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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저녁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강당에서 고 이병우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
▲ 고 이병우 추모식 지난 24일 저녁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강당에서 고 이병우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
ⓒ 강승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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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저녁 7시, 고 이병우 선생의 추모식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강당에서 교사와 노동활동가 등 150여 명의 추모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1963년생인 '고 이병우 선생'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장이던 2012년 5월 5일 전교조가 연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한 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고 한다. 고인은 이로부터 12년 동안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 지난 10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고 이병우 선생 추모식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김성보 전교조 서울지부장의 모습이다.
▲ 김성보 전교조 서울지부장 고 이병우 선생 추모식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김성보 전교조 서울지부장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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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추모식의 여는말에서 김성보 전교조 서울지부장은 "오늘 우리는 아름다운 이를 또 한 번 떠나보낸다"면서 "투사 이병우 선생님은 10년은 노동 현장에서 지내시며 민주노총을 만들기도 했다. 또 10년은 중학생들을 가르치셨고 마지막 10년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지내셨다"고 기억했다.

이어 "2005년 아직 대학생 티도 제대로 못 벗은 저에게 특정 영향이나 전교조의 울타리를 넘어서 더 큰 시야를 가지라고 격려하셨던 기억이 난다. 더 넓은 단결이 필요하다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이어갈 것"이라며 "과제는 남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편안히 잠드십시오"라고 추모했다.
 
고 이병우 선생의 대학 시절 동아리 ‘경제법학연구원’에 속했던 친구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허석 전 순천시장이다.
▲ 친구들의 추모사 고 이병우 선생의 대학 시절 동아리 ‘경제법학연구원’에 속했던 친구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허석 전 순천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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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 전 순천시장의 추모사는 대학 시절 동아리 '경제법학연구원'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가 대신 읽었다. 허 전 시장은 추모사를 통해 "하늘이시여 어찌 아둔한 우리를 남기시고 영민한 병우를 데려가셨냐?"라며 "20대의 병우는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의 신세력을 부르짖었고 30대의 병우는 악재의 쇠사슬을 끊고 민중의 새 아침을 보이고자 했으며 40대 병우는 참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50대의 병우는 없다. 지천명이 되자 쓰러져 병마와 홀로 고독한 싸움을 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그러며 "하필이면 적폐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말아먹는 지금, 뭐가 바빠 서둘러 간단 말이냐. 그대 우리 가슴에 영원히 기억되리라!"고 슬퍼했다.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권영길 지도위원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 고인을 추모하는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권영길 지도위원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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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권영길 지도위원은 "100세 시대라는 지금 (이병우 동지는) 40년은커녕 50 된 나이에 쓰러져서 가버렸다. 그러나 (이병우 동지는) 100세까지 살지 않아도 100세 이상을 산 것"이라며 "20대 들어가면서부터 쓰러질 때까지 30년을 치열하게,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그렇게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서 "저와 함께 치열하게 살았던 민주노총의 건설 기간, 민주노총이 건설될 때까지 우리는 많은 토론을 했고 입씨름도 하며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때로는 동지들끼리 마음 상하는 일도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 눈에 보이지 않게 그것을 엮어내는 데 중심적으로 선 사람이 이병우 동지"라고 회상했다.

이어 "이병우 동지의 보이지 않는 그 힘이 작용해서 민주노총이 건설될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한다"면서 "저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노총만큼 한국 사회를 바로 세우는 조직이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 민주노총을 건설하는데 몸 바친 이병우 동지, 그렇게 몸을 쏟았기 때문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희생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몸을 바쳤기 때문에 30년 치열하게 살고 쓰러져서 가신 것 아니겠냐?"고 목메어 말했다.

그러며 "이병우 동지는 짧은 세월을 100년 살았던 사람들보다도 더 값지게 더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씀드리고 감사를 드린다"는 말로 추모사를 마쳤다.
 
참교육동지회 이우영 선생이 고 이병우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 참교육동지회 이우영 참교육동지회 이우영 선생이 고 이병우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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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동지회 이우영 선생은 "아까 (추모) 영상을 보니까 햇빛을 등에 지고 앉아 있는 모습 보면서 찐빵(고 이병우 선생의 별명)이 부처님처럼 그렇게 보였다"면서 "(생전에) 부처님처럼 공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좋은 세상으로 갈 거"라고 추모했다.

 
고 이병우 선생 추모식에서 전희영 전교조 위원장이 "전교조는 고인을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사를 하고 있다.
▲ 전희영 전교조 위원장 고 이병우 선생 추모식에서 전희영 전교조 위원장이 "전교조는 고인을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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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영 전교조 위원장은 "이병우 선생님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치열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언제나 노동 현장 한가운데에 서서 민주노총 창립에 이바지하고 전교조 운동 최전선에 서 계셨다"며 "선생님은 먼 길을 떠났지만, 교육 참세상을 향한, 노동 해방·민중해방 그 길 위에 우리가 서 있겠다. 전교조는 우리 모두에게 참 스승이었던 이병우 선생님의 모습을 끝까지 기억하겠다"고 고인을 기렸다.
 
고 이병우 선생의 유족인 고인의 자녀와 부인 박혜경 여사가 추모식의 참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 고 이병우 선생의 유족 고 이병우 선생의 유족인 고인의 자녀와 부인 박혜경 여사가 추모식의 참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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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식의 마지막이었던 유족인사에서 고인의 부인 박혜경 여사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리는 것은 병우씨가 (투병한 지) 12년 됐다. 쓰러졌을 때 아이들의 나이가 중3, 고2 이랬다. 한창 엄마 아빠와 대화 나누고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잘 자라주었다. 병우씨를 기억하시는 여러 선생님 여러분들이 이렇게 병우씨의 건강과 가족들도 잘 살아 나가기를 기원해줬던 마음들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잘 자랄 수 있게 해주셨다"면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머리를 숙였다.

고(故) 이병우 선생은 1963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으며 홍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대 어문계열에 진학했다. ▶1985 서울대총학생회 대의원회 회장/사범대 학생회장 삼민투 관련 구속 ▶1986~1996 인천 현장 활동/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1990~1994 전노협 교육부장 ▶1994~1995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교육정책담당 집행위원 ▶1995~2000 민주노총 정책부장, 민주노총 교육국장 ▶2000 (특별채용) 난곡중 영어교사 첫 발령 ▶2002 난곡중 분회장 ▶2003 중등남부지회 금천지구장, 전국대의원 ▶2004~2005 전교조 서울지부 중등남부지회장 ▶2005~2006 한울중 발령/한울증 분회장 ▶2007~2008 전교조본부 대외협력실장 ▶2011~2012 전교조 15대 서울지부장 ▶2012.5.5. 어린이날 행사 방문 후 쓰러짐. 이후 12년 동안 병마와 싸우던 중 ▶2023.10.23. 영면에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피아'에도 실립니다.


태그:#고이병우선생추모식, #고이병우, #전교조서울지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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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활동가로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으며, 인터넷 매체에 노동·통일 관련 기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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