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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서울 선릉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27·필명)씨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선릉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27·필명)씨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복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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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5월 22일 새벽, 부산 서면 한 오피스텔로 귀가하던 여성이 공동현관 앞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돌려차기로 뒤통수를 가격당했다. 피해자는 직접 피해 사실을 공론화했고 가해자는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동안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로 불린 피해자는 이제 '진주'라는 필명으로 쓴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사건 당일부터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1년 4개월간 있었던 일을 담은 책(제목 미정)이다.

"머리를 맞고 이틀 만에 의식을 찾았지만 뇌를 다쳐 오른쪽 다리가 마비됐어요. 그런데 곧 기적이 찾아왔어요. 그해 6월 7일 마법같이 마비가 풀린 거예요. '진주'라는 필명은 제가 다시 태어난 6월의 탄생석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진주가 조개 체내의 이물질을 막기 위한 무기질 덩어리라니, 재판을 거치며 피해 경험을 공론화한 제 상황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김진주'라는 이름을 계속 쓸 거예요."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피해자 김진주(27·필명)씨는 지난 15일 서울 선릉역 인근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비슷한 처지의 범죄 피해자들을 만나며 알게 된 어려움과 문제들을 책으로 펴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제가) 직접 겪은 범죄 피해가 다른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예방주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진주씨는 인터뷰 내내 "피해자 관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책에는 "피해자"라는 단어가 400번 넘게 등장한다. 그는 "범죄 피해 경험뿐 아니라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형사사법 절차의 문제점을 책에서 짚었다"며 "시간을 투자하고 언론에 알린다고 해서 바로 피해가 바로 구제되기 어렵다는 점을 피해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김진주씨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돌려차기'로 축약할 수 없는 시간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필명)씨가 지난 6월 개설한 유튜브 채널 '피해자를구하자'에 올라온 영상 '안녕하세요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입니다' 일부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필명)씨가 지난 6월 개설한 유튜브 채널 '피해자를구하자'에 올라온 영상 '안녕하세요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입니다' 일부
ⓒ 피해자를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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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나요?

"재판을 거치면서 다른 범죄 피해자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가 겪은 일이 모든 범죄 피해자에게 만연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건이 터지고 피해가 발생해야 정부가 예방책을 찾기 시작한다든지, 사법 체계의 불편함이라든지. 그런데 피해자들은 대부분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위치에 놓여 있잖아요. 기적적으로 회복한 저는 거기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책도 그런 이유에서 쓰게 된 거고요."

- 어떤 어려움을 겪으셨나요?

"범죄 피해의 실질적 당사자인데도 형사재판 수사 기록과 증거 열람을 거절당했어요. 손쉽게 자료를 받아본 피해자를 단 한 명도 못 봤어요. 수사기관과 법원 어디에도 피해자의 진술권과 알 권리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요. 저 같은 경우는 범죄 피해가 발생하고 1년 동안 어떤 피해자 지원센터와도 연계되지 못했어요. 범죄 피해자 구조금을 받으려고 해도 복잡한 신청 절차랑 서류 발급을 거쳐 직접 피해 사실을 소명해야 했고요."

- 직접 나서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겠어요.

"범죄 피해자들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있어요. 사람들을 만나는 게 꺼려질 수밖에 없는데, 여전히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사법 체계에 직접 증명해야 해요. 피해자에 대한 국가기관의 이해도가 정말 떨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죠."

-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요?

"제 범죄 피해 경험과 다른 피해자분들의 이야기, 그리고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형사사법 절차의 문제점을 적었어요. 다른 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예방주사 같은 책이기도 해요. 피해자가 공론화를 원한다고 해도 막상 타인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게 쉽지만은 않거든요. 바로 언론에 알려져도 피해가 구제되는 것 또한 아니고요. 그런 공론화의 어려움 역시 피해자분들이 미리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썼어요."

- 범죄 피해를 겪은 뒤 어땠어요?

"모르는 남성에게 맞은 것도 그렇고, 뇌신경을 다쳐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상황도 그렇고, 주변에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무차별 범죄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알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게 힘들고 난해했던 것 같아요."

- 다리 마비는 어떤 상태였나요?

"두 달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지난해 6월 7일 정말 갑자기 마비가 풀렸어요. 다리를 다 움직인 건 아니고 발가락부터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영구적인 장애를 얻을 거란 소견서로 기존의 '상해'가 '중상해'로 바뀐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주치의 선생님도 '이건 기적이다'라면서 감탄하셨어요."

- 필명은 왜 진주라고 붙이신 거예요?

"마비가 풀린 6월의 탄생석을 찾아봤는데 진주더라고요. 조개 체내의 이물질을 막기 위한 무기질 덩어리라니, 재판을 거치며 피해 경험을 공론화한 제 상황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김진주'라는 이름을 계속 쓸 거예요."

- 처음 법정에 들어갈 땐 어땠나요?

"거침없고 후회 없었어요. 법정 안에 제 편이 없다는 느낌이 드니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저는 재판의 당사자이고 잘못한 게 없으니 망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 가해자에게 20년형이 확정된 이후는 어땠나요?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어요. (1심 12년형에서) 딱 늘어난 형량만큼 생명을 연장받은 느낌이었어요. 형을 확정받은 가해자가 구치소에서 노골적으로 보복을 예고했잖아요. 지금도 불안하고 두려워요. 무엇보다 피해자가 겨우 애써야 문제를 알릴 수 있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어요."

피해자가 피해자를 돕기까지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가 지난 10월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가림막 뒤에서 진술하고 있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가 지난 10월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가림막 뒤에서 진술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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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수사의 공백을 메우는 건 오롯이 진주씨의 몫이었다. 1심 공판에서 CCTV(폐쇄회로TV)를 보고 '7분의 사각지대'를 알게 된 그는 해당 CCTV 원본을 직접 확보해 언론사에 제보했다.

이후 사건이 알려지면서 진주씨가 입었던 바지 안쪽에 가해자의 디엔에이(DNA)가 검출되는 등 추가 증거가 드러났다. 애초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가해자는 새로운 증거 덕분에 2심과 대법원에서 강간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20년을 확정받았다. 진주씨가 직접 입증해 낸 결과였다.

- 다른 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연대 활동에 나선 계기가 있나요?

"저는 극과 극을 모두 체험한 사람이에요. 엄청난 부상과 마비로 장애 소견을 받았을 때와 기적적으로 회복했을 때, 언론의 관심을 받았을 때와 받지 못할 때. 이렇게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경험했죠.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를 돕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는 물론 쉽지 않지만, 그게 결국 제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진주씨의 경험이 바탕이 된 거네요?

"그렇죠. 이렇게 활동이 길고 넓게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사실 외롭고 억울했던 것 같아요. 제 주변 사람이, 가족과 친구가 비슷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하고 싶었거든요. 한 사람이 이런 힘든 일들을 다 겪었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은 다른 피해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제가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 중이라고 들었어요.

"범죄 피해자의 소통 창구가 필요했거든요. 지난해 9월부터 제 범죄 피해 경험과 재판 과정을 공유하고 있는데, 다른 피해자들로부터 디엠(DM, 다이렉트 메시지)이 많이 와요. 그분들이 겪은 범죄의 특성이나 시사점을 파악한 뒤에 도움이 될 만한 지원 제도를 소개하거나 언론사 제보를 돕고 있어요. 피해자 가족과 소통하면서 당사자의 감정선을 곱씹어 보기도 하고요."

- 유튜브랑 온라인 카페도 개설하셨어요.

"유튜브로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 변호사 선임 방법 등 범죄 피해자와 가족이 알아야 할 정보들을 영상으로 제작하고 있어요. 온라인 카페에는 저를 포함해 10명이 스태프로 활동 중인데 범죄 피해 당사자가 아닌 시민들도 함께하고 있어요. 범죄 피해자들과 시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되었으면 해요."

"우리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필명)씨가 지난 7월 개설한 온라인 카페 '대한민국 범죄 피해자 커뮤니티(KCC·KOREA CRIME VICTIM COMMUNITY)'. 회원 230여 명으로 구성된 카페에는 현재 진주씨를 비롯한 10명이 스태프로 활동 중이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필명)씨가 지난 7월 개설한 온라인 카페 '대한민국 범죄 피해자 커뮤니티(KCC·KOREA CRIME VICTIM COMMUNITY)'. 회원 230여 명으로 구성된 카페에는 현재 진주씨를 비롯한 10명이 스태프로 활동 중이다.
ⓒ K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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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씨는 이후 '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 '바리캉 폭행 사건', '강화도 유기 사건' 피해자 가족과 만나 '범죄피해자연대'라는 모임을 꾸렸다. 이들은 주요 사건 공판에 참여하는 등 서로의 곁을 지켰고, 피해자 관련 법 개정 활동에도 힘썼다. 진주씨의 노션(Notion, 협업 소프트웨어) 페이지에는 이러한 연대 활동으로 알게 된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의 문제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 법무부에는 어떤 것들을 요구했나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까이 오면 알람이 울리는 양방향 알림 스마트워치, 피해자 재판 기록 열람·등사권, 범죄와 관련 없는 양형기준 폐지 등을 요구했어요. 범죄 피해자가 숨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이들이 언론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사법 체계가 먼저 갖춰져야 하잖아요. 국가기관이 자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피해자의 권리를 제약하는 기존의 추상적인 기준들을 없애달라고 요청한 거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범죄 피해자 온라인 서비스 매뉴얼'을 제작해 법무부에 전달할 계획이에요."

- 사건의 공론화가 진주씨에게 남긴 게 있다면요?

"개인적으로는 별로 얻을 게 없었어요. 외롭고 험난한 싸움인 만큼 주변에도 권하고 싶지 않고요. 제가 돌려차기 사건의 공론화를 견뎌낸 이유는 하나예요.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다른 범죄 피해자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이번에 쓴 책도 마찬가지예요. 전문가와 시민들이 범죄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제도의 변화를 감시하는 시작점이 되길 바라고 있어요."

- 책이 시작점이라면, 다음 목표는 뭔가요?

"온라인 범죄 피해 교육 플랫폼과 인식 제고를 위한 브랜드를 만드는 거예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스토킹, 성폭행 등 분야별 범죄 피해 예방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게 목표예요. 엑스(X) 모양 브랜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범죄 피해자에게 '괜찮냐'고 묻지 말고, 범죄 피해 사건을 기억 속에 묻어두지 말라는 거예요. 범죄 피해자들이 온라인에서 브랜드를 접한 뒤 오프라인으로 나올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숨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 앞으로도 신상은 공개하지 않을 건가요?

"아마도요. 신상이 밝혀지는 게 무섭다기보단, 제 행복을 찾기 위한 마지막 최전선인 것 같아요. 제 얼굴과 이름과 직업을 아는 사람들이 저한테 인사를 하면, 제 성범죄 피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제 자신이 불행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도우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수심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빛나는 진주로 남고 싶어요."

아직 법적 절차는 끝나지 않았다. 검찰은 가해자가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보복하겠다고 협박한 혐의를 수사 중이다. 진주씨가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민사소송도 남아 있다. 진주씨는 자기 자신과 다른 범죄 피해자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불행한 사람이 범죄 피해의 고통을 겪는 게 아니에요. 그건 상처가 생겼을 때 구급함을 쓰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흔한 증상이에요. 피해자들의 삶이 소중하고 가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요."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필명)씨의 옷에 부착된 엑스(X) 모양 뱃지 '돈에스크(Donask)'.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제고를 위해 진주씨가 직접 고안한 브랜드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김진주(필명)씨의 옷에 부착된 엑스(X) 모양 뱃지 '돈에스크(Donask)'.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제고를 위해 진주씨가 직접 고안한 브랜드다.
ⓒ 김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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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부산돌려차기, #김진주, #피해자를구하자, #KCC,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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