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8 13:33최종 업데이트 24.03.0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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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한 방공기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 연합뉴스/AP

    
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돌을 넘겼다. 2022년 2월 24일을 전쟁의 시작으로 보면 그렇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전쟁의 피로감을 호소하며 종전 소식을 기다린다. 물론 종전은 빠를수록 좋다. 다만 모두를 만족시키는 종전 조건이 문제일 뿐이다.

전쟁의 피로감은 누구의 피로감인가. 주식의 등락, 휘발유나 밀가루 가격의 등락을 걱정하는 누군가의 피로감인가. 미디어를 뒤덮는 전쟁 이미지에 지친 누군가의 피로감인가. 선거를 앞두고 지지세 반등을 고민하는 누군가의 피로감인가.


전쟁이 가진 보편적 악(惡)에도 불구하고 지구촌 대부분이 피부로 느끼는 전쟁의 피로감은 전쟁 자체가 아닌 파생적이고 부수적인 효과에서 온다. 그리고 전쟁의 시작과 끝도 비극을 온몸으로 부딪치는 이들이 아니라 파생적 영향으로 느끼고 판단하는 이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전쟁의 시작이 과연 2022년 2월 24일인가? 전통적인 군사학적 규정은 선전포고 또는 점령이나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대규모 무기가 국경선을 통과하는 시점을 전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사회과학적으로 넓은 의미의 전쟁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이 사회 전체를 엄습하고, 경찰 대응 수준을 넘어서는 국가 안위의 위협, 심지어 영토를 빼앗기기까지 하는 비상사태가 선전포고 없이도 일어나는 것이 현대의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러시아는 이런 방식으로 우크라이나를 뒤흔들어 왔으며 그 시작은 2022년 2월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정확히 2014년 2월 20일에 시작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로마이단으로 불리는 민주주의 혁명의 환희 직후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현될 수 없는 '민족국가' 개념

우크라이나는 현대사회의 '국가'라는 정치집단이 가진 근본적 모순을 정면으로 안고 있는 나라다. 정치권력의 최대 지상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고안된 '민족국가(nation-state)' 개념은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현될 수 없는 허구의 이념이었다.

하나의 영토 안에 정치적 주권과 민족-문화적 공동체의 경계가 일치하는 국가를 민족국가라고 부를 때 이 기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국가는 아시아의 한국, 유럽의 아이슬란드 등 극히 소수다.

그나마 정치적 영토 기준으로 말할 때나 가능할 뿐 민족-문화적 공동체의 경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불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민족-문화적 경계선은 만주까지 이어지며, 아이슬란드의 경우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확장된다.

그런 신화적 이념이 유럽 국가들에 의해 합법적 지상권의 단위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극단적 배타주의를 경계하고 경제적 편의성과 복지의 보편화라는 실용적 이익을 민족적 소수자들에까지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나치 독일의 민족주의였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헌법에서마저 민족-문화적 집단 간 차별 조항을 삭제하고 정치적 영토 내에서 모든 시민의 동등한 주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럽을 중심으로 다시 민족-문화적 정체성의 경계를 정치적 지상권의 경계와 일치시키려는 민족주의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스페인의 카탈루냐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소수민족의 분리 움직임과 결정적으로 관계되는 것이 앞서 언급한 경제적, 복지적 보장 문제다. 이들의 독립(스코틀랜드, 카탈루냐) 또는 재통일(북아일랜드) 성사 여부는 유럽연합(더 정확히는 유로존) 편입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오데사 인근 라우코브카 정착촌에서 크라베츠 가족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다. 2일 있었던 주거용 건물에 대한 드론 공격으로 오데사에서 5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12명이 사망했다. ⓒ 연합뉴스

 
이 악순환을 누가 멈출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문제가 복잡한 것은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소수민족의 안녕을 국가 권력이 보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부의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의 다수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임에도 소비에트로부터 분리 당시에는 압도적 비율로 우크라이나 편입에 찬성했다. 서구화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친유럽-친러시아 세력 간의 반목과 정부의 무능, 부패가 이어지면서 이들 지역은 계속 침체됐고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특히 크림반도는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산업이 주 수입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4년 유로마이단으로 불리는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빠르게 친유럽화하는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동부의 러시아문화권 주민들은 러시아와의 관계 단절이 야기할 현실적 위기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놓치지 않은 것이 러시아였다. 크림반도를 차지하는 다수의 러시아계 주민들을 사주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하도록 하고 이내 합병하기에 이른다. 돈바스 지역에는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분리된 자치 공화국들이 들어서게 했다.

체제 균열이 커질 때, 소수의 문화 공동체는 존재의 위기를 느끼고, 자신들을 더 보호해 줄 것이라 믿는 정치적 권력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면 또 하나의 문제가 꼬리를 물고 발생한다.

돈바스와 크림반도가 러시아화할 경우 그 안의 우크라이나계는 또다시 소외된 소수 문화 공동체로 남아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을 어렵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된다.

최근 이번 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아우디이우카가 교전 9개월 만에 러시아의 손으로 넘어갔다. 우크라이나군이 퇴각하면서 이곳의 친러시아계 주민들은 해방이 됐다. 반대로 친우크라이나계 주민들에게는 악몽이 시작됐다. 이 악순환을 누가 멈출 수 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
 

지난 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한 시민이 전사자들을 기리는 추모의 벽을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모든 분쟁은 한 집단이 실존적으로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그들에게 전쟁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 2월 24일에 시작됐는가?

2022년 2월 24일은 유럽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군홧발이 자신들 쪽을 향해 다가온다고 생각한 날이다.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도 그렇다. 따라서 그들에게 전쟁은 2022년 2월 24일에 발발했다.

하지만 2014년 2월 20일 이후, 유럽이 '분쟁'이라고 부르던,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벌어져 온 사태들은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에 살고 있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계, 타타르인 등을 포함한 일군의 시민들에게 전쟁이었다.

그들에게 전쟁 2주년을 말하면 '당신들의 전쟁'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들의 전쟁은 10년을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전은 어떨까. 전쟁의 피로감을 호소하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지구촌 다수의 지역 사람들에게는 종전을 논의할 때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사선을 넘나드는 삶을 10년째 이어온 이들에게 종전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종전 협상이 이뤄지고 몇 장의 종이 위에 양국의 서명이 오가면 국제 유가와 곡물가는 안정될지 모른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 전쟁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현대의 국가라는 정치 지상권을 가진 집단 속에서 영토보전 권리를 말하는 한 민족자결 원칙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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