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가 이비인후과 병원 진료실 의자에 앉아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포근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이 진료실로 쑥 들어왔다. 우리 가족은 너무 반가워서 환호의 탄성을 지를 뻔했다. 아이 코피 때문에 한 달 넘게 고생했기 때문이다.

코피와 전쟁

동물원 나들이를 다녀온 후로 아이는 거의 매일같이 코피를 흘렸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코피에 우리 가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변을 보느라 힘만 줘도 코피가 났다. 진동 칫솔로 양치를 하다가 터지기도 했다. 아이가 거품 목욕하다가 라벤더 냄새가 좋다고 힘껏 들이마시다가 욕조를 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코피와 전쟁을 치르느라 지쳐갈 즈음에 병원 약속 날이 되었다.

병원 대기실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간호사를 따라 미로처럼 꼬인 복도를 통과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진료실에는 크고 묵직한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이는 유심히 의자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마침내 앉아 의사가 언제 오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 언제 와?"
"다른 환자 다 보고 나면 오실 거야."
"지루해, 심심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가위바위보"
"그래, 의사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만 하자."


어차피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할 일도 없으니까 아이와 묵찌빠 게임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아이가 아내랑 먼저 게임을 해서 이기고 이번에는 나한테 도전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병원의 진료 방식은 한국과 약간 다르다. 환자가 의사의 진료실로 찾아가는 게 아니라 개인별로 할당된 진료실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의사가 찾아와서 진찰과 치료가 이뤄진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도 존중받고 구체적인 질문도 편하게 할 수 있다. 물론 시설이 좋고 편한 만큼 의료비가 비싸고 진료 예약을 잡기는 무척 어렵다. 

이비인후과를 찾기 한 달 전에 소아청소년과를 먼저 다녀왔다.

"혹시 어디 부딪히거나 코를 판 적이 있어?"

아이는 잠시 생각이 안 나는 듯한 표정으로 갸우뚱하더니 대답했다.

"예전에 코를 판 적은 한두 번 있었지만… 코피가 난 후에는 안 그러는데요."
"어느 쪽 코에서 주로 피가 나오니?"
"왼쪽이요, 아니 오른쪽, 양쪽으로 다 나와요."


아이가 전날 코피가 나서 멈추기 전까지 상황을 쉬지도 않고 자세히 설명했다. 말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내가 나서려고 했지만, 아이는 아직 자기 말이 안 끝났다고 나의 입을 막더니 몇 분이나 더 떠들었다. 의사가 다 듣고 나서 힘들었겠다고 한마디를 해주자 아이는 그제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의사의 권유로 이비인후과에 가보기로 했지만, 병원 예약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의사가 추천해준 이비인후과 병원 약속도 한 달이나 기다려야 했다. 개인적으로 수소문해본 다른 병원도 사정은 비슷했다.

치료를 재빨리 해주고 싶었지만, 예약 날짜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텐데. 시술을 받자고 코로나 시국에 한국을 방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마다 가습기를 트는 건 기본이고, 코피에 좋다는 연근도 먹여보고, 콧속 상처 부위에 바셀린 연고도 수시로 발라줬다. 아이가 제일 힘들었겠지만, 아내와 나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아내는 자다가 꿈결에 무슨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일어나 아이의 방으로 향한 적도 있었다. 자다가 코피가 터져서 아이가 우리 방으로 찾아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비인후과 치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 코피가 나지 않은 날에는 신나서 아이는 마구 뛰었다. 기분이 좋아서 뛰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또 코피가 터져 간호사랑 통화하거나 응급실도 다녀왔다. 코피와 함께했던 파란만장한 날들이 흘러서 병원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니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이의 선택을 도와주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빼꼼히 열리자 아이는 잠시 얼어붙었다. 다행히도 의사 선생님이 아이의 기분도 물으며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줘서 아이는 닫았던 말문도 열고 코피가 나게 된 자초지종을 천천히 늘어놓았다.

콧속에 소형 카메라를 넣어서 자세히 봐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처음에 아이는 다짜고짜 거절했다. 그러자 의사는 아이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서 작동시키고 구경하게 해 줬다. 아이는 무슨 로봇 장난감을 보듯이 신기하게 살펴보다가 만져보기도 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카메라를 살펴보더니 아이는 아프지 않으냐고 살며시 물었다. 의사가 그냥 보기만 하는 거라 아프지 않다고 말하자 아이는 그제야 안심했다.

카메라로 관찰하기 전에 콧속에 약솜을 먼저 넣었는데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아이가 불평했다. 냄새에 민감한 아이라 그것 때문에 마음을 바꿀까 걱정했는데 비교적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게 무슨 냄새예요. 너무 이상해요."
"미안하구나. 나도 맡아봤는데 별로야."
"냄새 좋은 건 없어요?"
"이거밖에 없는데 어쩌지."
"할 수 없죠, 뭐."

 
병원 진료실 의자에 앉아 치료를 받는 아이
 병원 진료실 의자에 앉아 치료를 받는 아이
ⓒ 류정화

관련사진보기

 
콧속에 상처가 많아서 혈관이 약해져 있었다. 한 달 넘게 계속 코피가 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와 함께 몇 가지 치료 방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그중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건 콧속 상처 부위를 지져서 소작하는 거였다. 치료 방법을 듣더니 아이가 갑자기 울려고 했다.

"어… 그거 하면 많이 아파요?"
"약간 아플 수 있어."
"무서워요."
"그러면 엄마 아빠랑 잠시 얘기해 볼래?"


의사가 상의할 시간을 주며 자리를 뜨자 아이는 울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눈물도 글썽이며 하기 싫다고 치료를 거부했다. 이비인후과에 오기 전부터 아내와 나는 치료에 관련해서 한 가지 미리 정해둔 것이 있었다. 아이가 스스로 치료 방법을 결정하게 하자고. 병원에 오기 전부터 아이한테 치료 과정을 충분히 설명하고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네 뜻을 존중할 거라 말해두었다.

이번 병원 치료는 아이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배울 좋은 기회였다. 아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아이한테 치료의 장단점을 최대한 쉽게 알려줬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일러줬고, 이 치료가 아닌 다른 방법도 있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잘못된 선택을 해서 고생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다음번 선택은 더욱 신중히 할 수 있으니까 꼭 나쁜 경험도 아니었다. 이건 큰 치료도 아니니까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하면서 선택 훈련을 시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치료를 안 받고 다른 걸 하면 어때요?"
"항생제 연고를 코에 바르면 약간의 효과는 볼 수 있어."
"다시 코피가 날 수 있어요?"
"응… 상처가 덧나면 코피가 또 터질 수 있어."
"그럼 이 치료를 받으면 어때요?"
"아플 수도 있지만, 코피는 더 안 날 거야."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아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우리가 존중해 주겠다고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아이가 자기 주도성을 키울 수 있게 부모가 도와주는 게 중요하다는 오은영 박사의 말을 기억하며 치료 과정에서 아이를 배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한테 스스로 치료 방법을 결정할 수 있게 해줬더니 아이가 처음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충분한 시간 동안에 질문과 응답이 오간 후에야 아이는 드디어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아이가 소작 치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대신에 내 무릎에 앉아서 치료를 받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아이의 초조한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다. 의사가 돌아와서 다시 치료를 시작하자 비교적 순조롭게 시술이 이뤄졌다. 놀랍게도 아이는 별로 아파하지도 않고 의연하게 잘 대처했다.

"어른도 힘들어하는 걸 네가 씩씩하게 잘 참았네."
"정말 그래요?"
"어떤 사람은 울기도 해."
"하하하, 약간 따끔한데 참을 만해요!"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모든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오후가 되었다. 긴 시간 동안 아이가 치료를 결정하고 묵묵히 치료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다고 칭찬해 줬다.

독립적 아이로 키우려면

아동 심리학자 로스 그린(Ross Greene) 박사는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해 주면 책임 있게 행동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순간에 아이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게 도와주면 그 기술을 배워서 문제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부모인 우리가 많은 걸 대신해 결정해 주고 있었다. 

코피를 더 흘리지 않는 며칠이 흐른 후 아이는 조심스럽게 자기가 한 결정이 옳았다고 말했다. 내가 아이 치료 과정에서 나서서 결정해주고 싶었던 순간이 많았지만, 아이의 자기 주도성을 키우기 위해서 애써 참았다. 아무리 사소한 아이의 의견이나 불만도 끝까지 경청했다. 아이를 독립적인 자아로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분신이 아니다. 아이의 모든 걸 부모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아이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겠다는 태도는 아이가 독립적으로 판단할 기회를 막아서 바람직하지 않다.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게 한발 물러나 조언하고 지켜보는 코치가 되어야 할 때가 된 거 같다. 결정에 미숙한 아이가 성숙한 판단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부모의 노력이 필요한지 깨닫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육아, #독립성, #치료, #코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류동협 기자는 미국 포틀랜드 근교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육아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