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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점잖으신 양반인데 곧잘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분과 식사를 하게 됐다. 더운 날 시원하게 드시면 좋을 것 같아 "메뉴는 콩국수로 정했는데, 어떠세요?" 여쭈니,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못 먹는 게 딱 두 가지가 있다고."
"뭐....였지요?"
"없어서 못 먹는 거 하고, 안 줘서 못 먹는 거요."
"아하하하하."


어르신의 유쾌한 대답에 한바탕 웃어 젖히고, 기분 좋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쌈 채소를 데쳐보니
 
올봄부터 지인의 텃밭에서 여러 번에 걸쳐 쌈 채소를 비롯한 밭 작물을 얻어다 먹고 있다.
 올봄부터 지인의 텃밭에서 여러 번에 걸쳐 쌈 채소를 비롯한 밭 작물을 얻어다 먹고 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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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 잘하시는 어르신과 달리 냄새나서 못 먹는 것, 징그러워 못 먹는 것, 그냥 이유 없이 안 먹는 것까지 나는 가리는 게 너무 많다.

쌈 채소만 해도 그렇다. 잎이 두껍거나 맛과 향이 진한 비트 잎, 겨자 잎, 케일은 질색이다. 시중에서 구미에 맞는 쌈채만 사려면 늘 적은 양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쌈채 구매는 저렴하면서 양도 많이 주는 인터넷 쇼핑몰을 주로 이용한다. 문제는 모듬 쌈채소를 주문하면 8~10종류 중 싫어하는 한두 가지가 꼭 섞여 온다는 거다.

그런데 얼마 전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올봄부터 지인의 텃밭에서 여러 차례 쌈채와 이런저런 밭작물을 얻어다 먹고 있다. 염치없지만, 꾸역꾸역 먹어왔던 쌈채류는 여기서도 사양해 왔다.

며칠 전에도 끝물인 쌈채를 뜯으러 가자는 지인의 제안에 따라나섰는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데쳐서 한번 먹어봐. 엄청 맛있어. 나만 믿고 가져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내게 억세진 비트 잎을 한 주먹 따주며 꼭 가져가란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자꾸 저러지?' 궁금해서 받아와 봤다. 
 
비트 잎을 데친 후 쌈을 싸서 먹어 보았다.
 비트 잎을 데친 후 쌈을 싸서 먹어 보았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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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마자 비트 잎과 잎자루를 잘라서 따로따로 데쳤다. 보라색 물이 빠지고 색이 선명해진 비트 잎을 건져서 쌈 싸 먹을 준비를 시작했다. 몇 주 전에 만들어 둔 보리똥잼과 고추장을 섞은 특제 양념도 대령했다. 

'과연? 과연?'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보쌈 싸듯 비트 잎에 밥 싼 것을 한입 베어 물었다. "우와!" 생경한 식감에 깜짝 놀랐다. 거부감이 생기기는커녕 다른 쌈 채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드럽게 씹히는 비트잎만 연신 먹어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일 싫어했던 '쌈채의 반란'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잎자루는 잎보다는 오래 데쳐 쫑쫑 썰었다. 고추장과 뒤적뒤적해서 쌈채에 올려 먹으니 그 또한 별미다. 먹다 보니 잎자루는 초절임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알고 보니 비트 잎을 나물로 무쳐 드시는 분들도 꽤 있었다. 이 조리법 또한 안 먹어 봐도 맛은 보장된 게 아닐까 싶다. 좀 더 일찍 바지런 떨어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봤어야 했다. 먹기 싫은 쌈 채소와 부질없는 실랑이를 여태까지 왜 벌였는지 후회막급이다.

덜 여문 콩꼬투리, 기름에 볶았더니
 
동부콩이 채 여물지도 않았는데, 이때 먹어야 맛있다며 지인이 꼬투리를 따 주었다. 지인은 중국에서 씨 사다 심은 거라 한국 동부콩하고 다르다고 우기는데, 잎, 꽃, 꼬투리 등 아무리 살펴봐도 동부콩이다.
 동부콩이 채 여물지도 않았는데, 이때 먹어야 맛있다며 지인이 꼬투리를 따 주었다. 지인은 중국에서 씨 사다 심은 거라 한국 동부콩하고 다르다고 우기는데, 잎, 꽃, 꼬투리 등 아무리 살펴봐도 동부콩이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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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비트 잎과 함께 꼭 가져가야 한다고 내민 것은 덜 여문 콩꼬투리였다. 직접 농사짓는 사람들의 특권이고, 요맘때가 아니면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거란다. 덜 여문 꼬투리를 어슷하게 썰어서 고기를 볶을 때 함께 넣고 볶으면 그렇게나 맛나단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식재료로 요리를 해보라니....' 반신반의하며 이것도 떠밀려 받아와 봤다.
 
동부콩 꼬투리와 비엔나소시지를 뜨거운 물에 튀긴 후 어슷썰기 하여 준비한다
 동부콩 꼬투리와 비엔나소시지를 뜨거운 물에 튀긴 후 어슷썰기 하여 준비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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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콩 꼬투리를 식재료로 할 때는 국물이 적은 볶음요리가 제격이다.
 동부콩 꼬투리를 식재료로 할 때는 국물이 적은 볶음요리가 제격이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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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대신 냉장고에 있던 비엔나소시지를 꺼냈다. 꼬투리와 소시지를 각각 뜨거운 물에 데쳤다 어슷썰기 해두었다. 먼저 콩꼬투리를 센 불에 볶다가 비엔나소시지를 마저 넣고 볶았다. 소금 외에는 어떠한 양념도 하지 않았다. 데친 비트잎을 먹기 전처럼 그 맛이나 식감이 너무도 궁금했다.

"음냐음냐, 맛있다. 받아오길 잘했어!" 잘 볶아진 콩꼬투리와 비엔나소시지를 한 입 먹어보고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평이다. 데친 비트 잎과는 전혀 다른 식감이었지만, 좀처럼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소금으로 간한 것은 술안주로 좋을 듯하고, 밥 반찬으로는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딱이지 싶다. 응용 버전으로는 깐새우볶음이나 달걀스크램블이 괜찮을 것 같다. 

고정관념이라는 껍질에 금이 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날카롭던 부분이 닳기도 하고, 모난 곳이 쪼개지기도 하면서 둥글둥글 유연해지는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고 수십 년 고집하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쉽게 바뀔 리는 없다. 새로운 것을 시전하고 싶어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도 지인이 안겨 준 비트 잎과 덜 여문 콩꼬투리를 괜한 아집으로 팽개치고 왔더라면 맛의 '신세계 발견'은 물 건너갈 뻔했다. 생으로만 먹어 오던 비트 잎과 덜 여문 콩꼬투리로 음식을 만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느낀 바도 크다. 내칠 용기가 없어서 '인내'라는 포장을 씌워 마지못해서 해오던 일들, 발상의 전환으로 즐겁게 해결할 수 있는 창구를 찾아봐야겠다.

태그:#쌈 채소, #꼬투리,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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