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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 프라하로 향하는 길은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두 도시의 거리만 해도 상당히 멀었죠. 중간에 한 차례 환승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 탄 열차는 두 시간을 넘게 연착했고, 다음 기차를 타고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이미 어두운 밤중이었습니다. 겨우 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고, 다음 날에야 프라하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카를교에서 본 프라하 성
 카를교에서 본 프라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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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입니다. 프라하 성과 시계탑, 블타바 강을 넘는 카를교까지, 곳곳에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도시죠. 구시가를 잠시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건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역사 깊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조금 더 관심이 가는 대상이 있었습니다. 프라하에서 나고 자란 작가, 프란츠 카프카였죠. 아침을 먹고 난 후 도심을 가로지르는 낡은 트램을 타고,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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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는 <변신>이나 <성>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불안을 자극하는 작품을 썼죠.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자랐고, 프라하에서 글을 쓰다가 프라하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카프카의 정체성은 독특합니다. 카프카가 살던 시기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자랐지만, 정작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를 모어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체코를 지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계층이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카프카의 작품들도 모두 체코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집필되었습니다.

게다가 카프카는 유대인이었습니다. 혈통만 유대인이 아니라,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 문학과 연극이 카프카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프라하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 커뮤니티가 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도 물론입니다.

결국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는 체코에서 독일어로 작품을 쓴 유대인이라는, 아주 복잡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셈입니다.
 
카프카의 <소송> 친필 원고
 카프카의 <소송> 친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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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상황이 당시 중동부 유럽에서 그리 특이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의 체코 지역에는 원래 '보헤미아 왕국'이라는 국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헤미아 왕국은 1526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에 병합됩니다. 이후 체코는 긴 시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죠.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그 영토를 크게 확장합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된 이 제국은 중동부 유럽의 다양한 민족을 지배했죠.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뿐 아니라 체코,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북부, 폴란드 남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중동부 유럽은 여러 민족의 문화와 언어가 섞이는 공간이었습니다. 독일어나 헝가리어는 물론, 체코어, 크로아티아어, 루마니아어 등 계통과 근원이 다른 언어들이 하나의 제국 아래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죠.

그렇게 보면, 프라하에서 성장한 카프카의 복잡한 정체성은 그리 독특한 일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아니, 오히려 당시 중동부 유럽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죠.
 
프라하 성
 프라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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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정체성은, 탄압과 수난을 불러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유럽의 근대사는 이 복잡하고 다원적인 정체성을 쪼개고 나누어, 오직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국민국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으니까요. 체코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계 1차대전에서 패전했습니다. 체코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했습니다. 오랜 기간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지만, 언어와 민족이 체코와 유사한 슬로바키아와 함께 독립하게 되었죠. 그렇게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민족적으로 그리 단일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죠. 이제까지 다원적인 제국 아래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던 땅이니까요. 체코인이 사는 땅과 아닌 땅을 손쉽게 선으로 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됐던 것은, '주데텐란트'라는 땅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의 접경 지대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이지만 독일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죠. 독일에 나치 정부가 들어서며,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이 땅을 할양하라고 압박합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영국과 프랑스의 주재로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겼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팽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죠. 독일은 이듬해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보호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곧 세계 2차대전이 벌어졌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간 독일에 대항한 망명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정부가 만들어졌죠. 하지만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게 쿠데타를 사주합니다. 그렇게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었습니다.

체코는 공산권 안에서도 자유와 정치 개혁을 위해 노력한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1968년에는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죠. 언론과 출판, 집회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멈추고 다당제를 허가하기로 했죠.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군을 동원해 우방국인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습니다. 20만의 군대가 프라하를 침입했죠. 둡체크와 정부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소련으로 연행되었습니다. 다시 엄혹한 독재의 시대가 돌아왔습니다.
 
구시가 광장의 얀 후스 동상
 구시가 광장의 얀 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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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부는 1989년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몰락했습니다. 수십 만의 시민들이 프라하에 몰려와 자유와 개혁을 외쳤죠. 결국 공산당은 독재를 포기했고, 자유 선거가 치러집니다.

1989년 말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바츨라프 하벨이 새 대통령이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전환됩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도 돌아와 연방의회 의장을 맡았죠.

1992년, 체코슬로바이카 연방을 이루고 있었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연방 해체를 합의합니다. 공산권의 붕괴와 국제질서의 재편이라는 상황을 맞아,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죠. 양국은 협상 끝에 평화로운 해체를 결의했고,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게 됩니다.
 
프라하 시계탑
 프라하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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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체코 공화국은 그렇게 긴 시간의 압제와 투쟁을 거친 뒤에야 만들어진 국가였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체코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체코에 살며 체코어를 사용하는 체코인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당연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체코는 오랜 분쟁의 역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독일, 소련에 대항해서까지 그 정체성을 만들어나가야 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체코에서 독일어로 작품을 쓰던 유대인 카프카라는 복잡한 정체성은, 이제는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습니다. 각자의 정체성과 그에 맞는 국가를 세우게 되었죠.
 
프라하 중심의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 중심의 바츨라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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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둔 탄압과 투쟁의 역사까지 모두 끝나버린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프라하를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에 속하지 않는 소수자들이 존재하고 있죠. 그들에 대한 탄압도 종식되지 못했습니다.

카프카는 1924년 폐결핵으로 40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병세를 이겨냈더라도, 그리 오래 작품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프라하는 곧 나치 독일의 지배에 놓였고, 그의 가족들도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으니까요.

프라하의 오래된 시가지를 걸으면서, 100년 전 이 도시에 살았을 카프카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여전히 이 거리에도, 카프카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겠죠. 체코는 단일한 국가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카프카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국경과 언어의 벽이 옅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프라하 거리의 어디엔가, 우리 시대의 카프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도 여러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때로 압박감에 좌절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었던 국경과 민족의 벽이,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압제가 되었을 지도 모르죠. 언젠가 카프카처럼,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달라는 말을 친구에게 남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 시대의 카프카를 만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정체성이 결코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꿉니다. 스스로의 모든 정체성에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원합니다. 그것이 프라하에서 자라날 새로운 카프카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체코, #프라하,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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