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나 존스 III>의 한 장면 화면 오른쪽에 놓인 '예수의 잔'을 집으려 하다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돌아보는 인디아나의 모습

▲ <인디아나 존스 III>의 한 장면 화면 오른쪽에 놓인 '예수의 잔'을 집으려 하다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돌아보는 인디아나의 모습 ⓒ 영화제작사

 
  '그때 거기 없던' 목소리
 
1989년작 <인디아나 존스 III: 최후의 성전>은 헨리 존스 박사와 헨리 존스 주니어 박사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서양인들 가운데 아버지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주니어(Junior)'를 추가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 덕분에 그분들은 노인이 돼도 계속 주니어로 불리운다. 영화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 흑인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 등이 그 예다. 
 
< 인디아나 존스III >에서 아버지 존스는 아들 존스를 부를 때 "주니어"를 선호하는데, 정작 아들은 그 호칭이 달갑지 않다. 아버지가 "주니어"라 부를 때 아들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 부분, 아버지가 아들을 "주니어" 아닌 "인디아나"로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바닥이 갈라지고 천장이 내려앉는 와중에, 한 손은 아버지 손을 붙잡고 있지만 다른 한 손이 '보물(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사용했다는 잔)'을 움켜쥐고자 뻗쳐있을 때였다. 보물을 갖고 싶다는 아들의 욕심이 그의 손가락 끝을 부들부들 떨리게 했다. 바로 그때 아버지의 나직하고 자그마한, 그러나 힘있는 목소리가 아들의 귀를 울렸다. "인디아나." 그러자 생명과 생명 아닌 다른 것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에 빠져있던 아들의 집중력이 '생명'으로 되돌아온다.   
      
< 인디아나 존스III >와 달리 넷플릭스 드라마 <더 데이스>는 '생명으로 돌아오라'는 목소리의 '완벽한 부재'를 보여준다. 2011년 3월, 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 피폭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총리를 비롯해 정부관료들은 걸핏하면 호통을 친다. 전력회사 간부들은 발뺌할 기회만 호시탐탐 찾는다. 원자력안전보안원 소속위원은 숨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 눈치만 본다. 그 누구도 "인디아나"를 외치지 않는다. 사고 발발 직후뿐 아니라 심지어 며칠이 지나도록 "생명으로 돌아오라"는 목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후쿠시마 사고기록이 들려주는 '침묵'
 
 넷플릭스 <더 데이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더 데이스>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더 데이스>는 여덟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넷플릭스 드라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면진중요동 긴급대책실에 최후까지 남아, 사고수습을 위해 노력했던 '요시다' 소장이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며 드라마는 시작된다. 그가 사고기록을 충실히 남기기 위해 "조금만 더 살아보고자 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드라마는 일차로 마무리되고, 이후 2년 만에 그가 암으로 죽었다는 뒷이야기를 알려준 다음, 2023년 현재 제1발전소 사고수습이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자막이 뒤를 잇는다. '사고수습 진행중'이라는 말이 혹시 '오염수 해양투기 준비중'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인가 싶어, 은근히 불안하다.        
 
이 드라마는 두 가지 형식적 특징을 지닌다. 첫 번째는 몹시 느린 전개, 두 번째는 몹시 잦은 침묵이다. 첫 번째 형식적 특징에서 관객들은 발전소 직원들이 원전사고 수습을 위해 그나마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최소한 그들의 상사들처럼 화내거나 미루거나 숨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더 데이스>의 두 번째 형식적 특징은, 원전사고가 내뿜는 공포가 가히 '최상급'임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끈다. 현장음향조차 소거된 '완벽한 침묵'이 드라마에 자주 끼어든다. 무겁고 어두운 침묵은 원전사고의 공포를 역설적으로 실감케 하며, 비관적 현실감과 절망적 절박감을 전달해준다.  
 
솔직히 나는 <더 데이스>를 정주행하기가 어려웠다. 몹시 느린 전개와 몹시 잦은 침묵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원전사고가 일어나면 바로 이 같은 답답함이 (드라마 시청 경험 속에서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내게 다가오겠구나 하는 현실적 예측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두 편의 에피소드를 이어서 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한 편의 에피소드를 한 번에 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저런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지만 원전 25기를 가동중인 우리나라에 원전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전연 없는 데다, 원전 내부의 기계고장 등 사고소식이 간간이 들려오니, 마냥 근거없는 두려움은 아니리라.   
 
요시다 소장의 이상한 '리더십' 
 
 넷플릭스 시리즈 <더 데이스>.

넷플릭스 시리즈 <더 데이스>. ⓒ 넷플릭스

 
<더 데이스>의 주요 줄거리는 수습과 대처에서 문제가 많았던, 요시다 소장이 근무했던 제1발전소(다이치 원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90명 원전 관계자들 인터뷰를 채록한 저서도 물론 참고되었지만 드라마의 기본줄기는 사고일지 격인 '요시다 조서'를 주로 따른다. 
 
요시다 소장은 홀로, 혹은 측근 한두 명과 궁리한 끝에 결론을 내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더 데이스>의 묘사에  따르면, 요시다 소장은 실무책임자로서 직원들의 희생정신을 격려하고 그들의 결기에 자주 감동받는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의 판단을 대체로 밀고 나갔다. 또, 막판에 발전소 직원들을 단계별로 대피시켜야 할 시점에 이르자 요시다 소장은 직원들의 자율적 의견을 취합하기보다 자기가 직원 명단을 직접 분류하여 우선순위 대피자명단을 작성했다. 독립적이긴 하나 상부의 명령으로부터 아주 자율적이진 않았으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했지만 상황이 자신의 예측과 다르게 진전되면 제일 먼저 허둥지둥 당황했던 사람이었다.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요시다 소장은 기괴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목숨을 걸고 사고를 수습하라"는 총리의 호통소리를 듣고 요시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지를 벗고 엉덩이를 긁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이 행동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행동의 의미를 요시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는가? 아니었다. 요시다는 그냥 다시 바지를 입고 자리에 앉았다. 요시다의 이해불가 행동은 또 있다. 사고수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발전소에 잔류해야 했던 직원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을 때였다. 요시다가 갑자기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으며 씨익 웃었다. 이 돌발행동은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고난 앞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객관적 현실파악을 체념한 무기력한 낭만주의자' 같다. 
 
요시다 소장은 문젯거리 앞에서 책임을 떠넘기고 도망가는 비겁자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2발전소의 나오히로 소장처럼) 직원들과 함께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협력자 타입도 아니었다. 그런 데다가 그는 나중에 자신의 암 발병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적으로 추론하지 못하는 인지부조화 현상마저 보인다. 사고수습 직원들의 혈뇨는 방사능 피폭 때문으로 여기면서도 '내 암은 스트레스와 흡연 때문이야'라고 자기 맘대로 결론지은 것이다.  
 
원전 돌아가는 소음에 자주 묻히는 '생명의 언어'
 
 넷플릭스 드라마 <더 데이스> 포스터.

넷플릭스 드라마 <더 데이스> 포스터. ⓒ 넷플릭스

 
 <더 데이스>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서, 요시다 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드라이벤트(방사능 물질의 화학적 희석 후 공기중 분산배출), 해수주입(원자로 온도상승을 막는 냉각수 용도로 바닷물을 사용함) 등 원전사고 긴급 해결방안이 후쿠시마에서 최초로 시도됐다. 우리한테는 사고수습을 위한 매뉴얼이 없었다." 

그렇다. 그의 말처럼 원전사고를 성공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매뉴얼은 그때 없었을 것이다. 동의한다. 지금까지도 비단 후쿠시마 원전 관계자들뿐 아니라 지구상 모든 원전 관계자들에게 최고의 원전사고 수습 매뉴얼은 없을지 모른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원자로 폭주 사태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게 있다. 독일이 선택한 '원전 가동중지, 원전 영구폐쇄'라는 근본적 매뉴얼이 바로 그것이다. 값비싼 원자로를 지키자는 소리, 회사와 정부의 체면을 구기지 말자는 소리, 그리고 원전 돌아가는 소리에 자주 묻히는 그 매뉴얼은 생명을 선택하라는 소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생명을 선택하라는 그 소리를 지금이라도 우리는 들어야 할 것 같다. 아버지가 부르는 낮고 작은 "인디아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침내 한 손 아니라 두 손으로 생명을 향하겠다고 결정한 아들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 원전사고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어느 누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는가. <더 데이스>의 깊은 침묵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더 데이스>가 증명하는 게 하나 더 있다. 막상 사고가 일어난 뒤엔 오직 '원자로 폭주'를 막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원자력 발전소가 곧 '원자탄'이 될 수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진실!  
더 데이스 후쿠시마 원전사고 제1발전소 요시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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