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7 04:16최종 업데이트 23.07.27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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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5일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기원하는 방탄소년단(BTS)의 단독 콘서트 '옛 투 컴 인 부산'(Yet To Come in Busan)이 열린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 앞에서 시민과 팬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중문화는 대중이 만드는 문화인가 대중을 만드는 문화인가? 한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경제적, 미학적 생활방식과 취향을 가진 다수의 구성원을 '대중'으로 표현할 때 그들의 문화가 대중문화임은 분명하다.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문화인만큼 대중문화가 사회를 대표하는 문화 코드인 것도 사실이다. 

대중문화의 앞뒤에는 마니아층이 관여하는 클래식 문화(고전)와 아방가르드 문화(전위)가 있다. 고전문화는 실험적 요소가 적은 만큼 고도의 완성도가 요구되고 전위문화는 반대로 완성도보다 실험적 창의성이 존재 이유이고 생명력이다. 고전문화와 전위문화는 각각 그런 요구조건 때문에 소수의 전유물 성격이 강하다.  


소수의 전유물인 고전/전위 문화는 저변에 잘 노출되지 않아 애호가들의 적극적인 관여가 필요하다. 반대로 대중문화는 쉽게 누구나 접할 수 있지만 까다로운 애호가들의 취향을 쉽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고전과 전위 문화는 애호가들의 능동적 섭렵과 절대적 관계에 있는 반면 대중문화는 그 점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대중문화라는 표현에는 서구의 포퓰러 컬처(Popular Culture)와 매스 컬처(Mass Culture)가 동시에 함의돼 있다. 두 개념 모두 다수의 구성원이 영위하는 문화를 말하지만 주체적 동인(動因)은 각각 다르다. 포퓰러 컬처에서의 대중은 문화를 견인하는 주인이지만 매스 컬처에서 말하는 대중은 문화의 적용 대상이다. 

매스 컬처로서의 대중문화는 기획자와 후원자가 대중이 아니라 소수의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 소유자다. 그들은 당대의 대중을 유혹할 만한 소재를 찾아내 그 안에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를 담아 멋지게 상품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무한 복제, 배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상품은 대중의 정신을 사로잡고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거대 자본의 이윤추구 각축장
 

2022년 5월 18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미국 배우 톰 크루즈와 프로듀서 제리 브루크하이머가 <탑건: 매버릭> 포토콜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들어선 프랑스 드골 정부는 미국에 대한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었다. 전쟁 피해가 덜한 영국도 미국과 유사한 상환 협상을 준비 중이었기에 영미 협상이 선결될 경우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다는 조바심이 프랑스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부채를 탕감하고 신용을 제공받기 위한 협상 과정에서 프랑스는 미국 영화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게 된다. 

개방 직후 영화 종주국 프랑스의 극장에 걸린 미국영화 수는 자국 영화의 6배를 상회했다. 종전과 함께 자유를 만끽하고자 영화관을 찾은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눈앞에 강요된 선택지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 경제, 군사 등 하드웨어에 이어 문화 영역에서까지 유럽의 자존심이 미국에 자리를 내주는 시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전쟁의 영향은 이처럼 상상을 넘어서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나치와 파시즘을 막지 못한 유럽은 이 모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와 함께 '문화예술'의 시대도 '문화산업'의 시대로 전환된다. 그리고 문화가 예술의 손을 떠나 산업의 품으로 안기는 순간 대중문화의 운명도 근본적으로 바뀐다. 

물론 산업화된 미국의 등장 이전에 대중문화라는 것이 과연 있었는가 하는 지적도 있다. 옳은 주장이다. 다만 그럴 경우의 대중문화 범주에는 민속문화가 배제돼야 한다. 그리고 민속이 배제된 대중문화의 콘텐츠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가 사라진 무한 복제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이 관점에서라면 대중문화는 변한 것이 아니라 탄생한 것이다.

변모됐든 탄생했든 20세기 이후 대중문화는 엄청난 보편성과 확장성 속에서 몰개성과 소극적 수용성이라는 특징으로 대중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그 안에서 대중들의 취향은 사회적 코드에 획일적으로 동화된다. 상품으로서 대중문화는 생필품 이상의 상업적 가치를 가지면서 거대 자본의 이윤추구 각축장이 됐다. 

언론과 자본권력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세기 이래 매스 컬처로서의 대중문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매개체는 단연 언론이었다. 언론 역시 대중문화의 비상과 함께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했고, 둘의 상생 관계는 전무후무의 밀월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이 황금 조합을 주목한 것은 당연히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 세력이었다. 이것은 민주주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관찰된다. 

차이점은 민주주의 성숙도가 높을수록 자본권력이, 낮을수록 정치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는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특히 고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벌은 적극적 언론 매입과 심지어 창간에 나서기도 한다. 한국처럼 특정 분야 산업이 유독 언론 소유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재벌이 언론 지분 확보에 적극적 관심을 둔다.     

1996년 창립한 프랑스의 독립 언론비평단체 아크리메드는 국제시사지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함께 프랑스 언론-방송사들의 소유관계를 낱낱이 해부 보도한 바 있다.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의 사실상 모든 주요 대중매체에는 재벌의 크고 작은 자본이 문어발처럼 뻗어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언론사 <르몽드>의 100%를 행사하는 르몽드 그룹은 르몽드리브르가 75%를 소유하고 있다. 또 르몽드리브르의 27%는 엔제이제이홀딩이, 엔제이제이홀딩은 프랑스 재벌 그자비에 니엘이 장악한 언론독립기금이 100% 소유하고 있다. 

보도의 독립성이 비교적 보장된 <르몽드>의 경우와 달리 또 다른 주요 언론사 <르 피가로>는 지분의 100%를 다른 재벌 닷소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 르 피가로의 편집권 독립성 문제는 늘 프랑스 언론계의 관심 영역이었다. 주요 민영 방송사 TF1과 M6 역시 재벌가 부이그가, 몬가가 각각 44%, 75%를 행사하고 있다. 

재벌의 지배구조가 촘촘한 프랑스 언론계는 그나마 보도의 독립성에 엄격한 제도적, 법적 규제가 보장돼 있다. 지난 5월 국경없는기자회(RSF)가 2023년 세계언론자유지수를 발표할 때도 이 점은 인정한다. 다만 이해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불충분하고 개선의 여지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외신을 더 신뢰하는 기이한 현상
 

국경없는기자회(RSF)는 세계 언론 자유의 날인 5월 3일 세계 180개 국가·지역의 언론 자유 환경을 평가해 발표했다. ⓒ 국경없는기자회


RSF 보고서에서 한국은 전통 가치와 자본의 간섭이 객관적 보도를 저해하는 요소로 언급됐다. 보수주의적 사회 전반 분위기와 대기업의 압박이 언론의 독립성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에도 유사한 평가가 나왔다. 대기업의 지배권이 언론의 자체 검열을 부추긴다는 평가였다. 

올해 한국(47위)보다 21계단 낮은 일본(68위)은 한국의 경우와 비슷한 지적도 있지만 정도는 더 심각했다. 보수적 사회 분위기, 경제적 이익관계, 정치적 압력, 성불평등이 언론의 활동을 제약한다는 RSF의 지적이었다.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 관련 보도가 한국보다 정작 당사국인 일본에서 훨씬 적다는 점이 다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유럽국가의 언론자유지수가 타 대륙에 비해 비교적 높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발트연안국의 언론자유지수가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높다는 점은 주목을 끌 만하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지 33년 된 신생국들이다. 러시아의 올해 언론자유지수가 164위인 것에 비해 이들의 언론자유지수는 전 세계 상위권에 해당한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올해 언론자유지수는 세계 7위. 다른 구소련, 공산권 출신 국가들에 비해서는 말할 나위 없고 노르웨이, 아일랜드,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언론의 수준을 보여준다. RSF는 리투아니아의 언론에 대해 정부와 긴장 관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폭력적 언어 공격에도 불구하고 모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언론은 대중문화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때의  대중문화가 매스 컬처를 말하는지 포퓰러 컬처를 말하는지는 자유 언론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려는 기획자와 후원자의 첨병 역할인지, 문화 생산자로서의 대중을 광범위하게 보편화시키는 데 일조하겠다는 매개체 역할인지 판단해 볼 문제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언론 소비자들은 미리 기획되고 선택되고 가공되어 삼키기만 하면 되는 '미리 소화된' 정보에 신물이 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할 가공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는 외신을 자국 매체보다 더 신뢰하는 기이한 현상을 어쩔 수 없이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 언론들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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