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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이 왔다. 처제가 셋째 아이 돌잔치를 한단다. 가겠다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지 돌잔치 장소를 검색했다. 아, 계단이다. 그래도 혹시나 다른 통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식당에 전화했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나요?"
"그럼요, 같이 오시는 분이 휠체어를 들거나 손님을 업어주시면 돼요. 그렇게들 오십니다."


고민 끝에 돌잔치 전날, 동서에게 전화했다.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계단 때문에 갈 수 없다고. 그랬더니 "형님, 제가 업어드리면 되잖아요, 오세요." 식당 주인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결국, 나는 모두를 위해 가지 않았다. 내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 불편할지라도 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높은 계단을 앞에 두고 휠체어가 멈춰 선 모습 (자료사진,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높은 계단을 앞에 두고 휠체어가 멈춰 선 모습 (자료사진,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은평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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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우리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타인을 규정하고 대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테네 인근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악인이 있었다. 그는 여행객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했다. '우리 집에는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잘 맞는 침대가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십시오'라고. 그는 침대보다 더 큰 사람이 오면 침대의 크기에 맞추어 다리를 잘랐다. 그리고 침대의 크기보다 작은 여행객은 다리를 늘렸다.

"형님, 제가 업어드리면 되잖아요, 오세요"는 선의의 잔인한 초대다. 내 이야기가 지워지고 왜곡되며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당연시되는 세상의 기준에 대한 숙고 없이는, 나에게 익숙해서 편안한 그 무엇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침묵하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삶

내가 사는 아파트의 장애인 주차장은 택배 차량과 배달 오토바이가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상습적으로 주차되어 있곤 한다. 그럴 때,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가 그들이 떠난 후에 주차할 때가 많다. "여기는 장애인 주차장입니다"라고 말하는 데에도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루 이틀이 아니라 10년, 20년 동안 해온 나로서는 지치는 일이다. 그래서 침묵하곤 한다.

그런데 침묵이 강요될 때도 있다. 아마도 5년 전쯤, 친구들과 함께 부산 해운대에 있는 뮤지컬 공연장에 갔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뮤지컬을 관람하기 위해. 로비에서 저녁밥을 김밥으로 대신하고 서둘러 입장했다. 우리 자리는, 세로의 가운뎃줄과 가로의 4번째 줄 정도에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공연장 안내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목발 (자료사진,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목발 (자료사진,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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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목발을 보관하겠습니다."
"네? 내 목발을요?"
"네"
"왜요?"
"시끄럽거나 넘어질 수 있는 물건은 공연에 방해가 될 수 있어서, 그런 물품은 우리가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 목발은 제가 책임지고 잘 가지고 있겠습니다."
"규정상 저희가 보관해야 합니다."
"……"


대화는 공허했다. 규정이 그렇단다. 규정이 나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친구들의 즐거운 기분을 망칠 수도 없었다. 나는 목발이 내 곁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마음이 쓰였다. 1막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목발을 찾아 제일 뒤에 마련된 장애인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 안내원이 2막이 시작하기 직전에 또 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같은 이유로 목발을 빼앗겼고, 침묵했다.

예민하게, 까다롭게, 내 말 하며 사는 삶

버지니아 울프는 1931년 1월 21일 여성참여협회에서 '여성의 전문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울프는 어떤 남자가 쓴 소설을 비평하려고 펜을 쥐자마자, 천사가 자신의 등 뒤에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호의를 베푸세요. 부드럽게 대하세요. 듣기 좋은 말을 해주세요. 기만하세요. 당신이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세요.
 
아, 늘 내 안에서 들리던 그 소리다. 문제를 제기하고 내 의견을 말하고 나면 나를 불편하게 했던 천사의 그림자 말이다. 그 불편함과 대면하지 않고 내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천사의 그림자를 없애지 않고 내 삶에서 후회를 밀어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침묵이 내 삶을 보장해 준 적은 없다. 나를 드러내 내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밴댕이 소갈딱지로 불리는 한이 있더라도 예민하게, 까다롭게, 내 말을 하며 사는 삶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태그:#밴댕이소갈딱지, #울프, #장애, #천사, #내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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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육 교사이며,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휠체어를 탑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을 글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장애를 겪으며 사는 내 삶과 교육 현장을 연결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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