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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검색창에 '이기적'이라고 썼다. 검색 돋보기를 누르기도 전에 검색창 아래에 연관검색어들이 주루룩 뜬다. 가장 먼저 이게 나온다. 포털 사전에서 '이기적'을 검색해도 마찬가지다. 단어 뜻 아래에 줄줄이 나오는 응용 표현들 중 이게 가장 위에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의 인기는 40주년판까지 나왔다는 데에만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기적 인간, 이기적 행동 등을 제치고 '이기적'과 쌍을 이루는 1순위 단어가 '유전자'라니.

인간은 프로그래밍된 로봇 운반자?
 
'이기적 유전자'
 "이기적 유전자"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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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는 이 책의 방점이 '이기적'이 아니라 '유전자'에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독자 입장에선 '이기적'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일상에서 쓰일 땐 한 사람을 내리 찍는 느낌이다. 게다 도킨스는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기계라고까지 말한다. 초판 서문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다.

이기적, 맹목적, 프로그램된, 로봇. 듣기에 유쾌하지 않은 단어들이 거듭 반복된다. 책의 첫장부터 읽는 이의 오기를 건드린다. 게다가 이 책의 앞에선 유전자의 행동을 어떤 목적의식을 가진 존재인양 의인화해서 설명한다. 유전자는 그들이 머물고 있는 개체의 행복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기 복제를 통해 세대를 건너 확산되기만을 원하는 존재로 보인다.

뇌와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뭔가 좀 찝찝하다. 유전자에게 조종당하는 별 것 아닌 존재가 된 기분이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이 찝찝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엔 이 책을 읽으며 내 나름 정리한 생각이 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기가 엄마의 젖꼭지를 빠는 것, 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의 사랑을 나눠 갖기 싫어서 엄마에게 달라붙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그게 아기의 생존 본능임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이기적이라는 표현을 쓰자면 생존을 위한 그 정도의 이기성은 갖고 태어난다.

유전자의 이기성도 그것의 존재 이유에서 비롯된다. 즉, 끊임없이 살아 남아 퍼지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처럼 어떤 의도를 갖고 그걸 행하는 건 아니다.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아빠의 곱슬머리 유전자를 물려 받으면 내 머리는 '그냥' 곱슬머리가 된다. 엑셀에 숫자를 넣고 더하기나 빼기 기호를 넣으면 바로 답을 알려주듯이.

유전자 자체는 목적 의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생존이라는 본질 때문에 이기적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존재하기 위해 자신을 담을 그릇 즉 생존기계(인간을 비롯한 동식물, 미생물, 박테리아 등 모든 생명체)를 필요로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를 통해 살아남도록 '선택된' 수많은 유전자들은 나라는 생존기계를 만들어 지금껏 그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 나라는 생존기계가 파기되어도 내 아이를 통해서 생존해나간다. 이것이 이 책 제목의 후보 중 하나였던 '불멸의 유전자'가 갖는 의미다.

다만 자연선택을 통해 어떤 유전자는 개체의 세대를 건너 오래도록 살아남고 어떤 유전자는 사라진다. 그래서 비정한 경쟁의 세계다. 개체든 유전자든 살아남는 과정 자체는 이기적이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부름을 받아야 하고, 나라는 개체는 엄청난 확률을 뚫고 태어난다.

이타주의는 이기적 유전자와 모순되는 것?

그런데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나 동물이 왜 이타적인 행동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해선 도킨스가 이 책 전체를 통해 계속 답변해 나간다. 이기적 유전자론이 이타적으로 보이는 동물 개체의 행동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새가 포식자를 발견한 후 경계음을 낸다. 이건 인간의 눈에는 이타주의로 보인다. 자신이 발각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다른 새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이타주의에 기반한 행동이 아니다. 그 새는 자기 자신을 구하는 동시에 먼저 도망감으로써 무리로부터 배제되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유전적 근연도(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가 같은데 왜 내리사랑이 더 일반적인걸까? 부모가 더 이타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을 투자하는 입장에서는 부모보다는 자식의 기대수명이 더 길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이 탐탁치 않다 하더라도 동물의 내리사랑에 대해서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은 꽤나 신선하다.

물론 인간의 이타주의는 이기적 유전자로 다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도킨스는 이 책의 한 챕터를 '밈memes'에 할애했다. 밈은 문화적 유전자다. 말과 글, 종교, 철학, 음악, 미술, 건축 등이 모두 밈에 해당한다.

밈은 모방을 통해 자기 복제하며 유전적 진화보다 훨씬 더 빠르다.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종을 예외로 만든다. 인간은 상상력과 선견지명으로 유전자의 조종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유전자의 이기성 혹은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기계라는 정의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던 독자라면 아마도 이 '밈'으로부터 적지 않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지 모른다. 나 역시 밈이 이기적 유전자론에 첨부됨으로써 얻은 교훈이 있다.

꼭 유전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 자신만 생각하더라도 마치 갖고 태어난 듯한 성질, 성향, 습관적 행동들이 있다. 예를 들면, 게으름, 무관심, 보수성, 소심함 같은 것들.

어릴 때는 잘 모르다가 배우고 경험하면서 점점 의식하게 된다.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될 때가 많다. 마치 내게 세팅되어 있는 어떤 명령이 작동하는 것만 같다. 그것도 나만이 아니라 부모님으로부터 나로, 나에게서 내 아이로, 그렇게 세대를 이어서.

유전자에게 모든 탓을 넘긴 뒤 빠져나오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변화'를 어렵게 느끼도록 만드는 생물학적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결정론은 아니다. 우리에겐 문화적 유전자 밈이 있고 그 동력으로 변화의 어려움을 극복해 낸다.

그런데 밈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할까?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더 제대로 된 사용처는 밈인 듯 하다. 전쟁을 하는 인간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기적인 밈을 만드는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기계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인간이 고등동물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겸손해지기 위해서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자연선택은 다른 유전자와 함께 번영하는 유전자를 선호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겸손해지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유전자는 협력한다는 것. 이기적 유전자나 생존기계라는 표현 만큼이나 도킨스가 이 책에서 강조해온 메시지다.

한 유전자의 성공에는 서로 협력하며 그 성공을 뒷받침 하는 유전자 무리가 있다. 이 협력의 원리는 인간 사회와 하나도 다르지가 않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우리 몸 속의 이기적 유전자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말해 왔다.

덧붙이는 글 | 기자 본인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blog.naver.com/fullcount99


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2018)


태그:#이기적유전자, #리처드도킨스, #진화론, #자연선택, #과학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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