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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제 르포소설 <여수역>(2020)
 양영제 르포소설 <여수역>(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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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의 노래 'imagine'을 듣다 보면 '국가가 없는 세상, 살해를 하거나 죽지도 않는, 소유나 기아도 없는 세상'이란 부분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무정부주의 테러리즘으로 혼용해서 부르는 아카니즘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벤자민 터커는 "만약 개인이 스스로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면, 모든 외부 정부는 압제다"라고 아나키즘을 정의했다.

그 외에도 아나키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데, 요약하면 개인을 억압하는 일체의 권력이나 제도에 항거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해체, 저항을 기조로 하는 미국의 히피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더 거슬러 올라가 니체까지 모두 아나키즘에 포함시킬수 있고 우리의 독립운동, 5·18 광주항쟁, 프랑스의 68운동까지 모두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양영제 소설 <여수역>(2020)의 핵심 내용은 바로 '여순사건'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민중의 '배고픔'에서 비롯된 아나키즘적 저항이었다는 것이다. 해방을 맞아 이제 굶주림에서 벗어났다는 기대감과는 달린 미군정청은 일제와 같은 미곡수집령을 다시 내리게 되고, 민중은 급기야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대구를 시작으로 일어난 배고픔의 민중봉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고, 그 가운데 여순사건이 포함되는 것이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폭거에 대항한 것은 순수한 아나키즘이지 결코 좌파나 공산당에 의한 국가전복시도가 아닌 것이다.

여순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해방정국을 추(追)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38선을 기점으로 이남엔 미군정청이 자리한다. 그들을 등에 업고 민중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합당한 명분을 만들어야 했고 그것이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덧씌우기였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이승만 정권에 거슬리는 인사나 행동은 죄다 '빨갱이'로 몰아 척결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발한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명에 항거해 여수주둔 14연대 일부 좌익 군인들과 좌익 시민들이 가세해 일으킨게 여순사건인 것이다.

"나라가 일제에 해방되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해방이 되자 조선사람들이 착각한 것이 두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굶주림에서 해방이고 또 하나는 압제에서의 해방이었다...말이 해방이지 조선 38도 이남은 미국의 점령지였다...미군정 행정을 담당하는 미군청을 갑자기 일제강점기 시대로 되돌아가서 배급제를 하겠다며...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되는데 오히려 일제강점기보다 더 굶주려갔다...'쌀을달라. 쌀을 주는 우리 정부를 세우자'"

여순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은 여수 시내와 순천까지를 점령하고 계엄령이 내려지자 광양 백운산과 섬진강 건너편의 지리산으로 퇴각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빨치산'의 원류가 된다. 14연대와 좌익 시민들에 의해 우익 150여 명이 죽었다. 그에 반해 계엄군에 의해 죽은 양민의 숫자는 거의 1만 명 안팎으로 집계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하겠다.

그렇게 여수 인민위원회가 꾸려지고 10월 19일 밤에 군인들이 여수경찰서와 관공서를 접수하자 시민들은 세상이 바뀌었다 생각하고 다음날 여수 중앙동에서 인민대회를 개최한다. 인민위원회는 곧바로 의장단 선출, 곧바로 혁명 과업 6개항을 발표한다. 주요내용은 친일파 청산과 주민을 위한 식량 배급 및 금융 대출이었다. 인민대회 후 인민위원회는 군인들이 빠져나간 여수의 행정공백을 메우기 위해 활동했다.

이처럼 여수인민대회는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주민들을 기아상태로 방치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항거였다. 그래서 작가는 이를 '인민항쟁'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배고픔에 대한 항거, 외세를 등에 업고 국민에게 이데올로기의 덫을 씌워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는 억압적 정권에 대한 항거, 이것은 다름 아닌 순수한 아나키즘의 증례인 것이다.

소설의 전반을 배고픔의 항거라는 아나키즘적 민중 항쟁이 차지하고 있다면 후반은 그것을 억압, 테러하는 '국가폭력'에 할애되고 있다. 여순사건은 좌익일부군인과 시민에 의해 촉발되었건만 왜 무고한 양민을 도륙했단 말인가.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 합당한 보상이나 사과가 없다는 것은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하소연할 수 없었다. 반란 지역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작가 양영제는 '지역죄의식'이라 명명한다. '반란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 사는 불온한 사람'이란 뜻이다.

배고픔과 이승만 정권의 폭거에 대항한 인민대회는 이틀 후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막을 내리고 여수는 살육의 도가니로 변한다. 

"도륙은 계엄이라는 계시를 받자마자 주저없이 일어났다...어린아이가 앞잡이가 돼서 총 같은 것으로 살인과 방화를 했기 때문에 아동까지 철저하게 조사하여 엄단하지 않으면 자멸이 있을뿐이라는 이승만의 담화문이었다. ...운동장은 죽음의 수용소였다. 수용소에 끌려가서 죽든지, 아니면 집에 남아 불에 타 죽든지, 그도 아니면 이탈하다가 총에 맞아 죽든지, 어떤 식으로 죽느냐만 남게 되었다. 그 죽음의 잔치에 여수시민들 생명은 사케르에 불과했다. 건드리면 전염되는 전염보균자 사케르를 방관하면 이승만의 담화문처럼 공멸이 되므로, 모두가 절멸되지 않으려면 사케르 생명체는 소각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부조리하고 근거없는 부역자 심사가 끝난 뒤 무자비한 도륙은 계속되었다.

"저항할 기력도, 의사도, 능력도 전혀 없는 벌거벗은 생명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목을 벤 김종원 대위든...국가가 국민을 숙주로 삼아 배양한 괴물이었다...거대한 악에 편입하게 되면 악에 맞는 견해가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견해가 지배적인 가치로 형성되면서 사람의 기존 가치관을 파괴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스스로 교정하거나 이탈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악의 설계자는 국가였다."

요약하면, 여순사건 속에서 양민학살은 지지 기반이 약한 이승만 정부가 설계하고 친일 행적을 씻어내고자 하는 야욕을 가진 친일 부역자들이 벌인 처참한 카니발이었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행한 최초의 양민학살이자 국가 폭력이었다. 그리고는 여순 사람들을 국가에 대한 반역을 도모한 불순한 지역민으로 낙인 찍어 평생을 주눅들어 살도록 억압했다.

쌀을 달라고 외치고, 이를 폭력으로 억압하는 친일 부역경찰에게 비난을 가한 인민대회 역시 반역행위일 수 없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권은 여수시민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런 비극적 사건을 작가 양영제는 르포 형식을 빌려 여순사건 생존자, 관련 자료, 취재를 병합해 써냈다.

참고 자료 :
- 이병수 외, <기억과 증언 : 소설로 읽는 분단의 역사>(씽크스마트, 2020)
- 양영제, <여수역>(개정판)(좋은땅, 2020) 
- 양영제 강연 '여순사건 바로알기'(2022) 등

덧붙이는 글 | 브런치와 여수넷통뉴스에 실렸습니다. 프레시안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여수역

양영제 (지은이), 좋은땅(2020)


태그:#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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