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각자가 지닌 상이한 기억과 경험 속에 갇힌 맛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눕니다.[기자말]
맛의 경험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서울 청계천에서 직접 촬영
 맛의 경험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서울 청계천에서 직접 촬영
ⓒ 김세원

관련사진보기

 
사회의 입맛이 점점 더 스펙터클해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집밥보다 외식비가 더 값싼 시대를 맞은 가계부의 아이러니가 포진해 있다. 집집마다 달랐고, 마땅히 달라야 했을 입맛도 그로 인해 삽시간에 평준화되고 있다. 더욱 달고 짜고, 덩달아 더 매운 것이 제일이 되어간다. 문제는 그 자극적인 맛을 결정하는 권리마저 가격에 매여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와중에 서민들에겐 생소한 전통 반가 식품인 어란(魚卵)은 여전히 백화점에서나 볼 법한 귀한 명품으로 대우받고 있다. 꽤 독특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대형마트나 창고형 매장에서 명란젓은 팔아도 어란은 팔지 않는 모습을 보면 더욱.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한국인이 명란을 식재료로 인식하기 시작한 기점은 명태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1741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임금, 영조의 시대였다.

문헌에 명란젓과 그 조리법이 처음 등장한 때는 이처럼 조선 후기다. 그러나 국내에서 명란젓을 생산하는 기업 가운데 한 곳인 '덕화명란'의 웹페이지를 보면 명태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주장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어떤 생선의 외양을 묘사하는 단어로 보이는 '무태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후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1652년도 기록에 '명태란'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고, 이후부터 조선의 국가 공식 기록에서는 무태어를 '명태'라는 단어로 일관되게 서술했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보인다. 이는 명태가 1800년대 이후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잡는 주요 어종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할 만큼 명란 가공 산업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히구치 상점이 조선 부산부에서 받은 명란젓 교역 관련 문서
▲ higuchiletter 히구치 상점이 조선 부산부에서 받은 명란젓 교역 관련 문서
ⓒ gpi.sakura.jp.net

관련사진보기

 
이와 관련해서 1900년대의 조선에서 순사로 근무하던 사람이 설립했고, 부산에 거점을 두고 식민지 한국의 명란을 일본으로 유통해 부를 축적했던 '히구치 상점'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보려 한다.

일본인 히구치가 "원산항에서 어업을 하던 조선 사람들이 명태의 알은 주머니째 떼서 버리고 몸통만 가져가더라"는 모습을 보고 명태의 알, 명란을 가공해서 팔아먹을 방법을 궁리했다는 내용. 솔직히 궁금했다. 정말 조선 사람들은 명태나 명란젓을 먹지 않았을까?

조선 전기부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후기, 그리고 말엽으로 넘어가게 되면 사실상 지구 자체의 역사로는 소빙하기에 접어든다. 흉년과 대홍수가 몰아치고, 도무지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척박한 환경의 조선 반도가 되어버린 것도 바로 이 소빙하기에 접어들어 기후부터 이전과 달라져버린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 가운데 본래 먹던 식재료를 더는 구할 수 없거나, 내지는 지나치게 값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새로운 대체재를 찾아야 했을 것 같다.

1800년대 조선 말엽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지어진 작자미상의 조리서 <시의전서 (是議全書)>에 명란젓을 담그는 방법과 활용법에 대해 나온다. 사실 지금과 차이가 많지는 않다.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한 장면. 영암에서 8대를 이어온 숭어 어란.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한 장면. 영암에서 8대를 이어온 숭어 어란.
ⓒ KBS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어란은 어떨까? 생선의 알꾸러미를 재료로 쓴다는 점에서 어란과 명란젓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지만, 그 제조 방식을 면면히 따지고 훑어보면, '이렇게나 다른 요리였다고?'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숭어, 대구 등의 알을 간장에 하루 정도 재웠다가 꺼내 건조시킨 다음,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두고 표면에 수시로 참기름을 발라 다시 2차로 말린다. 대략 20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야 우리가 아는 '어란'의 맛이 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어란은 두 번의 건조 과정을 통해 알꾸러미의 겉표면이 쫀쫀하게 차지고 단단해진다는 데 있다. 식감은 압착 프레스 햄과 꾸덕하게 말린 쵸리조나 살라미 사이의 어딘가.

반대로, 소금에 절여 삭히는 방식으로 만드는 명란젓은 이보다는 좀 더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다. 당연히 손질해서 밥상에 내는 법도 달라진다. 명란젓의 경우 레시피에 따라 알을 흩뿌려 놓는 방식도 통용되지만, 어란은 아니다.

만드는 재료 역시 다르다. 어란은 좀 더 단단한 대구나 숭어의 알을 쓰지만 명란젓의 재료인 명태의 알은 그보다 알꾸러미 자체의 경도가 약하다. 따라서 상하기 쉬운 탓에 소금에 절여 삭히는 지금의 조리법을 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원물의 차이와 공정상 귀찮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 이 음식을 수용하고 향유하는 계층이 본래는 전혀 달랐다는 추정과도 맞물리기 때문이다.

물론 부를 축적한 상민들은 어란을 즐겨 먹었을 수도 있고, 양반이라고 해서 반드시 명란젓을 먹지 않았을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어란은 '건어란'이라고 해서 당시 임금에게 백성들이 바치는 진상품이었지만 명란젓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주된 향유층이 달랐다는 해석은 가능하지 않을까. 비유하자면, 돼지 기름을 정제한 라드를 발라 구워낸 요리를 먹고 살았던 중세 유럽의 귀족이 '마늘 냄새'와 '소 기름(=버터) 냄새' 진동하는 농노를 보는 느낌으로.

색 바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처럼 사회적 짠맛이 점점 더 고공행진하고, 그 규범에 따라 가가호호 개인들의 입맛마저 점점 획일화되고 지갑의 두께에 맞춰 구획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집과 가방과 시계 그리고 자동차보다 더 먼저, 맛에 대한 경험이 먼저 우리 후세대가 마주할 사회와 연대를 가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런 부분에서 이 사회는 벌써 서로가 서로를 엄격하게 밀어내고 있다. 아파트의 네임밸류, 학군, 부모의 스펙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제는 그 상황에 맛에 대한 기호마저 자신의 경험으로 채워나갈 수도 없게 되는 거다. 간편식(HMR)으로 쉽고 저렴하게 끼니를 해결하며 맛에 대한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외치고 싶다. 이럴 때일수록 점점 더 틀에 박혀 딱 맞아 떨어지는 자극적인 맛에 획일적으로 순응하지 말자고. 그리고 맛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말자고.

태그:#식도락, #맛, #미식인문학, #역사, #명란젓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가 사는 이 도시와 일상도 여행이 된다는 걸 믿는 일상여행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