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9 13:20최종 업데이트 24.02.2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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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꿈새김판에 제105주년 삼일절을 기념하는 그림과 글귀가 담겨 있다. 꿈새김판에는 105년 전 3·1 운동에 참여한 우리 선조와 현재 대한민국 청년이 같은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과 "지나간 역사가 아닌 지켜갈 역사입니다"라고 적은 글귀가 담겼다. ⓒ 연합뉴스

 
일제의 강점 지배에 저항해 민중이 봉기한 3.1운동이 105년을 맞는다. 3.1운동은 한국 정치사적으로 전제정치에서 공화정치로 이행하는 전환점이 된 사건일 뿐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 발전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흔히 말하듯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은 역사학계에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어쩌면 '민족자결주의'의 사전적(본질적) 의미와 정치사적 의미 사이의 괴리가 당시 한반도에서부터 만연했을 수도 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의 '민족자결'을 미국의 대통령이 말했다 하니 당시 한반도의 피지배 민중들은 벅찬 가슴으로 기대했을 법하다.

하지만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거창한 함의와 달리 1차대전 패전국이 지배했던 식민지 처리에 관한 해법으로 나온 말이었다. 승전국 일본이 지배한 한반도는 따라서 열강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대상에 들지도 않았었다.

심지어 윌슨의 주장에 대해 같은 연합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봉기에 대한 우려 때문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결국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보름 전 시작된 파리강화회의부터는 '민족자결주의'라는 말이 아예 사라졌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의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기엔 윌슨 스스로도 민망해할 일이다. 좋게 봐서 우발적 영향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국제동향에 밝은 한반도 지식인들이 민족자결주의 대상에 한국도 포함되도록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지사들은 1차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위해 모인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주권을 빼앗긴 이들의 설움은 파리에서도 이어졌지만 적어도 독립을 향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각인하는 계기는 됐다.

그리고 3.1운동 선언문을 포함해 당시의 문건에 '민족자결'이라는 개념은 수시로 등장하게 됐다. 결국 역사적 사실로서 민족자결주의 이념은 한반도 민중들의 봉기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지라도, 스스로 역사의 중심에 서겠다는 주체적 자각이 1919년 3월 1일 역사적 거사를 일으키는 실질적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데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1차세계대전 후 강대국들이 재편한 지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민중 저항운동인 3.1운동은 따라서 민중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보편이념에 가장 부합하는 20세기 최초의 사건인 셈이다.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되는 또 하나의 가설의 주인공인 러시아 10월혁명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주로 러시아나 북한에서 더 주장되는 '10월혁명 영향설'은 그 운동이 결과적으로 야기한 세상을 볼 때 3.1운동의 가치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수단의 차원에서도 10월혁명은 무장봉기에 의한 것이지만 3.1운동은 비폭력 저항이라는 차이가 있다. 평등 세상의 이념을 훼손 없이 역사에 남긴 3.1운동이야말로 세계사에 남을 가장 큰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큰 국경일의 지위
 

2023년 3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  '전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할 뿐이요. 결코 타의 파괴에 재치 아니하도다.' …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역사에 투사히기 시하도다.' - 3.1독립선언서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3.1운동 기념일은 그 역사적 가치에 비해 평가절하된 측면이 있다. 최근 건국절 관련 논란에 휩싸이면서 더더욱 그렇다. 이념논쟁에 상처를 입을 대상이 아님에도 정작 한국 사회 내부에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다.

대체로 한 국가의 최대 기념일은 민중의 자각으로 자주 주권 선언을 한 날이거나, 외세로부터 벗어나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 이를 선언한 날에 부여된다. 전자의 대표적 경우가 프랑스, 후자의 대표적 경우는 미국이다.

프랑스의 최대 국경일은 7월 14일이며 이날은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이 주축이 돼 전제주의 구체제를 붕괴시킨 시민혁명을 상징하는 날이다. 군주제에서 공화제로의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고 상징적 기념일로 지목된 날이 그날이다.

프랑스혁명은 흔히 알고 있는 1789년보다 한 해 앞선 1788년 프랑스의 남동쪽 비질성(Château de Vizille)에서부터 시작돼 그 후 수년간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집합체이다. 그중 가장 상징적이라 판단되는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이 있던 1789년 7월 14일을 혁명 기념일이자 국경일로 삼은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7월 4일이 국경일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물론 그날 영국으로부터 실제 독립을 한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7년 후 1783년 9월 3일에 파리에서 조약이 맺어졌고 이듬해 5월 12일 발효가 돼 비로소 독립을 완성한다.

이처럼 미국의 독립 역시 수년간의 일들로 이뤄진 집합적 사건이다. 대륙회의가 독립을 결의한 것은 선언서 발표보다 이틀 앞선 1776년 7월 2일이다. 미국 의회가 독립선언 행사를 한 것은 7월 8일이다. 7월 4일이 국경일이 된 것은 독립선언서 발표가 가장 상징적 사건이라는 판단에서다.

이처럼 외국의 사례를 봐도 1919년 3월 1일은 선언서 발표와 함께, 민중들이 이 땅의 주인임을 스스로 밝히고, 외세의 압제를 거부하며, 독립을 선언한 날이라는 차원에서 가장 큰 국경일의 지위에 걸맞다.

8월 15일은 한반도의 민중이 주체적으로 무엇을 한 날이 아니라 일본의 국왕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당시의 피지배 민중들이 갖는 주관적 감격으로는 압제 36년 만에 듣는 항복선언이 가장 극적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날은 주어진 날이다.

일본이 미국 대표단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것은 같은 해 9월 2일이고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미군에 항복한 날은 9월 9일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건국절로서의 1948년 8월 15일은 국제적 사례들을 봐도 적절하지 못하다. 독립한 땅에 정부가 들어선 것을 기념한 날이라면 미국에서는 4월 30일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미국의 국경일은 정부수립이 아닌 독립선언을 기념하는 날이다.

프랑스의 경우나 미국의 경우 모두 국가가 최대의 기념일로 생각하는 날은 주체적 계급이 스스로 주권자임을 밝히고 그 땅의 주인임을 선언한 날이다. 이런 국제적 사례를 보나 세계사적 의미를 보나 한국의 3.1절은 한국이 기념해야 할 가장 의미 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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