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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이태원참사 100일 시민추모대회에서 인권침해감시단이 피해자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2월4일 이태원참사 100일 시민추모대회에서 인권침해감시단이 피해자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 공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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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은 창자가 끊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은 직접 겪지 않으면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단장지애(斷腸之哀)와 천붕지통(天崩之痛)일 것이다. 단장지애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을, 천붕지통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고통으로 부모를 여의는 슬픔을 비유한다.

"박완서 선생은 1988년 부군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석 달 만에 생때같은 외아들을 갑작스런 사고로 잃었다. 단장지애는 극심했다. 아들을 따라 죽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했고 이런 고통을 안겨준 하늘을 원망하며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말씀만 하소서!" 신을 죽이고 또 죽였다."(<감정 어휘> 중, 유선경 지음)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말씀한 하소서!"라는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절규는 이태원참사 유가족이 내 자식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외침과 다르지 않다. 신에게도 따져 물어야 할 질문인데, 사회적 참사로 유일무이한 존재를 한순간에 잃은 피해가족으로서 참사의 원인을 따져 묻는 것은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이다.

"재난이란 사전 경고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문화 속에서 축적된 위험 요소들이 한꺼번에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서 한 사회의 하위 체계의 존속을 위협하는 사건"이라는 지형 공간정보체계 용어사전 정의처럼, 재난은 불운이나 우연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재난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켜켜이 쌓여있고 긴 사슬처럼 얽혀있고 잇대어 있다.

유엔은 재난 피해자에 대한 피해지원 원칙과 가이드라인을 여럿 제시했다. 인권 기반 접근(Human Right-Based Approach, HRBA), 자연재난 상황에서 사람의 보호에 관한 IASC 운영 가이드라인, 유엔 피해자 권리장전(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의 피해자 구제와 배상에 대한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 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이행원칙 등이다.

특히 유엔 피해자 권리장전은 진실에 대한 권리, 정의에 대한 권리, 배상에 대한 권리를 제시했는데 사회적 재난 피해자 권리보장 차원에서 더 유의미하다. 세 가지 권리 모두 중요하지만, 우선 진실에 대한 권리만 보자.

진실에 대한 권리는 재난과 인권침해를 둘러싼 사실과 정황뿐 아니라 그 원인과 연루된 권력에 대한 진실까지 포함한다. 직접 원인이 참사를 직접 초래하고 시간상 가장 최근의 사건과 조건을 말한다면, 근본 원인이란 직접 원인보다 앞선, 직접 원인을 일으킨 심층적 조건과 환경을 가리킨다.

사회적 재난 피해자는 재난을 일으킨 직접 원인뿐 아니라 근본 원인까지 알 권리가 있다. 쉽게 말해, 피해자가 납득될 때까지 묻고 따질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피해자 권리'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 낯선 단어이다. 하지만 피해자 권리장전은 2005년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돼 널리 통용되고 있다. 국가는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할지 말지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라, 피해자 권리가 보장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 담지자이다. 피해자 권리 보장은 선택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에 대한 권리와 더불어 애도와 추모 또한 피해자 권리의 핵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살아있는 한 극복하기 어렵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효과가 없다. 비탄에 빠진 이에게는 충분한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고 진심 어린 위로와 다정함이 필요하다.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러한 마음과 태도로 대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거늘, 이상하게 한국 사회에서는 유독 사회적 재난 피해자들에게 막말과 지독한 인신공격을 가하는 일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한 유튜버는 굳이 이태원참사 시민분향소에 찾아가 부적절한 말을 내뱉으며 유가족의 가슴을 후벼판다. 추모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무엇보다 국가가 잘못을 시인하여 개인의 잘못으로 몰고 가는 왜곡된 여론을 불식시키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중요한 의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피해회복의 시작이기도 하다.

지난 4일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시민분향소를 녹사평역 인근에서 서울시청광장으로 옮겼다. 서울시는 불법이라며 강제 철거하겠다고 계속 겁박하고, 심지어 시청광장 분향소 설치 찬반 여론조사까지 했다. 서울시는 참사에 대한 책임이 있고, 피해자 권리가 보장되도록 적극적으로 피해지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추모의 권리는 서울시가 선택적으로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아직 법·제도상 재난 피해자에 대한 정의도 없고 피해자 권리라고 성문화된 것도 없다. 피해자 권리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고, 피해자 권리 침해가 일상이 되고 있다. '피해자 권리', '피해자 중심'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조금 더 성숙한 사회에 살고 싶은 개인적 바람을 보탠다.

태그:#이태원참사, #피해자권리, #시민분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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