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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1863-1949) 선생 탄신 160돌 축하 기념식에서 축시를 낭송하고 있는 성명순 시인
 호머 헐버트(1863-1949) 선생 탄신 160돌 축하 기념식에서 축시를 낭송하고 있는 성명순 시인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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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서울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헐버트 묘역 앞에서 성명순 시인의 축시가 낭독되었다. (사)헐버트기념사업회(김동진 회장)에서 개최한 헐버트 선생 탄신 160주년 기념식이었다. 가끔 눈발이 날리는 매서운 추위였지만 50여 년을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헐버트 선생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25명이 함께 자리했다.

푸른 눈의 청년이 본 새 아침/성명순

드리운 저녁노을이 너무 두터워
해가 지고 밤이 오면
다시는 아침이 올 것 같지 않던
동방의 작은 나라

게딱지 같은 초가지붕이 이마를 마주 댄
고샅길을 걷던 청년의 푸른 눈에
섬광처럼 나타난 보석
사람의 말소리마다 꼭 맞춰 옷을 입힌 소리글자

닿소리 곁이거나 아랫자리에
홑소리를 붙이면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소리의 바다
이 글자를 지닌 민족이 머잖아 펼칠
새 아침을 그는 보았네

진흙 속의 옥을 갈고 닦아
바른 소리 바른 글자로 기둥을 세우고
초동급부도 더 너른 세상에 눈을 뜨라고
한글로 풀어쓴 사민필지(士民必知) 닫힌 문을 열어
새로운 빛으로 일렁이게 하였던 이방의 청년

자신의 태를 묻은 땅보다
흰옷 입은 순박한 웃음의 땅에 묻히기를 원하여
우리와 함께 그 영원한 숨결을 나눌지니
오늘도 온 누리에 종소리처럼 우렁찬
한글 사랑의 정신


지난해 말에 <시시하게 살자>(문학과 사람)라는 이색 시집을 낸 성명순 시인을 행사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헐버트의 많은 업적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한글 관련 업적을 최근에 알게 돼 헐버트기념사업회 요청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 섬세한 우리말과 한글을 시로 노래하다 보니 160주년 축시를 쓰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시인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선생을 인제야 안 자신이 부끄럽고, 국가 차원에서 성대하게 치러야 할 생일 축하식을 이렇게 조촐하게 치르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시시함과 시상
 
손바닥 책으로 펴낸 성명순 시인의 시집 <시시하게 살자> 표지
 손바닥 책으로 펴낸 성명순 시인의 시집 <시시하게 살자> 표지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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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게 살자> 시집을 이색 시집이라고 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는 일반 시집과 다른 판형 때문에 그렇다. 그야말로 손바닥 책이라 앙증맞고 호주머니에도 들어갈 크기라 시를 더 가까이하게 하는 시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가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누구나 시집을 끼고 살았다.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학 전공과 관련 없는 학생들도 겉멋인지는 몰라도 시집 한 권 정도는 늘 품고 다녔다. 데모가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늘 최루탄 가스로 매캐한 캠퍼스였지만 끼고 다니는 시집이 살벌한 시대를 이기게 하는 힘이었고 낭만이었다. 

두 번째는 시 제목이 주는 역설적인 인상 때문이었다. 시시한 생활은 벗어나고 싶은 것이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런 '시시한 삶'에서 행복을 길어 오르고 있었다.

시시하게 살자/성명순

시시하게 살자
문지방을 넘기조차
힘겨운 저녁이 있다.
그런 저녁이 오히려 참 시시하다.
옷장 앞에서 설레던 아침의 망설임도
거울에 번지던 립스틱의 종알거림도
여름날 저녁 은빛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쓰르라미의 울음만큼이나 시시하다
내 하루는 저 울음보다 빛이 났던가?
이제 부질없는 욕심은
접을 때가 되었음을 안다
시시하게 사는 일이 가슴을 적시는 저녁
그렇게 젖은 가슴이
셀로판지처럼 빛나던 시간들보다
오히려 더 소중함을 이제는 안다
그래, 시시하게 살자


시인의 이런 노래가 아니어도 시인은 시시한 삶을 시시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모든 시인이 그러하지만, 성명순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더욱 그러한 도드라지게 느끼는 것은 아마도 공공언어 바로잡는 일을 하는 필자가 반할 정도로 시어와 시문이 쉽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시함은 시시함이 아니라 쉬움이고 포근함이었다.

세종대왕과 더불어 헐버트 선생이 위대한 것은 바로 시시한 모든 것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한글을 발명하고 그 가치를 알아보고 널리 알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성 시인의 시 제목이 시시해 보이지 않았고 '시시함'의 '시시'가 시의 시로 보였다. 헐버트 선생은 1886년 23세에 한국에 와서 26세 때인 1889년에 한글과 한국말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해외에 알린 세종대왕 이후 처음으로 한글을 중흥시킨 외국인이다 (김슬옹, '헐버트(Hulbert), "The Korean Language(1889)"의 한국어사·한국어학사적 의미', <한글> 83권 3호, 한글학회)

수원성 곧 화성을 품고 있는 수원에서 오래 살고 있는 시인의 "화성(華城)의 아름드리"를 보면 시인이 시에서 무엇을 노래하고 싶은지가 드러난다.

"십팔만칠천육백 덩어리/돌을 쌓아 올린 성의 이름은/꽃처럼 아름답다 수원 화성/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였나니/이제 새로이 일백이십만 손길을 모아/성 한가운데 베틀을 놓는다./지극 정성으로 짠 문화의 비단 물결/온누리 모든 이의 가슴에 수를 놓고/그대가 보듬은 풀 한 포기/내가 피운 꽃 한 송이가 손을 잡아/내일의 이 성의 주인에게 물려줄/당당한 문화의 아름드리로 자란다."(시의 일부)

이 시는 화성을 보고 쓴 시가 아니라 성 공사 과정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역주"(수원 화성박물관, 125쪽 참조)를 보고 노래한 시다. 필자도 읽은 그 책은 성축조 공사에 사용된 돌의 수와 동원된 일꾼 수와 이름까지 나온다. 늘 보는 화성이지만 돌 하나하나에 스며 있는 보이지 않는 그 고된 과정을 보았던 것이다.

가까운 카페에서 성명순 시인과 이야기를 더 나눠 보았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 시인

- 김우영 평론가 해설대로 일상을 시로 만드는 힘이 대단하다. 일상에서 늘 시를 생각하는가?
"일상에서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가 구도자라면 시 작업도 어찌 보면 마치 구도의 길 같은 게 아닐까요. 특별한 종교적 의식이 없을 뿐이지. 그 의식은 그냥 사소한 일상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캐는 거죠."

- 화성성역의궤 역주에서 시를 길어 올려 많은 감동을 받았다. 화성보다 화성을 지은 과정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화성이라는 구조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그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그 속에 깃든 모든 사람의 정성과 희생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리적 구조물로서 화성은 누구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안에 깃든 사람의 뜻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보려고 노력했을 뿐이죠."

- 시가 쉽고도 깊이가 있다. 언제부터 시인이 되고자 했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아득히 먼 어린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가령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담임선생님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다음에 더 공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조언 등등 그리고 글짓기 시간이면 늘 주목을 받던 아이 정도라고나 해둘까요. (웃음) "아 나는 시인이 되겠다"라고 특별히 따로 마음을 먹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 요즘 시를 잘 안 읽는다고 한다. 시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1980년대는 많은 이들이 시집을 끼고 살았다.)
"맞습니다. 서점에 가도 시집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시대의 분위기를 탓해서는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야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독자들 곁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문학과 사람> 손바닥 시집 시리즈가 사실은 그런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시집을 선물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 올해는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 특별히 더 쓰고 싶은 시가 있는가?
"특별히 어떤 방향으로 쓰고 싶다는 것은 없습니다. 늘 그래 왔듯이 성찰과 사유로 내면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깊게 그리고 넓게 갖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러다 보면 써지겠죠. 다만 우리의 고유어가 지닌 아름다움을 더 갈고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은 해 봅니다."

- 이번 시집은 몇 번째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
"4번째 시집이지요. 코로나 덕도 보았다면 욕먹을 소리일까요. 아무래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물음과 답이 시가 된 것이고 쌓이다 보니 한 권을 다시 묶어야 또 새로 시작하겠다 싶어 정리의 의미로 묶었을 뿐입니다."

시시하게 살자

성명순 (지은이), 문학과사람(2022)


태그:#성명순, #헐버트, #시집, #한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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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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