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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The) 인천'을 더(More) 알아가다. 인천 곳곳에 깃든 인천 사람 저마다의 삶과 기억, 숨은 이야기를 찾아 기록한다. 이번 호에는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오늘을 달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도시를 누비며 우리를 이어주는 '이동 노동자'다. 때 되면 밥 먹고, 지치면 쉬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엠마오'는 길 위의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언제라도 기대어 쉴 수 있는 안식처다. 인천도 이달, 생활물류 쉼터를 시작으로 이동 노동자를 위한 쉼터를 하나둘 연다. 길 위에도, 사람이 있다. 이 거대한 세상을 움직이는 건, 드러나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다. 함께라는 힘, 내일을 여는 희망이, 오늘도 인천을 달리게 한다.[편집자말]
택배 기사 정환흠·정미순 씨 부부. 탑차에 꿈을 싣고 오늘도 내일로 달린다.
 택배 기사 정환흠·정미순 씨 부부. 탑차에 꿈을 싣고 오늘도 내일로 달린다.
ⓒ 임학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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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에서 내쳐져 외롭게 서 있다. 앞에 보이는 건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린 짧은 철로뿐이다." - <더 로드: 길 위의 삶, 호보 이야기> 중에서.

<더 로드>의 저자 잭 런던(Jack London)은 호보(Hobo), 떠돌이 노동자였다. 열여덟 나이에 화물열차에 몸을 싣고 고향 캘리포니아를 떠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정해진 길은 없었다. 금 채굴꾼이자 원양어선을 타는 뱃사람, 종군기자로도 살아갔다. 대공황 시대, 법과 사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은 고단하고 때로 가혹했다.

이동 노동자들은 현대판 호보들이다. 거리가 곧 그들의 일터다. 배달원, 대리운전 기사, 요양보호사, 방문 판매원, 장비와 설비 설치 및 수리 기사, 수도·가스 검침원 등 수많은 사람이 묵묵히 뒤에서 우리 일상을 움직인다.

2022년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 인구 조사 근로 형태별 부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특수 형태 근로 종사자의 수는 56만 명에 이른다. 이동 노동자 대부분이 특수고용 노동자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노동 관련 법의 보호 밖에 있다.

종일 움직여야 하는 고단한 몸을 잠시나마 누일 곳도 없다.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가 이동 노동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데 따르면, 업무 중 대기 장소로 도로변이 51.5%로 가장 많고 편의점과 음식점, 공원, 공터 등이 뒤를 이었다. 추워도 더워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길에서 일하고 먹고 쉬며 온종일 머문다. 갈 곳이 없다.

지난 6월,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가 부평구 십정동에 문을 연 엠마오(Emmaus)는 이동 노동자들을 위한 안식처다. 인천시도 고마운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이동 노동자 쉼터 조성을 위한 조례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이달 남동구 구월동에 첫 '생활물류 쉼터'를 열고, 내년부터 2028년까지 매년 두 곳씩 모두 열 곳의 이동 노동자 쉼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배달 라이더 김민규씨. 내일은 또 어떤 길이 펼쳐질 것인가, 기대감을 안고 오늘도 삶의 한복판을 달린다.
 배달 라이더 김민규씨. 내일은 또 어떤 길이 펼쳐질 것인가, 기대감을 안고 오늘도 삶의 한복판을 달린다.
ⓒ 임학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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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엠마오에서 휴식을 취하는 김민규씨.
 쉼터 엠마오에서 휴식을 취하는 김민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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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별점 ★★★★★

"나는 배달 라이더다. 내 노동의 가치는 '건당'으로 계산된다. 빨리빨리 달릴수록 돈이 된다. 배달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별점 테러'를 당하기 일쑤다. 하나 나는 조금 느려도 돈을 덜 벌어도 안전하기를 택했다.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음식을 전해 주는 일이 아닌가. 자부심을 느낀다. 내 인생은 별점 최고점이다."

김민규(36)씨는 대학 시절 피자 배달 일을 시작했다. 인하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경북 의성군에서 인천으로 와 학비를 벌기 위해 처음 거리로 나섰다. 당시 20분 만에 배달하지 못하면 음식값을 물어줘야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근무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건당 수수료가 떨어지면서 분초를 다투는 배달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라이더가 법정 최저 임금을 벌려면 1시간에 최소 3건 이상은 배달해야 한다. '살아내기 위해'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간혹 곡예 운전을 하며 모두를 위험으로 내모는 동료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겁다. 돈과 목숨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날카로운 한여름 뙤약볕 아래 한 조각 가로수 그늘이 얼마나 소중한지, 길 위의 인생은 안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운전대를 잡는 사람들이다. 길 위로 출근해 끼니를 때우고 잠시 쉬는 순간마저 길가와 편의점, 공원과 공터를 전전해야만 한다. 잠시나마 시동을 끄고 한숨 돌릴 쉼터가 절실했다. 엠마오를 시작으로, 인천시에 이동 노동자 쉼터가 하나둘 품을 연다니 다행스럽다.

세상의 잣대와 조금 다른 삶을 선택했지만, 후회는 없다.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이 펼쳐질 것인가. 기대감을 안고 오늘도, 삶의 한복판을 달린다.
 
요양보호사 김애순씨. 길 위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는 혼자다.
 요양보호사 김애순씨. 길 위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는 혼자다.
ⓒ 임학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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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떠올리면 외롭지 않다.
 하나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떠올리면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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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마저 기댈 수 있는 사람

"나는 요양보호사다. 아줌마도, 파출부도 아닌 요양보호사. 귀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누구나, 아무나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나는 존중받지 못할 때가 많다. 가끔은 서러움에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그럴 때면 가족보다 나를 의지하고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떠올린다. 그분들이 내 삶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김애순(62)씨는 나라가 인정한 첫 요양보호사다. 13년 전 제1회 요양보호사 국가시험에 도전해 당당히 합격하고 요양보호 자격을 취득했다. 그즈음 이혼 도장을 찍으면서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생의 끝을 지키는 국가의 마지막 손길. 요양보호사 일은 그에게 자부심이자 희망이었다.

하나 남의 집 문턱을 넘는 순간 바람과는 전혀 다른 현실과 맞닥뜨렸다. 돌봄 대상자가 엄연히 있는데 온 가족이 당연한 듯 그의 손길을 요구했다. 사람 돌보는 일 말고도 집 안을 쓸고 닦는 가사 노동까지 떠밀었다. 몸이 고된 건 차라리 괜찮다. 여자라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한다며 내려다보는 시선은 아무리 애써 넘기려 해도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길 위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는 혼자다.

"외로워요. 가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직장으로 출근해서 동료들을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곤 해요. 쉼터 엠마오에 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온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아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까지도 기대어 의지하는 그이지만, 정작 자신은 마음 둘 곳이 없다. 돌보는 사람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길 위에의 작은 쉼터가, 고마운 그들 마음에 쉼표 한 점 찍어주기를 바란다.
 
택배 기사 정환흠·정미순씨 부부. 이날 택배물 600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
 택배 기사 정환흠·정미순씨 부부. 이날 택배물 600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
ⓒ 임학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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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라서, ‘길 위의 삶’이 외롭지 않다.
 둘이라서, ‘길 위의 삶’이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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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를 마치고 엠마오에서 휴식을 취하는 정환흠·정미순씨 부부. 쉼터 식구들에게 반가운 택배물을 전해 주기도 한다.
 일과를 마치고 엠마오에서 휴식을 취하는 정환흠·정미순씨 부부. 쉼터 식구들에게 반가운 택배물을 전해 주기도 한다.
ⓒ 임학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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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차에 실은 부부의 꿈

"우리 부부는 택배 기사다. 연애할 때도 남들 다 가는 근사한 데이트 코스 대신 함께 길 위를 달렸다. 바람이라면 땀 흘린 만큼 어제보다 오늘, 내일 조금씩 나아지는 삶, 그리고 내 집 장만하기. '네가 못 배워서 택배 기사나 한다'는 험한 말을 들을 때면 마음 아프지만, 많은 이의 격려로 다시 힘을 얻는다. 탑차에 꿈을 싣고 오늘도 내일로 달린다."

오늘은 화요일, 택배 기사들에겐 일주일 중 가장 바쁜 요일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주문한 택배 물량이 쌓여 쏟아지기 때문이다. 정환흠(42)·정미순(38)씨 부부는 새벽에 집을 나와 오전 7시 물류 터미널에서 물품 분류 작업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종일 부평구 권역을 돌며 택배물 600건을 배송했다. 평소보다 200건 더 많은 물량이다.

오후 8시, 해가 땅 밑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부부는 쉼터 엠마오를 찾았다. 결혼한 지 2년 차, 아내는 연애할 때부터 택배 일하는 남편을 따라 길을 나섰다. '왜 우리는 다른 연인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가.' 아내는 처음엔 남편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며칠 함께 길을 나선 후론 불평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묵묵히 남편의 옆을 지키고 있다.

바삐 움직이던 몸을 멈추니, 일할 때는 몰랐던 하루의 피로가 몰려든다. "이상하지요. 일은 할수록 익숙하고 편해지는 법인데, 몸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들어요." 베테랑 택배 기사에게도 몸 쓰는 일은 언제나 고달프다. 그래도 내 몸 부리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 괜찮다.

깊어가는 가을밤, 고된 일을 마친 부부는 오붓이 단출한 저녁 식사를 하고 곤한 잠에 빠져들 것이다. 열심히 달려온 하루가 그렇게 끝나간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 양성일 신부, 엠마오에서.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 양성일 신부, 엠마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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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춰서 사람을 보다

오늘 노동자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노동자를 위해 사목하는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가 1년 가까이 이동 노동자의 곁에 머물며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쉼터를 짓는 일이었다.

누구나 삶과 일 사이에 '쉼표'를 찍을 순간이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당당히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는 그 뜻을 담아 지난 6월, 부평구 십정동에 이동 노동자 쉼터 엠마오의 문을 열었다.

인천교구 노동사목부 부국장 양성일(47) 신부는 "모든 사람은 소중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 누구에게도 감히 별점을 매길 수는 없어요. 우리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고마운 분들을 쉽게 평가하진 않았는지, 내려다보지는 않았는지 돌아봐 주세요."

엠마오는 부활한 예수가 두 제자를 만나 동행한 곳으로,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이웃들과 두 손을 맞잡고 함께 걷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엠마오가 그 길에 아름다운 첫 번째 발자국을 냈다. 인천시도 이달 생활물류 쉼터를 시작으로 이동 노동자 쉼터를 하나둘 조성하며 발걸음을 맞춘다.

"인천에 노동자의 안식처가 많이 생기고,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사람이 사는 도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따뜻한 도시로 인천이 기억되길 소망합니다."

길 위에도, 사람이 있다. 이 거대한 세상을 움직이는 건,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땀 흘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다.
 
인천의 첫 이동 노동자 쉼터 엠마오.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가 운영한다.
 인천의 첫 이동 노동자 쉼터 엠마오.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부가 운영한다.
ⓒ 임학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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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는 동행, '노동자와 함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엠마오는 동행, '노동자와 함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 임학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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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노동자 쉼터 엠마오
- 주소: 부평구 경인로 671(십정동 481-4) 1층
- 운영 시간: 오전 9시~오후 9시
- 문의: 032-502-3006

※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생활물류 쉼터는 이달 문을 연다.
- 주소: 남동구 성말로 9, 2층 202호
- 문의: 시 물류정책과 032-440-3873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 디렉터
 
더 인천 : 공간과 사람 '이동 노동자 쉼터 엠마오 이야기' 유튜브 섬네일
 더 인천 : 공간과 사람 '이동 노동자 쉼터 엠마오 이야기' 유튜브 섬네일
ⓒ 굿모닝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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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 영상 보기(https://youtu.be/e75NlSsGBcs?si=_wU7w4HUu1noNkhb)

태그:#엠마오, #택배기사, #요양보호사, #배달라이더, #이동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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