머니는 20년 동안 꼼꼼하게 꽃 재배 일기를 썼다. 맏사위 나승두 씨의 도움을 받아 촬영했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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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씨는 이곳에서 20년 넘게 꽃 재배 일기를 썼다. 나씨가 그 일기장 일부를 보여주었다. 2016년 3월 치를 읽어 보았다.
 
"3월 5일 黃수선화 4송이 피어 제대에 갖다 놨다. 토종 동백꽃 3가지와 함께 유리꽃병에 꽂아 헌화하다. 히아신스가 두 폭 솔방울 같은 꽃봉오리를 품고 있다.
3월 15일 히아신스 하얀 꽃잎이 열렸다.
3월 20일 노랑 수선화가 많이 피었다. 주황색 츄립꽃 2송이가 피었다. 히아신스 백색꽃이 만개해서 예쁘다. 꽃봉오리가 함께 올라왔는데 분홍꽃은 아직 안피었다.
3월 30일 분홍 히아신스도 만개했다. 울타리에 개나리 만개하고 백목련이 2,3일 있으면 필 것 같다. 꽃봉오리가 많다. 백수선화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홍매화 피기 시작."

꽃에 대한 현씨의 사랑과 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일기다. 그러나 30년 동안 선도에서 수선화와 꽃을 가꾼 현씨가 이곳에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이제 수선화의 집은 나씨의 몫이 되었다. 나씨는 그래서 요즘 이곳을 어떻게 가꾸어가야 할지 고민이 많다.

"장모님이 선도에 처음 심었던 수선화는 하얀 꽃을 피우는 해남 수선화였어요. 해남 수선화는 우리 땅에 잘 적응된 꽃입니다. 그래서 노란 수선화보다 꽃이 더 오래 가는 거죠. 그 하얀 수선화를 좀 더 늘리는 건 어떨지 고민하고 있어요."

밀양 박씨의 묵직한 자부심

선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석비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다. 유지비(遺址碑), 정려비(旌閭碑), 공덕비, 효행비 등등. 그 비들을 눈여겨 보면 대부분 밀양 박씨 문중과 관련된 것이다.

선도는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선도항에서 농협창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매계(梅溪)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밀양 박씨가 많이 모여 산다. 선도에 밀양 박씨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전반.

매계마을 가는 길에 '밀양 박씨 효열각'이 세워져 있다. 격식을 갖춘 모양새가 범상치 않다. 앞쪽에 출입구가 있고 그 뒤에 정려비가 있다. 출입구는 튼튼하게 돌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올렸으며 나무로 된 문을 달았다. 뒤편 왼쪽에 원주 이씨 정려비(높이 145cm)가, 오른쪽에 박병환 정려비(높이 141cm)가 서 있다.

두 정려비에는 모두 석조 비각이 씌워져 있다. 원주 이씨와 박병환은 할머니와 손자 사이. 19세기의 열녀와 효자로 지역 유림들의 천거를 받아 1905년 정부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았다.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34년 효열각을 세운 것이다.
 
선도의 매계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는 밀양 박씨 효열각(1934년).
 선도의 매계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는 밀양 박씨 효열각(1934년).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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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계마을 마을회관 앞에는 '박양환 박계환 유지비(遺址碑)'가 있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전남 해남에 숨어 살던 밀양 박씨의 후손인 박종학은 1799년 아들 박양환과 박계환을 데리고 선도에 들어왔다.

그 입향(入鄕)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33년 건립된 것이다. 유지비 옆에는 밀양 박씨의 공동 납골당도 있다. 1933, 1934년에 세운 것부터 1990년대에 세운 것까지 선도 곳곳엔 밀양 박씨 가문의 사적비, 선행비, 효행비가 세워져 있다. 밀양 박씨 가문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선도 여행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선도는 참 예쁜 섬이다. 2월인 지금, 선도에서는 수선화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길을 정비하고 여기저기 잔디 뗏장을 심고 있다. 3월 말이 되면 수선화가 필 것이고 영화 속 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그런데 수선화의 집에 현복순 할머니는 없다. 선도의 수선화는 그래서 더욱 짙은 그리움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박미정, 〈슬픈 이야기 간직한 자기애의 꽃 수선화〉, 《산림》 602호, 산림조합중앙회, 2016
이재진, 〈CNN도 반했다, 수선화 천국〉, 《산》 2021년 4월호, 조선뉴스프레스
이지후, 〈꽃을 든 신사 수선화섬으로 간 까닭〉, 《월간 가드닝》 2019년 5월호, 그린쿱협동조합 최성환 외, 《수선화의 섬 선도》, 민속원, 2023
한상훈, 〈그리움의 수사학-문학공간에 나타난 수선화 이미지〉, 《문학춘추》 90호, 문학춘추사, 2015


태그:#신안, #선도, #수선화, #현복순할머니, #밀양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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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서 문화부 기자, 정책사회부장, 오피니언팀장, 논설위원 등으로 일했고 현재 서원대학교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중들이 문화유산과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고 향유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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