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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이맘때. 1918년 7월 22일, 일본 토야마시(富山市) 시청(市役所)에 200여 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놀란 관리들에게 시민들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쌀값 문제'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주권을 갖는 당시의 제국 일본에서, 민중이 사회 현안에 대해 국가에 항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무도한 일을 저지른 이들은 제국 일본 체제에 저항하던 막부(幕府) 잔당이나 사상범, 혹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등이 아닌, 생존을 위해 투쟁에 나선 보통 시민들이었다. 시위에 나선 이들 중에는 지팡이에 의지한 할머니도, 아이의 손을 잡은 주부도 있었다. 이들은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받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빈곤으로 자신들의 삶이 파탄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국가에 항의한 것이다.

쌀값 파동으로 불안해진 민생... 전국적 시위 확산됐지만
 
쌀 값 폭등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쌀을 유통하는 수송선까지 막아섰다.
▲ 지역 내 소동을 보도하는 토야마 일보 기사(1918년 7월 25일) 쌀 값 폭등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쌀을 유통하는 수송선까지 막아섰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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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무시당한 채 고통에 그대로 남겨진 민중은 분노했고, 시위는 전국 단위로 확대됐다. 9월 12일까지 이어진 크고 작은 시위에서는 방화와 같은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1918년 제국 일본의 여름을 흔들었던 당시의 난리는, 1년 뒤에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 때도 그러했듯이 시위의 '민중항쟁적 성격'보다 '폭동적 성격'에 초점이 맞춰져 '쌀 소동'(米騒動)으로 명명됐다.
 
쌀값 폭등의 원인을 제공한 투기자본은 민중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 1918년 8월 11일 시위대에 의해 전소된 고베 스즈키 상점 쌀값 폭등의 원인을 제공한 투기자본은 민중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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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등 해외 식민지 경영을 통해 일본인 모두가 수혜를 누렸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극단적 빈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벌어진 이 쌀 소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장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 미제라블>에 묘사되는 프랑스 사회의 빈곤 역시 프랑스가 식민제국이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일반 민중이 해외 식민지 경영의 수혜자가 되기 어려운 현실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는 당시 영국을 쫓아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대대적인 수탈을 자행한 식민제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라는 국가가 해외에서 무엇을 얼마나 빼앗은들, <레 미제라블>에 묘사된 바와 같이 지독한 빈곤 상태에 놓여있던 본토 민중의 삶은 별달리 개선되지 않는 상태였다. 당시의 국가는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동체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프랑스 식민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당시 보호받고 번영을 누린 이들은 민중 전체가 아닌, 임금과 그 가족들, 성직자, 귀족, (뒤늦게 합류한) 자본가 따위의 특권계층들 뿐이었다.
 
시베리아 침략의 야욕을 품고 있던 제국 일본은 7만 3천 여 명에 이르는 대군을 출병시켰다.
▲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하는 일본군 시베리아 침략의 야욕을 품고 있던 제국 일본은 7만 3천 여 명에 이르는 대군을 출병시켰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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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도자들은 천황제 절대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대외팽창에 골몰했을 뿐, 자국 민중의 삶을 빈곤으로부터 건져내는 데는 무심했다. 현실이 이러하니, 제국 체제의 장기말에 불과했던 민중의 삶이 수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한다는 구실로 무리하게 단행한 1918년 '시베리아 출병'은, 위태롭던 민생을 완전히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새롭게 시작될 대외전쟁으로 쌀 가격이 폭등할 것을 예상한 지주와 상인들이 쌀을 놓고 투기와 매점 행위를 일삼았던 것이다.

당연히 쌀값은 보통 사람들이 끼니를 챙길 수조차 없을 정도로 폭등했다. 정부는 쌀 가격조절에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시베리아 출병을 재고하지도 않았다. 국가의 무책임 아래서 쌀값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물가는 폭등한 반면 실질임금은 전쟁 전의 70%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이때 대다수 일본 민중은 심각한 식량난에 놓이게 된다.

삶이 파탄난 사람들은 그렇게 들고 일어났다. 1918년의 쌀 소동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일어난 민중의 절망적인 항거였던 것이다. 이때 시위에 참가한 민중의 규모는 70만 정도로 추산된다.

참다못해 들고 일어선 민중... 진압 급급했던 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정부는 군경을 투입해 소동을 진압하고자 했다.
▲ 오사카에서의 시위 진압을 위해 무장 출동한 재향군인들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정부는 군경을 투입해 소동을 진압하고자 했다.
ⓒ 스즈키 상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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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투입해 이 '소동'을 진압했다. 전국에서 체포된 이들만 2만5000명을 웃돌았다. '폭도'들에 대한 발포와 '착검진압'도 진행됐다. 이때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일본 국민'의 수는 33명으로 추정된다. '자랑스런 제국의 군대'가 자국 민중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생명마저 빼앗은 사태. 일본 민중은, 제국의 지배자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레 미제라블>에 그려진 프랑스 사례와 너무나도 유사하게, 제국 일본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번영을 누린 이들은 천황가와, 천황이라는 신화 뒤에 흑막을 치고 앉아 전권을 휘두른 권신과 군부세력, 거기에 기생하던 재벌 등이 전부였다. 민중은 제국의 울타리 밖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울부짖었다. 참다 못해 비참한 현실에 대해 저항해봤지만, 그 저항은 철저히 진압됐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패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인권이 존중되는 일은 없었다.
 
특별고등경찰은 사상범을 단속하던 경찰 기구였다. 제국 일본의 패전 후 1945년 10월 4일 연합국 군정에 의한 '인권지령'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지되었다.
▲ 검열 업무를 수행하는 특별고등경찰 특별고등경찰은 사상범을 단속하던 경찰 기구였다. 제국 일본의 패전 후 1945년 10월 4일 연합국 군정에 의한 "인권지령"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지되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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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불만은 체제 유지에 있어 크나큰 위협이었으므로, 국가로서도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이 선택한 해법은, 민중을 분노케 한 사회 모순의 해결이 아닌, 불경한 민중을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사회화시키는 것이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유교도덕의 관계론과 근대국가의 애국담론이 결합된 황도 국체주의의 교육이념이 더욱 강화됐다. '국민도덕론'과 '가족국가론' 아래서, 천황과 신민의 관계가 부모 자식 관계로 설정됐다. 자식된 신민이 부모인 천황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미덕으로 강조됐다.

거기에 더해 1925년 이래 중학교 이상의 교육시설에서 실시된 교련은, 국민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목숨 바쳐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1925년 이후 중학교 이상의 교육시설에는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교련이 실시되었다. 교련의 실시는 일본 교육의 군사화, 사상통제 강화를 나타내는 주요 분기점이 되었다.
▲ 군사교련을 받는 학생들(1938년) 1925년 이후 중학교 이상의 교육시설에는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교련이 실시되었다. 교련의 실시는 일본 교육의 군사화, 사상통제 강화를 나타내는 주요 분기점이 되었다.
ⓒ 요코하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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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빚어진 국민의 질서는 제도와 공권력을 통해 뒷받침됐다. '사상선도'라는 개념 아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위험사상이 배격됐으며, 서슬퍼런 '치안유지법'은 양심의 자유마저 구속했다.

국체 질서를 어지럽힌 '비국민'들은 비난의 대상을 넘어 고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유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오직 의무와 충성만이 존재하게 된 제국의 체제 위에서, 민중은, 아니 국민은 선택권이 없었다.

날로 격화돼 가던 전쟁 속에서, 선택권을 잃은 일본의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체제가 강요하던 폭력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끝은 1945년의 파멸적 패망이었다.

태그:#쌀소동, #민중항쟁, #시위, #국민,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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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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