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KB국민은행 본점.
 KB국민은행 본점.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제가 KB국민은행에 가지 않았다면 이런 피해를 당할 일이 있었을까요?"

27개월 된 아이를 양육 중인 전업주부 정 아무개(37)씨는 홍콩H지수(HSCEI) 주가연계증권(ELS) 만기를 앞두고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하던 은행원이 "세상이 망하지 않는 한 절대 손실을 볼 수 없다"고 부추겨 맡긴 전 재산을 상당수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KB국민은행 홍콩H지수 ELS 가입 과정을 상세히 털어놨다. 정씨는 "20대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지하상가 음식점에서 서빙 일을 했다"며 "당시 위암 말기였던,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무릎 연골이 닳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어 "친구들은 젊은 나이에 학교생활 하면서 꽃다운 시기를 즐겁게 보냈지만, 저는 햇빛도 없는 곳에서 365일 일하며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어렵사리 모은 돈은 국민은행의 예·적금 상품으로만 관리해왔다. 정씨는 "잔돈 교환, 통장 정리 같은 업무로 은행을 자주 방문했는데, 이익이 되지 않는 업무를 보니 대부분 은행원들은 탐탁지 않아 하며 싫은 티를 내기도 했다"고 했다. 

"동생이 지하에서 고생하는데..." 살갑게 다가온 은행원의 배신
 
오랜 기간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해온 KB국민은행 A 과장은 지난 2020년 말에도 주가연계증권(ELS) 등 고위험 상품 투자를 권유했다. 전업주부 정아무개(37)씨는 계속된 권유에 2021년 초 홍콩H지수(HSCEI) ELS에 모두 1억2000만원을 투자했다.
 오랜 기간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해온 KB국민은행 A 과장은 지난 2020년 말에도 주가연계증권(ELS) 등 고위험 상품 투자를 권유했다. 전업주부 정아무개(37)씨는 계속된 권유에 2021년 초 홍콩H지수(HSCEI) ELS에 모두 1억2000만원을 투자했다.
ⓒ 조선혜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KB 국민은행 VIP 라운지 직원인 A 과장은 달랐다. 정씨는 "이익이 되는 업무를 보지 않아도, 이런 저런 사회생활 이야기 등을 하면서 저에게 매우 친절하고, 친밀하게 다가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자신의 가족·건강·회사 생활 이야기 등을 풀어놓으며 살갑게 다가온 A 과장은 요구하지 않은 결혼 축의금을 임의로 송금하기도 했다. 

정씨는 "지난 2018년 결혼 당시 청첩장을 주지도 않았고, 계좌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국민은행의 제 계좌로 축의금을 보낸 것"이라며 "또 저희 아버지의 암 투병에 공감하면서 '동생이 이렇게 지하에서 고생하는데, 언니가 500만원을 5000만원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며 현혹했다"고 말했다. 

A 과장이 본색을 드러낸 시점은 정씨의 예·적금상품 만기 때였다. 정씨는 "저는 금융 관련 지식도 없고, 투자 경험도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운 일반 저축을 하고 싶었다"며 "그런데 A 과장이 '안전하고, 이자율도 높은 ELS가 있으니 가입해보라'고 권유했다"고 했다. 

자산이 많지 않았던 정씨를 VIP 고객으로 상향시킨 뒤 VIP실에서 상담을 진행한 A 과장은 투자성향이 '고위험'으로 나올 수 있도록 '모범답안'을 알려주기도 했다. 정씨는 "투자성향이 '고위험'이어야 ELS에 가입할 수 있다면서, 제 앞에서 지켜보며 '평소 성향과 반대로 표시하면 된다'고 알려줬다"고 밝혔다.   

그렇게 지난 2021년 A 과장의 권유에 못 이긴 정씨는 수익률 연 3%대의 홍콩H지수 ELS 4개 상품에 가입, 모두 1억2000만원을 맡겼다. 다른 은행에 있던 예·적금과 남편 명의의 예·적금까지 모두 한데 모은 전 재산이었다. 정씨가 가입한 상품들은 오는 3월부터 만기가 도래하는데, 현 금융시장 상황에 비춰보면 원금 손실은 불가피하다. 

"적금 원했는데... '투자성향 평소와 반대로 표시하라' 알려줘"
 
오랜 기간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해온 KB국민은행 A과장은 지난 2020년 말에도 주가연계증권(ELS) 등 고위험 상품 투자를 권유했다. 전업주부 정아무개(37)씨는 계속된 권유에 2021년 초 홍콩H지수(HSCEI) ELS에 모두 1억2000만원을 투자했다. 투자 이후에도 A씨는 정씨의 예·적금 상품 만기 때마다 친근하게 연락해왔다.
 오랜 기간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해온 KB국민은행 A과장은 지난 2020년 말에도 주가연계증권(ELS) 등 고위험 상품 투자를 권유했다. 전업주부 정아무개(37)씨는 계속된 권유에 2021년 초 홍콩H지수(HSCEI) ELS에 모두 1억2000만원을 투자했다. 투자 이후에도 A씨는 정씨의 예·적금 상품 만기 때마다 친근하게 연락해왔다.
ⓒ 조선혜

관련사진보기

 
정씨는 "A 과장이 보여준 파생상품 중에는 금리가 더 높은 상품도 있었지만, 저는 더 낮은 금리의 상품에 가입했다"며 "제 투자성향이 '고위험'이었다면, 금리가 더 높은 상품에 가입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콩H지수 ELS는 홍콩거래소 상장 기업 중 50개 우량 기업의 시가총액을 가중 평균해 산출한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발행하는 투자 상품으로, 기초자산 움직임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된다. 지수가 만기 때까지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원금과 미리 약속한 수익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상품이지만, 정씨가 가입한 상품의 경우 이미 '녹인(Knock-in)'이 발생했다. 지수가 가입 당시 기준 가격의 50% 미만으로 하락했다는 얘기다. 

2021년 초 1만2000포인트대였던 홍콩H지수는 현재 5400포인트대로 내려앉았는데, 시장에선 지수 급등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금융권의 홍콩 H지수 ELS 총 판매 잔액은 19조3000억원이며, 이 가운데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규모는 전체 잔액의 79.6%인 15조4000억원이다. 정씨를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가 모두 수조원대의 피해를 떠안을 가능성이 큰 상황인 것. 

녹인 발생 뒤 불안감을 표했던 정씨에게 A 과장은 "앞으로 전망이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남긴 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씨는 "본인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금융지식이 부족한 저를 이용했던 것"이라며 "이후 휴대전화 등으로 연락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의 말이다. 

"안정제 없이 생활 불가능, 가정도 위태로워져"
 
"저는 따로 소득이 없는, 그저 한 가정의 전업주부이자,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는 판매하기 어려운 상품이라는데, 저는 최근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은행원이 오랜 친분으로 제 개인 연락처, 계좌 등을 마음대로 들여다보면서 결국 거액의 사기를 쳤고, 그런 사기 행위에 제가 당했다는 것에 분통이 터지고 피눈물이 납니다. 

저는 ELS 사태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안정제가 없으면 육아도, 가정도 돌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또한 저의 남편도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 탈모가 생겼으며, 저희 가정은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정씨는 "당시 예금 금리가 1~2%대였는데, 제가 가입한 상품은 모두 3%대였다"면서 "누가 10만~20만원 더 벌자고 원금 수천만원을 날리겠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당국에서 ELS라는 고위험 상품을 은행 일반 창구에서 판매 가능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크다"고 했다. 

억울한 마음에 정씨는 금융감독원을 찾았지만, 당국은 은행이 답변을 대신하도록 했다. "투자로 인한 손실 발생 시 그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다"는 것이 골자였다. 

정씨는 "가입 당시 자필 서명·녹음 때 A 과장이 '네, 라고 답하면 된다' , '형식적인 것'이라고 말해 그대로 했을 뿐인데, (고위험 성향임을) 다 확인했다는 답변서가 왔다"며 "정말 파생상품을 잘 아는 고위험 성향이라면, 한 달 간격으로 동일한 지수를 추종하는 상품 여러 개에 가입했겠나"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자필 설명' 지켰다면 가입 안 했을 것...금감원도 책임져야"
 
홍콩H지수 연계 ELS(주가연계증권)에서 내년 상반기 대규모 손실 가능성이 불거진 가운데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홍콩지수 ELS 피해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 홍콩지수 ELS 피해자 집회 홍콩H지수 연계 ELS(주가연계증권)에서 내년 상반기 대규모 손실 가능성이 불거진 가운데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홍콩지수 ELS 피해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홍콩H지수 ELS를 판매한 시중은행들이 설명의무 등이 강화된 법령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대규모 불완전판매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상임대표는 "지난 2020년 자본시장법 시행령 등 개정으로 파생상품 판매와 관련한 녹취·숙려제도와 설명의무 등 절차가 강화했지만, 그 어떤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정황이 속속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강화된 법령에서는 투자자에게 자필 서명뿐 아니라 '원금 손실에 대해 이해했다' 등을 직접 쓰도록 하고 있다"며 "이런 과정을 제대로 거쳤다면 원금 보호를 원하는 투자자들은 홍콩H지수 ELS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2019년 DLF(파생결합펀드) 등 사모펀드 사태 이후 금감원은 은행들의 고위험 상품 판매를 수시 점검하겠다고 했는데, 이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고위험 상품 판매를 허용한 감독당국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KB국민은행은 말을 아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판매 절차를 준수해 ELS 상품을 판매했다"며 "더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금감원은 지난 8일부터 해당 상품의 주요 판매처인 KB국민·신한·하나·NH농협·SC제일은행과 한국투자·미래에셋·삼성·KB·NH투자·키움·신한투자증권에 대한 현장 검사를 실시 중이다. 

당국은 사전 조사에서 홍콩H지수 ELS 최대 판매사인 KB국민은행이 지수의 위험이 증가할 경우 판매 한도를 감축한다는 자체 기준을 준수하지 않았음을 포착했다. 또 승진이나 성과급 책정에 반영되는 핵심성과지표(KPI) 배점에 수익률이 높은 고위험 ELS 상품 실적을 포함해 ELS 판매 확대를 유도한 사실도 확인했다. 

태그:#홍콩ELS, #ELS, #KB국민은행, #금융감독원, #금감원
댓글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