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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친구들 범시민연대(아친연대)' 회원들이 3일 오후 강원도 원주 아카데미 극장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극장 보존 활동을 벌인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신우현, 이주성, 윤홍식, 변해원 전 원주영상미디어센터장).
 '아카데미의 친구들 범시민연대(아친연대)' 회원들이 3일 오후 강원도 원주 아카데미 극장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극장 보존 활동을 벌인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신우현, 이주성, 윤홍식, 변해원 전 원주영상미디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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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공간을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지. 여기도 그래. 젊은이들이랑 우리 늙은이들을 묶어주는 곳을 없애버린 거야."

강원도 원주에서 60년을 살아온 윤홍식(66)씨가 무너져내린 4층짜리 극장 터를 올려다봤다. 지난 10월 30일 원주시에 남은 유일한 단관 극장인 '아카데미극장'이 철거될 때, 윤씨는 도시 공통의 역사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주차장이 들어서면 아카데미의 추억을 전혀 알 수 없겠지. 통로 하나, 상영관 하나, 살림집 하나가 딸려 있던 그 보물 같은 곳을 말이야."

한숨을 뱉는 윤씨의 시선이 극장 터에 둘러쳐진 천막 아래로 옮겨갔다. '출입 금지' 딱지가 붙은 철제 가림막이 그곳을 틈 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1983년 당시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아카데미극장 외관
 1983년 당시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아카데미극장 외관
ⓒ 아친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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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아카데미극장 외벽을 포크레인으로 부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카데미극장 외벽은 노란 천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난 10월 30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아카데미극장 외벽을 포크레인으로 부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카데미극장 외벽은 노란 천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 아친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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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극장' 역사 위에 세워지는 주차장

지난 3일 찾은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과 평원동을 가르는 버스정류장 앞 300평(1014㎡) 부지는 무너진 아카데미극장의 잔해물로 겹겹이 싸여 있었다. 아카데미극장은 1963년 개관한 이후 60년간 그 자리를 지켜왔다. 2006년 폐관 이후에도 이북오도민회 사무실로 활용돼 극장 건물은 그대로였다. 2015년까지 다른 4개 극장(원주극장, 시공관, 문화극장, 군인극장)이 모두 철거되고 유일하게 남은 이 단관극장을 원주 시민들은 지키고자 했다.

2016년부터 자발적인 보존 활동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극장 내 시설을 보수하고, 상영회와 전시회를 열고, 포럼을 개최하며 앞으로의 보존 방안을 논의했다. 윤씨가 속한 '사회적협동조합모두'는 2020년부터 원주시와 연계해 아카데미극장의 재생사업을 진행했다. 다시 문을 연 극장은 원주시민이 아니어도 누구나 들어가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원주시의 기조가 '보존'에서 '철거'로 바뀐 건 지난해 7월 원강수 시장이 취임한 이후부터였다. 그해 1월 보존을 전제로 32억 원을 들여 극장을 매입한 원주시는 올해 4월 돌연 입장을 번복했다. "충분한 숙의와 여론조사"를 거치겠다던 원 시장은 4월 11일 브리핑에서 "아카데미극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야외공연장과 주차장을 조성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결국 시민들이 나섰다.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주민 중심으로 지난 2월 '아카데미의 친구들(아친)'을 결성했다. 이후 지역 원로들의 도움을 받아 '아카데미의 친구들 범시민연대(아친연대)'로 규모가 커졌다. 문화연대 등 50여 개 시민단체가 이들과 연대했고, 오픈채팅방에 4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11월 6일 기준). 지난 3일 사회적협동조합모두 사무실에서 만난 조합원 윤씨와 대표 변해원(48)씨도 '아친'으로서 극장 철거 반대에 함께 했다.

"제도적으로 행정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요. 여러 대안과 해법을 제시했지만 원강수 시장은 절대 듣지 않았어요. 4년짜리 나그네가 60년 역사의 건물을 허물어 버린 거죠."

원주시가 서둘러 아카데미극장 철거를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건물 안전진단 D등급을 받아 안전이 우려된다는 것이 원주시의 공식 입장이다. 하지만 아카마데미극장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돼 39억 원 예산을 받을 수 있었다. 극장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정부로부터 유지보수비를 지원받자는 의견도 많았다. 원주시는 이를 모두 거부하고 강제 철거에 착수했다. 그리고 지난 8월부터 석 달간, 민방위 조끼를 입은 공무원들과 용역 인부들, 극장을 지키려는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두 차례 고공농성 끝에 받아든 철거
 
▲ "4년 나그네가 무너뜨린 60년 극장"... 흔들리는 '원주시 민주주의'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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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시는 지역 시민과 영화인들의 아카데미 극장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월 28일부터 극장을 강제 철거했다.
 강원도 원주시는 지역 시민과 영화인들의 아카데미 극장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월 28일부터 극장을 강제 철거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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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을 거예요! 끌어내지 마세요."

극장 4층 옥상 발코니에 올라가 있던 변해원씨가 소리쳤다.

"좀 나오라고, 저기까지!"

안전모를 쓴 인부가 변씨를 끌어내리려 했다. 두 손으로 허리를 움켜잡았으나 변씨는 난간에 몸을 딱 붙인 채 버텼다. 얼마 안 돼 1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변씨는 팔다리를 붙잡혀 극장 아래로 질질 끌려 나갔다.

10월 30일 집단농성은 '전원 연행'으로 끝이 났다. 용역업체에 맞서 항의하던 영화인 등 6명이 연행됐고, 지붕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3명도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경찰은 변씨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업무방해와 건조물 침입을 죄명으로 한 구속영장 신청서가 10월 31일 검찰에 전달됐다.

'수호자'가 없어진 극장을 원주시는 본격적으로 무너뜨렸다. 포클레인에 달린 드릴과 집게가 날마다 천장과 벽면을 후벼팠다. 떨어져 나오는 흙먼지 위로 인부들은 물줄기를 뿌려댔다. 지붕을 걷어내면서 사전에 제거하지 않은 석면이 발견됐지만 원주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철거 발표 이후 불과 6개월여 만에, 아카데미극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철거 관련 문건을 공개하라는 <오마이뉴스>의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원주시는 비공개 결정을 내리고 이의신청도 기각했다).
 
지난 10월 20일 윤홍식씨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첫 고공농성을 시작할 때 아친연대에 보내온 편지와 문자메시지(왼쪽). 윤씨가 파란 종이에 직접 쓴 편지에는 '원강수 시장님께 호소드립니다. 원주시민 모두를 위해 아카데미극장을 보존해주세요'라고 적혀 있다(오른쪽).
 지난 10월 20일 윤홍식씨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첫 고공농성을 시작할 때 아친연대에 보내온 편지와 문자메시지(왼쪽). 윤씨가 파란 종이에 직접 쓴 편지에는 '원강수 시장님께 호소드립니다. 원주시민 모두를 위해 아카데미극장을 보존해주세요'라고 적혀 있다(오른쪽).
ⓒ 아친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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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10월 20일에도 윤씨는 지붕과 천장 사이 트러스에서 침낭 하나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옆구리가 터지고 있는" 아카데미극장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엿새 만인 25일 밤 원주시장과 면담을 조건으로 윤씨는 농성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면담 과정은 철거만큼이나 일방적이었다. 사흘 뒤인 28일 철거는 재개됐고, 변씨를 비롯한 네 사람은 두 번째 고공농성에 나서게 됐다(한 사람은 못에 몸이 쓸려 일찍 내려왔다).

이미 땅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변씨는 9월 20일부터 18일간 원주시청 현관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다가 병원에 이송됐다. 다른 아친들은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기자회견과 1인 시위를 이어갔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시정토론을 통한 숙의와 공정한 여론조사, 모두 원 시장이 취임 이후 약속한 것이었다.

끝내 극장을 지키진 못했지만, 연행된 변씨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탄원서로 모였다. '지역의 작은 단관극장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전국의 영화인과 시민들이 보고 있습니다.' 6시간 만에 3000여 명이 서명을 보탰다. 변씨의 동료 아친들은 온라인과 극장 앞 우체통을 통해 탄원을 조직했고, 시민들은 변씨의 선처를 요청하는 자필 탄원을 보내왔다. 검찰은 11월 1일 새벽 1시께 변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극장이 무너져도, 무너져선 안 되는 것
 
‘아카데미의 친구들 범시민연대(아친연대)' 회원들이 3일 오후 강원도 원주 아카데미 극장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극장 보존 활동을 벌인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변해원 전 원주영상미디어센터장, 이상현, 이주성, 신우현, 윤홍식, 박주환 감독).
 ‘아카데미의 친구들 범시민연대(아친연대)' 회원들이 3일 오후 강원도 원주 아카데미 극장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극장 보존 활동을 벌인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변해원 전 원주영상미디어센터장, 이상현, 이주성, 신우현, 윤홍식, 박주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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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예정인 문화공유플랫폼 내 역사관 마련 등은 의견을 수렴해 반영할 예정이며, 철거 중인 공사의 원점 재논의는 없다.' (10월 28일 원주시 문화예술과 보도자료)

극장을 지키던 이들은 철거된 땅 위에서 "도시의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그곳은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아친연대 60대 회원인 윤씨에게 아카데미극장은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이 동시대성을 경험하고 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는" 60년의 역사를 원주시는 스스로 무너뜨렸다.

원주에서 한평생을 산 20대 회원들에게도 극장 철거는 사뭇 아프게 다가왔다. "원주시의 민주주의가 속절없이 무너졌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사회적협동조합모두 조합원 신우현(25)씨에게 아카데미극장은 "안내판이 없다 보니 어른들의 설명을 들어야만 다닐 수 있는 신기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철거를 목격하니 "시민들이 넘을 수 없는 무자비한 벽"이 느껴졌다.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이상현(24)씨도 "어른들과 얘기하고 싶어서 온 극장에서 내쫓겨 버린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카데미극장은 시민들에게 밀도 높은 경험과 이야기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변씨에게 그곳은 "영사기, 렌즈, 광고 필름, 공구와 사다리 등 당대 영화사와 생활사를 보여줄 수 있는 추억의 장소"였다. 영화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박찬욱, 변영주 등 유명 영화감독들은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아카데미극장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극장은 사라졌지만, 아친들에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이들은 아카데미극장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철거 전 건물의 모습, 손때묻은 상영관과 매표소, 영사기와 영화 포스터 등을 사진으로 모았다. 극장 앞 대치 상황, 포클레인 철거 현장 등은 영상으로 담았다. 아카이빙이 되지 않으면 이 극장이 왜 생겨나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씨와 이씨에게 '앞으로 극장 대신 무엇을 지켜나갈 거냐'고 묻자, 두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철거 과정에서 받은 상처가 아물고 나면, 사람들을 모아서 더 큰 연대를 만들어야겠죠. 아카데미의 추억을 지켜내면서도, 원주시가 민주적 정당성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정당한 요구를 할 겁니다."

이들은 오는 12일 원주문화원에서 아카데미극장까지 시민들과 거리 행진을 벌인다. '시민은 무너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 말은 극장 터를 헐고 부순 이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그곳에서 밀려난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아친연대가 내건 슬로건이다.
  
철거가 진행되던 지난 10월 20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아카데미극장 내 상영관이 허물어져 잔해물과 의자들이 한데 뒤섞여 있다. 1963년 단관극장으로 문을 연 아카데미극장은 개관 6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철거가 진행되던 지난 10월 20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 아카데미극장 내 상영관이 허물어져 잔해물과 의자들이 한데 뒤섞여 있다. 1963년 단관극장으로 문을 연 아카데미극장은 개관 6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 아친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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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시는 지역 시민과 영화인들의 아카데미 극장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월 28일부터 극장을 강제 철거했다.
 강원도 원주시는 지역 시민과 영화인들의 아카데미 극장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월 28일부터 극장을 강제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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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카데미의친구들, #아친연대, #아카데미극장, #원주시,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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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게 보고 듣고 쓰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복건우입니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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