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깊은 시각, 두 명의 간호사가 병동을 지키고 있다. 신참 간호사가 선배 간호사에게 묻는다. 아까 OOO 환자분이 잠 못 주무시겠다고 수면제를 요청하셨다고. 당직 의사에게 알렸지만 부재중이었다는 이야기다. 선배 간호사가 직접 맡아 하겠다며 응급실로 전화를 돌린다.

어렵게 연결된 당직의는 졸피뎀을 처방하라 말한다.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한다고 답하자 저는 다른 일로 바쁘다고 말한다. 바쁘면 이따 편한 시간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니 아예 응급실로 직접 전화를 걸면 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줄 거란다. 요컨대 간호사에게 제 명의로 대리처방하라는 지시다.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 개막작 중 하나인 < 3교대 > 이야기다. 의사에게 처방을 부탁하는 전화를 건 간호사 경희(이지혜 분)는 병실에 입원해 있다. 신참 간호사 수민(윤설 분)은 경희의 부상을 두고 경위서를 써야 하는 입장이다. 수민이 쓴 경위서를 본 당직의는 당장에 달려와서는 수민을 겁박한다. 누구 앞길 막을 일 있느냐고 수민에게 윽박지른다. 수민은 사실대로 쓴 거라며 항변해보지만 씨알도 먹혀들지 않는다. 이들의 다툼을 병실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경희다.
 
영화는 간호사가 다친 사유에 대한 경위서조차 사실대로 쓰지 못하는 수민의 모습, 이로부터 드러나는 병원의 위계, 전날 밤 경희가 다쳐 입원에 이르게 된 이유까지를 추적한다. 18분짜리 짧은 단편 안에 한국 간호사의 현실과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법제도의 문제, 병원이란 공간 안에서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권력관계를 고스란히 내보이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부천노동영화제 개막식

▲ 부천노동영화제 개막식 ⓒ 부천노동영화제

 
경위서를 사실대로 적을 수 없는 이유
 
영화에서 긴장을 자아내는 요소는 결국 경위서다. 조직이 사건의 경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당사자에게 사실 그대로 상세한 경위를 적을 것을 요구하지만, 막상 돌아오는 건 의사의 폭력적 언사다. 간호부장 또한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냐며 다시 써올 것을 요구하고,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간호사는 제 양심을 어겨가며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둔갑시켜야 한다.
 
환자로 나앉은 경희 앞에서 제가 처한 상황을 수긍하기 어렵다고 답답해하는 수민의 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힘에 눌려 이끌리는 사회생활이 그녀에게 자긍심을 안겨줄 리 만무하다. 자긍심 없는 일터가 사람을 지치고 질리게 한다는 걸 모두가 안다.
 
짤막한 영화는 결국 선배인 경희가 수민의 경위서 뒤 몇 문장을 고쳐내는 것으로 갈무리된다. 경위서 뒤엔 아마도 반려되지 않을, 그럼에도 병원의 구성원인 간호사로서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하는 속 깊은 이야기들이 완곡하게 담긴다. 간호노동이 처한 현실 가운데 인간으로, 노동자로 지켜져야만 하는 최소한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와 같은 중한 것을 오로지 기관과 의사와 상급자의 선의에 기대어 구걸하듯 얻어야 한다는 현실이 영화를 보는 이를 무겁게 짓누른다.
 
3교대 스틸컷

▲ 3교대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20년 전 현실과 달라진 게 없다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가 이 작품을 상영한 건 우연이 아니다. 개막식장엔 실제로 간호사로 일하며 병원과 보건소 등 의료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여럿 찾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 외에도 이미 현장을 떠나 다른 직역에 종사하면서도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제가 일하던 십 수 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며, 그것이 오늘과 얼마 달라지지 않았음에 안타까워했다.
 
한 여성은 20년 전 제가 겪었던 상황을 털어놓았다. 신생아실 간호사로 일했다는 그녀는 어느 날 사유가 발생해 당직 의사에게 문제를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당직 의사가 짜장면을 먹고 있다며 늦게 도착해 아이의 상황이 나빠졌고, 경위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영화 속 수민이 그러했듯 사실대로 경위서를 적었는데 다른 의사가 와서는 당직의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느냐고 윽박질렀다는 얘기다. 20년이 지나도 현장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구나 아연한 마음이 들었다는 그녀의 고백에 좌중이 숨 죽인 듯 고요했다.
 
그녀는 간호학과를 다니는 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게 좋을지를 확신할 수 없겠다고 말한다. 나아지지 않는 현장, 참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일터를 미리 보여줄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다.
 
3교대 스틸컷

▲ 3교대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연달아 터져나온 고백... 자긍심의 소실
 
그녀의 고백 뒤로 많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때는 남에게 봉사하는 직업정신으로 감내하는 일의 가치를 느낄 수가 있었다면서도, 오늘의 간호사들에게 그와 같이 일하라고 강요하기 어려운 현실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과거 험한 세월을 이겨내 간호사에 이른 자신의 세대와 오늘날 열심히 공부하여 간호사 자격을 얻은 이들 사이의 격차와 마음가짐이 다를 것이란 이야기다. 그로부터 수많은 젊은 간호사가 격무와 불평등한 처우에 실망해 현장을 떠나가는 상황이 언급되니, 이것이 오늘 한국 의료의 현장이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순천향대학교병원에서 온 현직 간호사는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곧 간호법의 핵심 취지였다고 말을 보탠다. 그녀는 "간호법은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자는 취지"라며 "아이디랑 비번을 알려주고 네가 알아서 처방하라는 상황에 거듭 노출되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한다. 이 간호사는 이어 "간호사가 바라는 건 업무를 명확히 해달라는 것"이라며 "법제화가 되면 시스템적으로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주지하다시피 간호법은 전 사회적 논란 끝에 지난 5월 끝내 좌절됐다.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한 법안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막아선 것이다. 간호사의 법적 지위와 역할, 간호에 대한 제반 사항을 의료법으로 통합해 관리하며 나타나는 문제를, 간호법으로 떼어내 보다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풀기 위한 조치였으나 의사 등 다른 직역 및 정부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하게 됐다. 선진국의 사례에 비추어 간호법 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요구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교대 스틸컷

▲ 3교대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대통령이 막아선 간호법... 꼭 그래야만 했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간호사는 병원 내 의사와 동등한 전문적인 직역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에서 비치는 것처럼 법적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 또한 수시로 발생한다. PA(Physician Assistant)으로 불리는 수술방 간호사 등 현실에서 존재하는 이들이 법적 지위가 없고 사실상 불법의 영역에서 근무해야 하는 상황도 이어진다. 무엇보다 OECD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간호사 확충 등 정책적이고 제도적인 변화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3교대 고된 노동 가운데 일에 대한 자긍심까지 무너진 간호사들이 일터를 떠나는 상황이 거듭되는 이유다.
 
송명환 박사의 <헌법상 보건권 실현을 위한 사회보장법제 및 보건의료법제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는 이 같은 상황에서 상당한 시사점을 던진다. 논문은 2021년 발생한 한 사건으로 문을 연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 간병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방치해 숨지게 한 22살 대학생 청년의 사례로, 부작위존속살해로 4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논문은 수많은 간병살인을 언급한다. 2006년부터 10여 년 간 총 154명에 이르는 간병살인이 있었고, 이중 상당수가 주변에서 효자며 효녀라는 평가를 받던 이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이야기다. 논지는 간병이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적 차원에서 다뤄져야만 하는 것이며, 법제도 개선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옮겨간다.

사실 한국의 의료서비스는 민간 중심으로 짜여 있다. OECD 가입국 기준 53.6%의 의료기관이 공공기관이고 병상으로 따지면 7할이 넘는 공공병상을 확보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각 5.7%와 10%에 그친다. 의료보험 제도를 통하여 의료비 지출을 낮은 수준으로 묶어두고는 있지만 비급여의료의 과용과 간호인력의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다. 병원은 인력을 비용으로 보고, 이익 극대화를 위하여 이를 줄여나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헌법상 보건권 실현을 위한 사회보장법제 및 보건의료법제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 표지

▲ 헌법상 보건권 실현을 위한 사회보장법제 및 보건의료법제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 표지 ⓒ 송명환

 
간호법 없는 한국의 현실... 이제는 눈 돌려야
 
논문은 인구 1000명 당 간호인력이 OECD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통계(OECD 평균 9.7명, 한국 8.4명)로 이를 입증한다. 부족한 인력은 과잉노동으로 이어져 간호인력 1명이 평균 17병상을 담당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일본은 9병상, 미국은 2병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간호사의 업무과중이 어떠한지 짐작할 만하다. 한국 병원에서 보호자가 환자와 함께 밤을 새는 상황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고질적인 간호인력 부족으로 보호자가 그 역할을 일부 떠맡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로부터 정부는 지난 2015년 의료법에 기인해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실시했다. 입원한 환자를 보호자가 상주하는 대신 간호사와 병원이 고용한 간병지원인력을 통해 돌보는 서비스다. 제도는 어느덧 7년 차를 맞았으나 전국 의료기관의 42.1%, 병상 기준으로 27.5%만이 참여해 여전히 미비한 실정이다. 의료소비자들의 높은 만족도에 비하여 인력을 고용해야 하는 병원이 적극 참여를 꺼리고 있는 탓이다. 심지어는 충분한 인력 채용을 하지 않고 제도만 시행하여 업무가 과중하다는 볼멘 목소리까지 터져 나온다.
 
논문은 간호법 제정이 한국 공공의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필수적이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의료행위와 이를 행하는 의료기관에 대한 규제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법이 한국 공공의료의 틀을 세우고 간호사 등 다양한 직역의 역할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무엇보다 간호인력 확충 등 정부정책을 실시할 근거법령의 부재로 인해 정책적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인구구조 상 간병수요가 폭증할 것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간호법조차 없는 현 상황이 타개돼야 하는 이유다.
 
며칠 전 한국을 방문한 김희경 재외한인간호사회 총회장은 한국 국민들이 간호법에 대해 무지한 현실을 지적해 관심을 모았다. 재외 한인 간호사 3만 명의 서명까지 보내 한국의 간호법 제정에 힘을 모았는데, 막상 한국에선 정부와 야당 간 정쟁으로만 비춰졌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과 다르다 반박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움을 넘어 슬픔을 안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3교대 부천노동영화제 송명환 정서윤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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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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