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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바닥선이 이만큼 더 아래로 가게 찍어야죠!"
"상반신만 나오게 좀 더 가까이 와 봐요, 엄마."
"구도는 괜찮은데, 내 표정이 안 좋네. 한 번 더!"


딸의 주문에 따라 끊임없이 핸드폰 셔터를 눌러댔다. 찍을 때마다 수십 장을 연속으로 찍었다. 사진이라고는 '하나, 둘, 셋!' 하고 두어 장 찍으면 족한 나로서는 수십 번씩 연속 촬영하라는 딸의 주문이 참 성가셨다. 귀찮은 마음을 다독이며 오랜만에 나선 딸과의 여행을 망치지 않기 위해 성심껏 눌러댔다.

단 둘이 여행, 적잖이 설렜는데

한 달간 직업체험에 묶여 정신없이 살았던 20대 딸은 개학을 코 앞에 두고 바다 못 본 걸 몹시 아쉬워했다. 친구들과 급히 일정을 조율했지만 잘 맞지 않았고, 만만한 나를 대타 삼아 속초행 길에 나선 터였다. 여름내 집만 지킨 나로서도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았고, 성인이 된 딸과 첫 여행이라 은근히 설레기도 했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무념무상도 해 보고 싶었고, 박물관에 들러 차분하게 속초를 알아보리라 계획했지만 실상은 나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딸에게 여행의 주목적은 인스타 업로드용 사진 찍기였고, 동행한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딸의 전담 사진사일 수밖에 없었다.
 
  쉴 새 없이 번쩍이며 요동치는 영상 속의 딸을 렌즈에 담다가 어지럼증이 날 지경었다
  쉴 새 없이 번쩍이며 요동치는 영상 속의 딸을 렌즈에 담다가 어지럼증이 날 지경었다
ⓒ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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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를 걷든, 카페에서 쉬든 딸의 요구대로 배경과 각도를 바꿔가며 딸 맘에 드는 최고의 순간을 건지기 위해 끝도 없이 찍어댔다.

사진 찍기의 압권은 현란한 영상체험 뮤지엄에서였다. 어둠 속에서 쉴 새 없이 번쩍이며 요동치는 영상 속의 딸을 렌즈에 담았다. 하도 정신없이 움직이는 빛들 속에서 화면이 뚫어져라 집중하다 보니 나중엔 어지러워져 멀미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사진 찍기를 즐기는 딸은 시선 처리와 포즈가 어찌나 다양하고 자연스럽든지. 그 천연덕스러움에 감탄이 절로 났다.

좋은 사진을 건지기 위한 딸의 집념은 시종일관 대단했다. 도대체 사진이 뭐 그리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나 속이 부글거리려던 즈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딸의 소통 방식이었다. 고심해서 고른 사진과 영상들을 딸이 인스타에 업로드 하면 그걸 본 친구들에게 반응이 오는 것이다. 좋아요, 멋지다 같은 단순한 말뿐 아니라 관련 이야기로 수다가 이어졌다. 

지난주에 속초에 다녀갔다는 어떤 친구는 물회가 필수라며 현지인들만 안다는 맛집 정보를 알려주고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누구는 속초 대관람차가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됐으니 비 오기 전에 어서 가보라고 권했다. 딸 친구들이 알려주는 정보나 우스개 소리에 함께 웃다 보니 마치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딸의 동행인은 분명 나뿐이었지만, 딸의 친구들과도 공간을 초월해 함께 하고 있다고 느껴져 신기했다.

함께 있지 않지만 함께 하는 여행! 인스타를 하지 않는 나로서는 새로운 여행체험이었다. '꼭 동행해서 뭔가를 같이 해야만 여행이 아니구나'를 실감한 여행이기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멍도 못 때리고, 박물관에도 못 들른 채 사진만 주야장천 찍느라 고생했지만 딸 덕분에 SNS를 이용하는 새로운 여행 체험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딸이 내 손의 짐을 무겁다며 가져가고, 길찾기로 길 안내와 맛집도 재빠르게 찾아줘 고마운 동시에 딸의 성장이 실감되어 뿌듯하기도 했다. 음악 선곡 취향이 비슷해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엄마가 서툴러서 비록 인생샷을 건지지는 못했지만 딸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딸과의 다음 여행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여행의 주도권을 쥔 아이들
 
   하염없이 바라보며 물멍하고 싶었는데 금세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다.
  하염없이 바라보며 물멍하고 싶었는데 금세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다.
ⓒ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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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딸과의 여행 이야기를 50대 지인들과 나누다 보니 사진 봉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 큰 자녀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고 싶은 부모들은 저마다의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었다. 최근 20대 딸, 30대 아들과 함께 15년 만에 가족여행을 다녀온 한 분은 체력이 달려 혼났다고 한다. 자녀들이 원한 수중다이빙 같은 액티비티를 이틀 내내 동참하면서 힘이 든데도 자녀들의 열정에 맞추느라 섣불리 내색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30대 초반 딸과 태국으로 휴가를 다녀온 다른 지인은 여행 전 딸이 서약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부부간 시시한 일로 절대 다투지 않기'라든가 '늦잠 자는 딸을 먼저 깨우지 않기' 등 여행 중 지켜야 할 일의 목록을 들이미는 딸에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일견 수긍이 가 서약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녀온 여행이 너무 만족스러워 벌써 딸과의 다음 여행을 고대한다고 하니 서약할 가치가 있기는 있었나 보다.

뭐든 일방적으로 엄마가 주도했던 아이들 어릴 적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지만, 이젠 슬슬 여행의 주도권을 자녀들에게 넘겨주는 때인가 보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도록 자녀들과 여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다면 부모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다들 동감했다. 나도 유튜브로 사진 강의라도 찾아보며 사진 찍는 연습을 미리 해야 할 것 같다. 딸 마음에 들 사진을 척척 찍어낼 다음 여행을 위해!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딸과 여행, #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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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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