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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빨치산으로 몰려 고문 받고 정신줄을 놓았어요. 어릴 적 전해들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마흔 살까지 이 얘기를 입밖에 내본 적이 없었죠. 일찍 시골을 뛰쳐나온 건 그 때문이고요. 가난에 부친의 행불, 이런 질곡이 저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을까요? 뛰어난 기교는 서툴러 보인다(大巧若拙)는 노자 말씀을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양평군 지평면 무왕3리에 사는 조병완 한국화가(66·남)의 말이다. 17일 저녁 지평에 있는 그의 화실에서 마주한 조 화백은 조금 까칠한 모습이었다. 몇 군데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무왕3리 집으로 모으고 화실 역시 거기 꾸미려고 허름한 농가를 개조하느라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 곳은 대학 강사와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던 20여 년 전 마련한 그의 피란처. 조용한 곳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에 찾은 곳이다. 빌딩과 시멘트에 갇혀 사는 게 싫었고, 무엇보다 도시를 탈출하고 싶었다. 지인의 귀띔으로 와 봤는데 첫눈에 반했다. 이 농가와 지평면 소재지 28여 평의 화실까지 구했다.
 
조병완 화백.
 조병완 화백.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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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재찾기' 시건방진 대학생활

"여기 들어오기까지 많이 헤맸어요. 가족이 거주하는 집과 고양의 화실, 그리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지평에 정착하기로 한 거죠. 더욱이 아내와 불화로 10여 년 전부터 따로 사는데, 그 뒤에 친하게 지내던 외동딸(대학 교수)마저 등을 돌려(아빠에게 이혼 책임 있다고) 충격이 컸죠. 고민 끝에 마음을 정한 겁니다."

그의 미술세계가 궁금해 물으니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마음찾기'란다. 그가 미술공부를 하던 80년대 화단에서는 한국화(동양화) 정체성 논란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더 시급한 게 '자신의 존재 찾기'였다. 대학(대학원 포함) 다닐 때부터 그는 학교 공부와 다른 그림을 그렸다.

"제가 시건방졌던 모양입니다.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에 입학했는데 너무 실망했거든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림이 별 게 아니라 여겼죠. '발로 그려도 그 정도는 한다'며 까불고 다녔고, 교수와 잦은 마찰을 빚었죠. 그렇게 저만의 미술세계로 파고들었죠. 벽화 부조 등으로 한국화 규격을 파괴하는 그림을 혼자 공부했어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알바나 취업이 여의치 않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를 마치면 일자리가 괜찮다는 권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공부는 화단 흐름과는 계속 엇나갔다. 석사 논문도 '선사상과 회화'였다. 그는 '마음찾기'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호랑이 그림을 그렸다. 민화에서 착안한 것인데, 현실 기원을 담았다고 했다. 나쁜 기운이나 잡귀를 물리치는 수호신(辟邪)으로 호랑이를, 길상(吉祥)으로 까치를 묘사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을 지키려고 고생'하는 역할에서 '즐기는' 호랑이가 어떨까 싶었던 것. 그만의 상징그림이 된 스케이트 타는 호랑이, 영화 보는 호랑이, 그림 그리는 호랑이 등은 그렇게 탄생했다.
 
조병완 화백의 그림 '돌부처와 얘기하는 호랑이'.
 조병완 화백의 그림 "돌부처와 얘기하는 호랑이".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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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그림에 집착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빨치산으로 몰려 광인(狂人)로 살다 행방불명된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수호신이 간절했던 처지가 미술에 투영된 것. 고생한 수호신에게 즐거움(위안)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의 살길을 찾는 구도(求道)였던 셈이다.

호랑이 그림에 현실기원 익살맞게 담아

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 때 행방불명됐다. 그러니 부친 관련 기억도 몇 안 된다. 당숙을 만나러 광주(전남)에 갔다가 빨치산으로 몰려 고문 끝에 정신병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손발을 묶어 갇혀 살았는데 사라졌다는 전언까지가 전부다. 그가 서둘러 고향을 도망쳐 나온 것도 이런 가정사 때문이었다.

고교 졸업 뒤 무작정 상경을 했다. 먹고 살려고 여러 일을 했는데, 그림에 소질이 있던 그는 인두화(인두로 그리는)에 꽂혔다. 재능을 인정받았고 구미 금오산 국립공원 출입시설 벽면을 얻어 그림을 전시하고 팔았다. 돈벌이가 괜찮았다. 그 때 재능이 아깝다며 미술대학에 가라는 주변 권유에 6년간의 사회생활을 접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림에 재능이 있어 자연스럽게 회화를 시작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애초 또 다른 꿈이 있었다. 고교시설 모촌(暮村, 해 저무는 마을)이라고 자신의 호를 지었을 정도로 문학소년이었다. 마흔이 돼서야 늦깎이 시인이 됐다. 평생교육 강사(시인)으로부터 배워 시집 '빈말과 헛말 사이에 강이 흐,'(60편 시)를 내기도 했다. 시와 그림은 그의 '마음찾기' 동행자였던 것.

보헤미안 예술가 구스타프 말러의 걸작 교향곡 '대지의 노래'도 어찌 보면 '마음찾기'에서 나왔다. 1907년 독일 시인 한스 베트게가 번역 출간한 고대 중국시집(이백 맹호연 등) '중국의 피리'에 영감을 받았다. 4살 딸을 잃은 말러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에 공감해 작곡한 것. 특히 6악장 고별은 왕유(송나라) 시 '송별'을 담았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숨어 살려고 남산 언저리로 간다네/ 그렇다면 가시게나, 더 묻지 않으리/ 흰 구름 다할 때가 없으려니..."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23회의 초대·개인전, 2백여회 기획·단체전을 가진 중견 화가다. 홍익대 경희대 등에서 시간강사를 했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겸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경기도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올해에도 인천 갤러리 마리타임에서 초대 개인전을 4~5월 열었다.
 
조병완 화백의 화실 벽면. 지금 막 리모델링 중이다.
 조병완 화백의 화실 벽면. 지금 막 리모델링 중이다.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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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그림)의 끝은 어디냐는 물음엔 "아직 모른다"고 했다. 대신 그를 롤모델로 삼는 한 후배에게 해준 말을 전했다. 재료비와 밥걱정만 없다면 여기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했던. 노자의 말도 덧붙였다.

'크게 이룬 것은 흠 있어 보이지만 아무리 써도 해지지 않으며, 꽉 찬 것은 비어보이지만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 고도로 숙련된 것은 서투르게 보이고(大巧若拙)...'

2백회 넘는 초대·개인·기획전 중견화가

홍운탁월(烘雲拓月)이란 말이 있다. 구름을 잘 그리니 달이 보인다는 말.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그의 유명한 시 적벽부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차고 비는 게 달과 같아/ 끝내 줄지도 늘지도 않으니... /바람과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그림.../ 가져도 금하지 않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덧붙이는 글 | 인터넷저널(http://m.injournal.net/123814)에도 실립니다.


빈말과 헛말 사이에 강이 흐,

조병완 (지은이), 시인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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