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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남도청 주변의 광주 구도심 전경. 광주 사직타워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옛 전남도청 주변의 광주 구도심 전경. 광주 사직타워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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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볼까?" "시내에서 보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시내엔 만날 공간이 즐비했다. 빵집, 찻집, 서점이 인기였다. 우체국과 극장 앞도 만남의 장소로 '단골'이었다. 식당과 술집도 지천이었다. 눈길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보고 즐길 거리였다.

20여 년 전까지는 그랬다. 광주의 중심은 옛 전남도청이었다. 만남의 거리는 충장로와 황금동 일대였다. 지금은 아니다. 상무지구, 수완지구, 봉선동, 전대후문 등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상무지구가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다.

상무지구엔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 만한 데가 널려 있다. 쉴 만한 큰 공원도 몇 군데 있다. 평소 상무지구는 업무와 주거공간이다. 밤엔 유흥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불야성을 이루는 밤 풍경도 별천지다. 비즈니스호텔도 모여 있다. 일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밥과 술을 먹고, 산책을 하고, 쇼핑과 영화 관람을 즐기고, 잠을 자는 것까지 다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상무지구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기 장소가 됐다. 광주의 핫 플레이스다.

엄청난 변화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실감한다. 상무지구는 예전에 군부대 자리였다. 상무대(尙武臺)가 있었다. '무(武)를 숭상하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의 상무대는 1952년 육군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보병학교, 포병학교, 통신학교, 기갑학교, 화학학교가 있었다.

광주의 도심 팽창과 함께 상무대 이전이 논의됐다. 1989년 상무대의 장성 이전 계획이 확정되고, 광주시의 신도심 조성 사업이 시작됐다. 대단위 택지가 조성됐다. 시청, 공공기관, 금융기관 등이 옮겨졌다. 김대중컨벤션센터와 5·18자유공원도 들어섰다. 오늘의 상무지구다.
  
광주 5·18 자유공원 전경. 옛 상무대에 있던 헌병대와 영창 등을 복원했다.
 광주 5·18 자유공원 전경. 옛 상무대에 있던 헌병대와 영창 등을 복원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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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자유공원 풍경. 내무반, 영창 등 23개 방이 꾸며져 있고, 방마다 전시물로 채워져 있다.
 5·18자유공원 풍경. 내무반, 영창 등 23개 방이 꾸며져 있고, 방마다 전시물로 채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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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지구에 5·18자유공원이 들어선 건 80년 5월과 엮인다. 80년 당시 상무대는 광주시민들에게 단순한 군부대가 아니었다.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시민들의 정신까지도 말살하려 했던 곳이 상무대였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굴비처럼 엮여 끌려왔다. 상무대로 끌려온 시민의 수가 3000여 명에 이른다. 시민들은 연병장에서 다짜고짜 혹독한 기합과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연병장은 모래와 자갈밭이었다. 끌려온 시민들에게 상무대는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의 장소였다.

고문도 일상으로 행해졌다. 헌병들이 생활하는 내무반이 시민을 심문하고 고문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군 수사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구타하고 고문했다. 당시 상무대는 무고한 시민을 때려잡는 인간 도살장이었다.
  
5·18자유공원 풍경. 80년 5월 군용트럭에 실려 끌려온 시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5·18자유공원 풍경. 80년 5월 군용트럭에 실려 끌려온 시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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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북 계엄분소가 설치된 헌병대 본부사무실은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로 쓰였다. 항쟁 기간 이곳에서는 계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시민 수습위원과 계엄군이 마주 앉아 수습방안을 논의한 곳이기도 했다.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관들은 시민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곡괭이 자루로 때리고, 송곳으로 찌르며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신음소리는 시민들에게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감을 갖게 했다. 갖은 폭력과 고문을 당하지 않으려면 거짓 자백이라도 해야 했다.

헌병대 식당도 시민을 조사하는 취조실로 쓰였다. 군 수사관들은 날마다 자술서를 강요했다. 자신들이 바라는 내용이 나오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그때 수사관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이었다'는 게 항쟁 참여자들의 증언이다.
  
옛 상무대의 영창 모습.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옛 상무대의 영창 모습.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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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대엔 영창도 있었다. 영창은 군인들의 감옥을 일컫는다. 인권은 여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창은 반원형의 부채 모양을 하고, 6개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30명 정원의 방에선 150여 명이 함께 생활했다. 시민들은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기합과 폭력이 가해졌다.

몸은 밤에도 제대로 눕힐 수 없었다. 공간이 비좁은 탓이었다. 여름날의 무더위와 긴 장마는 시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땀 냄새가 진동하고, 피부병까지 퍼졌다. 옆사람이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힘든 감옥생활이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서로 의지하며 슬기롭게 이겨냈다.

상무대 안에 법정도 급히 만들어졌다. 법정은 당시 구속자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이다. 재판부는 모두 군인들로 채워졌다. 애초부터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무장한 헌병이 지키고 선 가운데 열린 재판은 각본에 따라 진행됐다.

시민들은 부당한 군사재판에 항의하며 애국가를 목청껏 불렀다. 정치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을 규탄하며, 항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꿋꿋하게 맞섰다. 재판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민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했다.
  
5·18자유공원에 복원된 군사법정. 80년 당시 신군부는 군사재판을 위해 급하게 상무대 안에 법정을 만들었다.
 5·18자유공원에 복원된 군사법정. 80년 당시 신군부는 군사재판을 위해 급하게 상무대 안에 법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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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자유공원 내 군사법정 내부 모습. 80년 당시 무장을 한 헌병이 도열한 가운데 재판이 진행됐다.
 5·18자유공원 내 군사법정 내부 모습. 80년 당시 무장을 한 헌병이 도열한 가운데 재판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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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자유공원에는 당시 내무반과 헌병대 본부사무실, 식당, 영창, 군사법정 등이 복원돼 있다. 실내 공간은 전시물로 꼼꼼하게 채워져 있다. 5·18의 전개 과정은 물론 사진과 영상, 회고록 등으로 꾸며졌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 김사복과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이야기도 소개돼 있다. 공원이 5·18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자유공원 입구에는 '先進祖國의 先鋒(선진조국의 선봉)' 표지석이 처박혀 있다. 답사객이 밟고 지나도록 만들어 놓았다. 학살자를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취지다. 표지석은 광주학살을 딛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11공수여단 방문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11공수여단은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는 등 광주학살의 맨 앞줄에 섰다.
  
자유공원 입구에 처박힌 ‘先進祖國의 先鋒’ 표지석. 자유공원을 드나드는 답사객이 밟고 지나도록 만들어 놓았다.
 자유공원 입구에 처박힌 ‘先進祖國의 先鋒’ 표지석. 자유공원을 드나드는 답사객이 밟고 지나도록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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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자유공원에 세워진 들불열사 기념탑. 5월 항쟁의 한가운데에 섰던 들불야학 출신 열사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5·18자유공원에 세워진 들불열사 기념탑. 5월 항쟁의 한가운데에 섰던 들불야학 출신 열사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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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켠에 들불열사 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들불야학 출신 열사 7명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있다. 들불 7열사는 노동운동을 한 박기순을 비롯 5·18항쟁지도부 대변인을 맡았던 윤상원, 투사회보 제작을 담당한 박용준,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관현, 청년운동을 한 신영일,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과 홍부부장 박효선을 가리킨다.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죽은 박기순을 제외한 강학들이 모두 5·18때 죽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

기념탑에는 북두칠성 모양을 따라 일곱 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캄캄한 밤에 길잡이 역할을 하는 북두칠성처럼, 우리사회를 환히 비춘 열사들을 상징하고 있다.

들불야학은 광주공단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야간 배움터다. 1978년 7월 문을 열고, 81년 4월 문을 닫았다.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불씨를 붙이고,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운영됐다.
  
5·18 당시 최후 항쟁지가 됐던 옛 전남도청과 5·18민주광장의 야경. 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5·18 당시 최후 항쟁지가 됐던 옛 전남도청과 5·18민주광장의 야경. 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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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항쟁을 벌였다. 22일부터 닷새 동안은 시민들이 계엄군을 물리쳤다. 경찰과 군인이 없는 상태에서도 은행 강도 한 건 발생하지 않았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드문 자치공동체였다. 광주항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된 87년 6월항쟁의 동력이 됐다.

광주항쟁 43주년을 보내고 44주년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오늘도 광주를 욕보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시민군의 폭력에 맞선 군의 자위권 발동이다, 북한 간첩의 선동에 따른 폭동이다 등등.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극우의 움직임이다.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까닭이다. 그에 따른 책임자가 단죄되지 않은 탓이다. 피해자에 대한 완전한 명예 회복도 아직 멀기만 하다.

우리가 80년 5월 광주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이유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횃불이 된 광주에서, 우리가 바라는 대동세상의 희망을 다시 한번 그려본다.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항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던 열사들이 바란 건 무엇이었는지... 상무지구 5·18자유공원에서의 반나절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국립5·18민주묘지 전경. 광주항쟁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다.
 국립5·18민주묘지 전경. 광주항쟁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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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5·18자유공원, #5·18사적지, #상무대, #광주민중항쟁, #들불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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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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