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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1년간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보니파시오에 위치한 필리핀 한국 국제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하면서 생활인과 여행자의 삶을 누렸다.

서핑으로 유명한 발레어, 마욘 화산이 있는 레가스피, 영롱한 바다가 일품이었던 파굿풋, 절벽에 관을 매달아 놓은 사가다,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온다는 플락산, 라이스테라스가 끝없이 펼쳐진 바나우에, 스킨 스쿠버의 성지 민도로, 무인도에서 수영하던 수빅, 스페인 유적이 남아 있는 비간, 일몰이 찬란했던 마닐라 베이 여행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생활인으로 지쳤던 내게는 샘물 같은 시간이었다. 주중에는 수업이 방과 후까지 하루 종일 이어졌고 치안을 걱정하는 교민사회에서는 학교와 집을 잇는 셔틀버스만 안전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학생과 교사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냈다. 이곳이 한국인지 타국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길을 잃을 용기를 품고 여행자가 되어야 했었다. 그러한 경험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 보라카이, 세부, 팔라완 여행을 나중으로 미룬 이유는 어차피 비행기를 타는 여행이라면 한국에서 와도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는 루손섬만 여행해도 주말과 방학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고서 8년이 흘렀다. 필리핀으로 다시 오겠다는 다짐은 자꾸 다른 여행지에 밀렸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일본,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하와이, 포르투갈로 종횡무진 다녔지만 필리핀을 다시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올 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해외여행에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국내 여행에 몰입하고 싶었다. 부산 갈맷길 걷기, DMZ걷기, 목포 신안길 걷기로 여행을 대신했다. 둘째 아들이 필리핀 팔라완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굳이 또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리라.

하와이에 갈 때 필요했던 미국 비자 때문에 신경을 바싹 썼던 경험이 있고, 코로나-19로 백신증명서가 필요했던 때도 있어서, 이번 필리핀도 이런 저런 준비 미흡으로 만약의 경우 탑승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세부퍼시픽의 새벽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를 경유해서 도착한 푸에르토 프린세사는 한가롭고 익숙했다.

보니파시오에서 자주 보았던 마켓마켓, SM몰처럼 로빈슨몰에 편의시설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피자, 바비큐, 초밥, 마사지, 환전, 유심카드, 식료품 가게까지 한곳에 있어서 이곳에 여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생활하러 왔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임경선의 <도쿄>를 보면 첫날의 호텔이 좋아야 여행이 술술 풀린다는 주변의 조언을 듣고 여행 패턴을 바꿨다는 말이 있다. 초반에는 경비를 아끼다가 나중에 좀 넉넉히 쓰던 스타일이라 반신반의했다. 로빈슨 몰 바로 옆에 위치한 '고 호텔'(1300페소, 약 4만 원)은 하룻밤 묵기 무리 없다 생각했는데 비좁은 데다가 공항셔틀버스도 없고 조식도 포함되지 않아서 만족도가 떨어졌다.

그냥 하루만 있을 거 웬만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드라이기가 없어서 제대로 말리지 못한 헤어스타일 때문에 아들은 기분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과한 행동을 하다가 휴대폰을 바다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그날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다. 해변공원은 초라했고 찾아가는 어촌마다 개, 고양이까지 비리비리 했다.

그에 비해 AJIJA 파라다이스 호텔(7만 원)은 수영장도 있고, 훌륭한 조식이 포함이고, 셔틀 공항 버스도 있다. 이런저런 서비스를 보태면 고 호텔보다 훨씬 낫다. 일출이 일품이라는 BM비치가 걸어서 10분이다. 바다는 얕아서 배를 타고 한참 나가야 수영이 가능했다.
 
태풍에 쓰러진 야자수를 기다란 의자로 삼아 바다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
 태풍에 쓰러진 야자수를 기다란 의자로 삼아 바다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
ⓒ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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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늘과 바다, 지상이 하나로 이어진 비치는 영감을 주기 충분했다. 태풍에 쓰러진 야자수를 기다란 의자로 삼아 바다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오래전 지었던 건물이 기둥만 남기고 사라져버려 맥수지탄을 느끼게 한다. 맨발로 이 바다 끝을 하염없이 가고 싶게 하는 바다였다.

호텔로 돌아오니 조식 시간이다. 과일도 많고 빵도 다양했다. 생선, 고기류도 풍부했다. 유리잔에 물을 채워주는 서비스도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짐을 맡겨놓고 혼다 비치로 향했다. 도시를 떠나는 날은 이동에만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해변을 걷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수영복 준비도 없이 들어갔다. 코워리 섬까지 1000페소(2만5천원)이다.

얼마 머물지도 않을 텐데 배까지 타고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미국인을 만났다.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영어교사다. 배값을 같이 내고 들어가서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그림처럼 동그란 섬이다. 한 가운데 야자수가 몇 그루가 있고 그 아래 바와 타투가게, 마사지 가게가 조그맣게 있다. 우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모래성을 쌓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아 마사지를 받았다. 여행의 꿀맛이었다.

푸에르토 프린세사에 오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루 정도는 이 섬에서 휴양을 보내길 추천한다. 돌아오는 길에 트라이시클을 못 만나 걱정했는데 지프니가 선다. 맘 좋아 보이는 운전수 아저씨는 생선가게에서 장도 보고, 사람들한테 차비도 받아 가면서 안전하게 운전한다. 우리는 한 사람당 500원의 차비를 내고 필리핀의 서민들을 밀착해서 관찰했다.

여행의 이유는 다양하다.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나이는 훌쩍 50대 중반이다. 낯선 나라에서 사람들 속으로 녹아 들어가 느릿느릿 산책하면 쓸쓸하지만 그에 걸맞는 자유가 몸속에 가득 찬다. 삶을 관조할 수 있다. 평정심이다. 물론 손해를 보고 무시당할 때는 어렵게 얻은 관조의 그릇이 '탁' 하고 엎어진다. 그래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한다.

여행지의 마법이다.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십수 년 전 치앙마이 아파트형 숙소에서 묵으면서 현지인의 삶 속으로 녹아 들어갔던 그 젊은 날의 '나'를 찾았다. 이제는 배낭여행에 지친 나머지 안락한 현실에서 소비를 즐기고 자본주의의 단맛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쯤, 이곳에 와서 청춘을 되찾은 것이다.

가방 속에 책 한 권 넣고 선크림과 비치 타올,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를 넣은 채 스쿠터를 타고 정처 없이 다니고 싶다. 일주일쯤 머물 수 있는 에어 비앤비를 구해 거기에서 글 쓰고 사색하며 매 순간을 누리고 싶다. 그 생각만 해도 피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쿵쾅댄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잃었던 젊은 날을 되찾았다.

태그:#팔라완, #혼다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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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잡고 배낭여행을 다니는 뚜벅이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아이들로 자라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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