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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오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 여행은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 마닐라공항에서 푸에르토 프린세사 국내선을 타고 들어가 다시 차를 타고 다섯시간을 더 들어가야 도착하는 엘니도에서의 여행으로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쓴 맛, 단 맛이 다 있어야 온전한 여행이고 인생인 것처럼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롤러코스트를 탔다. 포켓 와이파이, 혹은 로밍보다 유심카드를 사서 쓰자고 공기계를 갖고 갔다. 핫스팟을 켜면 1석 2조이고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유심 카드를 넣고 푸에르토 프린세사 해변공원 나들이를 갔다. 물은 맑지 않았고 접근도 쉽지 않았다. 호기를 가끔 부리는 아들은 축대를 넘어 바다로 접근한다. 둑방에서 주르륵 미끌리며 휴대폰 두 대가 동시에 바다로 들어간다. 하나는 발끝에서 걸렸지만 하나는 끝내 바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헤어질 결심>에서 경찰이 찾아낸 휴대폰이 생각났다.

일은 벌어졌고 한 대라도 살렸으니 다행이라고 마음 추스르면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대학생 아들과 여행을 떠나는 목적 0순위가 '힐링'이었으니 실수를 꼬투리 잡아 집착하는 일은 어리석었다. 첫날부터 핵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두 번째 날은 엘니도로 향했다. 10명을 채우기 위해 호텔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손님을 태웠다. AJIJA PARADAIS 호텔은 수영장과 카페가 한눈에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다. 돌아올 때는 이곳에서 머물자고 아들과 눈짓을 주고 받았다.

공정하게 여행하려면 현지의 소탈한 숙소에서 머물면서 현지인과 자주 접촉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동물 사랑을 실천하고 쓰레기를 덜 만드는 일이 공정여행의 핵심이다. 우리가 정한 최대의 호텔 호사는 3성급 정도였다. 코롱코롱 비치에 자리를 잡은 라임 호텔은 기대 이상이었다. 스카이라운지의 화덕피자는 풍미가 있었고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되는 노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엘니도의 비경을 묶은 단독투어를 제안받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비용이 예산을 넘겼기 때문이다. 아들은 투어비를 내게 송금하면서 보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일은 만살라잇으로 등산도 가고 낙판 비치도 가잔다. 여행의 단맛이었다. 찾아가는 식당마다 맛집이다.
 
24살 아들과 떠난 엘니도 여행은 모자 사이를 살뜰하게 붙들어주었다.
 24살 아들과 떠난 엘니도 여행은 모자 사이를 살뜰하게 붙들어주었다.
ⓒ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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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이가 만든 동선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플랜 B, 플랜 C를 복안으로 갖고 있어서 이러이러하다고 말하면 유연하게 동선을 고친다. 휴대폰을 바다에 빠뜨린 일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도리어 그 생각을 하면서 깔깔댈 수 있었다.

만살라잇 등산 가이드는 말수가 적었다. 그래도 한국에 가봤다는 말을 수줍게 하더니 너무 물가가 비싸서 한국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악덕 업주에게 월급을 떼었단 말을 듣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산했다. 정비가 안 되어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일단 정상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전망이 펼쳐져서 호연지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낙판비치도 쌍둥이 비치도 까마득하게 보인다. 낙판비치는 거짓말 보태지 않고 하와이보다 더 좋았다. 한 가지 빠지는 게 있다면 현지인들의 열악한 삶이다. 하와이는 여행자와 거주민이 동등한 관계지만 이곳은 여행자가 돈으로 거주민들을 부린다. 동남아 여행의 불편함은 거기에 원인이 있다. 그릴 스퀴드와 큐브 비프 스테이크의 맛이 혀에 살살 녹아도 진주 액세서리나 바나나를 들고 행상을 하는 아이들을 보는 일은 괴롭다.

쓴맛, 단맛 다음에는 홀가분이었다. 세 번째 날 호핑투어를 함께 한 일행과 뒤풀이를 했다. 스몰라군, 히든 비치, 시크릿 비치, 카트라우의 풍광에 홀려버렸다. 시크릿 비치로 들어갈 때 한창 학교 다닐 꼬마가 내 손을 꼭 잡고 수영을 돕는다.

어른인 나는 스노쿨링 장비가 짱짱한데 꼬마의 장비는 허술하다. 마음이 짜르륵 아파왔다. 팁과 함께 한국에서 사 간 스노쿨링 장비를 선물로 주었다. 서로 찍은 사진을 나누기 위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아들과 나는 처음으로 헤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눈이 번쩍할 정도의 비경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구경은 드라마틱한 여행 경험을 줄줄이 쏟아놓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들은 지금 혼자서 뭐를 할까? 싶어 2차를 가야 하는 자리에서 홀로 빠져나왔다.

언제 아들 손을 놓을 거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호텔로 돌아오니 아들도 혼자만의 시간을 낭만적으로 즐기고 왔다고 좋아한다. 당연한 일이다. 여행 경험이 남에게 뒤지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여행지에 갈 때마다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 나와 달리 아들은 뭐든지 물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여행은 성공했다. 쓴맛, 단맛, 그리고 홀로서기를 선물 받았다. 돌아가는 날 봐뒀던 호텔을 예약했다면서 메일을 보여준다. 고된 여행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호사로운 여행은 도리어 금방 잊는다고 하지만 이번 여행은 예외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구동성으로 우린 말했다.

24살 아들과 떠난 엘니도 여행은 모자 사이를 살뜰하게 붙들어주었다. 더불어 이젠 그 손길을 놓고 훨훨 날아가도록 해야겠다는 다짐도 안겨줬다. 엘니도는 그래서 특별하다.

태그:#엘니도, #팔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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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잡고 배낭여행을 다니는 뚜벅이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아이들로 자라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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