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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수도는 앙카라입니다.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앙카라를 수도로 설정했죠. 하지만 여전히 튀르키예의 최대 도시는 이스탄불입니다. 여전히 튀르키예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튀르키예의 인구는 8500만 명 정도입니다. 이 가운데 1500만 명이 이스탄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인구의 17% 이상이 이스탄불에 거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기준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스탄불을 유럽 최대의 도시로 보기도 합니다.
 
이스탄불 시내
 이스탄불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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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규모가 큰 도시이기도 하지만, 역사가 깊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기록된 것만으로도 기원전 667년에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죠.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으니, 항구 도시로 번성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페르시아계 제국도, 그리스계 제국도 몇 차례나 이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도시는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죠. 그러던 중 기원후 330년, 이스탄불의 역사에 거대한 전기가 다가옵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를 결정한 것이죠.

사실 당시 비잔티움은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비잔티움보다 큰 도시는 곳곳에 많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움을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지역 귀족 세력의 영향력이 큰 도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 했으니까요. 그와 동시에 아나톨리아, 에게 해, 이집트 지역을 연결할 수 있는 비잔티움의 입지는 완벽했습니다.

이후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크게 번성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동방의 로마 제국은 이어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역시 함께 발전했죠.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 시절부터 '유럽 최대의 도시'라 불렸습니다. 사실 지금 이스탄불의 인구 3분의 1은 보스포러스 해협 너머 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인구를 빼면 이스탄불을 제치고 모스크바가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탄불을 '유럽 최대의 도시'라 부르는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슐레이마니에 모스크에서 보이는 이스탄불
 슐레이마니에 모스크에서 보이는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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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00여 년 동안 비잔티움은 동로마 제국과 흥망을 같이 했습니다. 특히 1204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4차 십자군이 배를 돌려 동로마 제국을 침입하기도 했죠. 당시 동로마 제국은 일시적으로 멸망했고, 학살과 탄압으로 한때 50만의 인구를 가졌던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10만 명까지 줄어들었습니다.

1261년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 니케아 제국이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면서 동로마는 재건됐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러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야 했죠. 그리고 1453년, 동로마가 마지막까지 사수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됩니다. 동로마는 그렇게 멸망했습니다.
 
동로마의 성당, 하기아 소피아
 동로마의 성당, 하기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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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로마의 멸망이 곧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은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한 오스만 제국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깁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빠르게 재건되었죠. 오스만 제국은 스스로를 서로마, 동로마에 이은 세 번째 로마로 자칭했습니다.

오스만은 동로마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인과 지식인, 기술자의 유출을 막기 위해 외국인에게 개방적인 정책을 만들었죠. 코스모폴리탄의 대도시를 만들었습니다.

16-17세기 오스만 제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발칸반도와 이집트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세 개의 대륙에 걸친 제국이 되었죠. 한때는 인도네시아에 군대를 파병할 정도로 국제적인 영향력이 컸습니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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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각지에서 발흥한 민족주의는 각지의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1830년에는 그리스가 독립했고, 이후에는 유럽 국가들의 침입이 시작되었죠.

오스만 제국은 한동안 정치구조를 개혁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등 근대화 조치에 열중했습니다. 하지만 1878년 러시아의 침입을 계기로 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기했죠.

이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으로 압둘하미드 2세는 폐위되고 헌법은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년 튀르크당은 튀르크인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민족을 포괄하는 제국으로서의 오스만은 이미 뚜렷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던 셈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1914년 1차대전에 참전합니다. 1915년에는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인 추방 사건이 벌어지면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집단 학살이 발생했습니다. 코스모폴리탄의 도시였던 이스탄불 역시 서서히 투르크인의 민족주의적 도시로 변해 갔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이스탄불에는 영국군이 들어섰죠. 승전국은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려 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튀르크인은 독립 전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1923년 10월 4일,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연합국 군대가 이스탄불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튀르키예 공화국이 성립되죠.
 
오스만 제국 술탄이 살던 톱카프 궁전에 걸린 터키 국기
 오스만 제국 술탄이 살던 톱카프 궁전에 걸린 터키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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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했듯 튀르키예 공화국의 수도는 앙카라였습니다. 하지만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천도 이후 1600여 년 동안 여러 제국의 수도로서 기능했습니다. 제국의 지배자는 때로 그리스인이었고, 때로 유럽인이었고, 때로 튀르크인이었습니다. 한때는 기독교인이었고, 또 한때는 무슬림이었습니다.

덕분에 이스탄불에는 재미있는 풍경이 남아 있습니다. 비잔틴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성당 아야 소피아(Hagia Sophia)와 오스만 제국 모스크 건축의 대표작인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죠.

물론 오스만 제국이 들어선 뒤, 아야 소피아는 내부를 개조해 모스크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때 기독교 성당이었던 건물과 이슬람 모스크가 400여 년 동안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는 사실. 문명이 교차하는 제국과 도시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만큼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을 잘 설명하는 장면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기아 소피아 옆의 기둥
 하기아 소피아 옆의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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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수립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 다시 모스크로 기능이 변경되었죠. 이것을 에르도안 대통령이 추진하는 이슬람주의 정책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것도, 모스크로 사용하는 것도 모두 튀르키예 민족이 결정할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도 과거 모스크로 사용하던 건물이 기독교 성당이 된 사례를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민족, 다종교를 표방하던 오스만 제국과 현재의 튀르키예 공화국은 다른 나라이니까요.

하지만 관용과 다양성마저 필요 없는 것이 되었을까요? 아야 소피아 옆에는 동로마 제국 시절에 사용되었던, 그리스어가 쓰인 기둥이 늘어서 있습니다. 저는 그것조차도, 지워야 할 역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튀르키예, #터키,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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