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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결국 화해와 포용이다 .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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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동생은 1년 4개월 차이로 태어났다. 연년생으로 아이 둘을 낳아 키우신 엄마는 종종 그때의 고생담을 풀어놓으시곤 했다.     

"내가 애기 분유를 먹여야 하는데 쟤가 맨날 떼를 쓰는 거야. 'J야, 동생은 어리니 엄마가 안고 먹이는 거야. J는 혼자 먹을 수 있지?'라고 달래도 말을 안 들어. 골이 날 때는 분유병을 냅다 집어던져서 나한테 혼나곤 했지. 혼을 내놓고 애기 분유를 먹이다 보면 조용해져. 뭐 하나 하고 뒤돌아보면 울다 지쳐 분유병을 물고 잠들어 있더라고."     

엄마가 자주 입에 올리시던 내 어린 시절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어릴 때는 별생각 없이 웃으면서 들었는데 커갈수록 체한 것처럼 가슴에 얹혀 넘어가지 않는 말이 있었다. 바로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라는 대목이다.     

아무리 울고 떼를 써도 엄마가 돌아보지 않으니 결국 배가 고파서 혼자 분유를 먹다 잠들었을 16개월 아기의 마음은 어땠을까. 한창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동생에게 부모를 빼앗겼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아이는 다정하게 대해주는 다른 어른들을 좋아했다. 엄격하고 무서운 엄마보다 당시 미혼이었던 이모를 더 따랐기에 이모집에서 잠자는 날이 많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내면에 작은 균열이 생겼고 그게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 충분한 애착 형성이 되지 않아서인지 나는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살면서 맞닥뜨릴 수 있는 일들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남들은 다들 척척 해내는 일을 왜 나는 힘들어 하는 걸까'라는 자책감이 들어 늘 괴로웠다.

이삼십 대에는 문제의 원인을 내게서 찾았는데 사십 대가 되니 원망의 화살이 밖으로 향했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았던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혼만 냈던 엄마의 태도와 다정한 말보다는 '사랑의 매'로 자식을 키운 부모님의 훈육방식에 대한 반발심이 뒤늦게 폭풍처럼 밀려왔던 것이었다. 갱년기에 제2의 사춘기가 찾아온다더니 내게는 한참 이른 사십 대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자신을 갉아먹는 행위인데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품고 사니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회의감, 왜 태어나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진흙탕 같은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책과 종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책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마음을 찬찬히 살피며 '존재'와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데미안> 속 문장처럼 고통의 시기를 겪고 나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고 부모님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들도 내 부모이기 이전에 그저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었다.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크신 데다 지금의 나보다 어리고 육아경험도 부족했던 부모님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셨지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신 것이었다. 완벽한 부모는 아니었지만 그분들의 희생과 노고 덕분에 지금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원망이 조금씩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요즘은 쑥스럽게 "사랑한다"라고 하신다. 생전 애정 표현을 하지 않으시던 분인데 성당 노인대학을 다니시더니 보이시는 놀라운 변화다. 진하게 달인 해물 육수, 직접 담그신 간장과 액젓, 작은 비닐 팩에 담아 얼린 다진 마늘, 손질한 시래기 등에 따스한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내신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늘 음식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셨다. 살가운 말은 못 하셨지만 끼니때마다 차려지던 풍성한 밥상에는 엄마의 애정이 그득히 담겨 있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결국 화해와 포용이다. 지금보다 힘들었던 시절, 애쓰며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제 그 시절의 부모님을 두 팔 벌려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제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화해, #상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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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와 책 리뷰를 적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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