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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찰떡'이라는 게 있다. 떡처럼 찹쌀이 주재료인데 빵처럼 우유와 베이킹파우더를 넣어 오븐에 굽는다. 그래서 겉은 빵인데 속모양과 맛은 떡인 오묘한 음식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국 LA가 출생지이며, 한국의 맛을 그리워하던 과거 이민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 한다. 한국 식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현지 식재료로 베이킹 방식을 차용해 만들었으나, 찹쌀의 쫄깃함과 팥배기의 달콤함, 견과류의 고소함이 어울어져 그 맛이 일품이다.

그 밖에도 배추를 구하기 어려워 양배추로, 고춧가루가 없어 칠리파우더로 김치를 담갔다는, 짠 내 나는 북미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라떼는 말이야"가 된 지 오래다. 그 후 한국 식재료는 오직 한국 마트나 아시안 마트에서만 살 수 있던 시기를 지나, 십 년쯤 전부터는 이곳 캐나다 현지 마트에서도 한국음식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한국 라면과 과자 몇 가지, 김 등이 진열대 한쪽에 수줍게 자리 잡은 걸 봤을 땐 "봤어, 봤어?" 하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었다. 그러다 가짓수가 늘더니만 이제는 신라면, 김치라면, 사골곰탕면, 너구리, 비빔면 등 라면류와 초코파이, 새우깡, 꿀꽈배기, 알새우칩 등 스낵류 그리고 메로나, 비비빅 등 빙과류, 김치, 냉동만두, 두부, 김, 참기름, 간장, 불고기 소스 등 한국음식을 현지 마트에서 사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한국라면 전성시대
 
캐나다 마트 '수퍼스토어'에서 팔리고 있는 한국 라면들
 캐나다 마트 "수퍼스토어"에서 팔리고 있는 한국 라면들
ⓒ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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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수퍼스토어'라는 현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는데, 라면 코너가 진열대 맨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빨간색 천지였다. '신라면'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인도미(Indomie)', 태국의 '마마(MAMA)', 일본의 '니신(NISSIN)' 등 쟁쟁한 브랜드들을 제친 '신라면'의 압도적인 우위가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뉴욕타임즈> 소유의 상품 리뷰 웹사이트 '와이어커터(Wirecutter)'는 지난 2020년 6월 쉐프, 요리책 작가, 블로거, 라면 리뷰어들의 의견을 수집해 '최고의 라면'을 선정했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11가지의 라면 중 신라면 블랙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짜파구리(영화 <기생충>에 나온 짜파게티와 너구리의 조합), 신라면 라이트, 신라면 사발면까지 총 4가지가 한국 라면이었다.

농심 신라면은 코로나로 인해 번진 '홈 쿡(Home Cook)' 트랜드를 타고 지난 2020년 사상 최대의 해외 매출을 기록했다. 올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대비 14% 증가한 1억 1200만 달러(약 1251억 8000만 원)다. 볶음면이나 우유라면 등으로 신라면을 새롭게 만들어 먹는 이색 응용조리법도 SNS상에서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라면 전성시대다.

기네스 팰트로마저 좋아한 김치 
 
캐나다 코스트코에 진열된 CJ 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 세 가지
 캐나다 코스트코에 진열된 CJ 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 세 가지
ⓒ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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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뿐일까. 김치의 화려한 비상 또한 그에 못지않다. 지난 4월 21일 관세청과 식품업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김치 수출액은 4657만 3천 달러(약 523억 3408만 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케이팝 등 한류가 케이푸드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역시 김치수출 역군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발효된 배추가 면역시스템을 강화하고 코로나 증상 완화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한국음식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명 배우 기네스 팰트로가 코로나 극복을 위해 김치를 먹었다고 밝히는 등, 김치가 코로나 퇴치에 유익한 건강식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때문이다.

김치 만드는 법 외에도 김치 스튜, 김치만두, 김치 볶음 등 김치를 활용한 요리법들이 여러 매체와 SNS에서 영어로 공유되고, 코스트코 냉장고 한 면이 김치로 메워지는가 하면, 김치 파는 곳을 알려주는 기사가 나기도 한다. 김치가 서양인들에게도 더이상 냄새나는 먼 나라 음식이 아닌 이색적인 건강식품이 되고 있다.

냉동만두의 질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집밥 트렌드 덕도 있겠지만, CJ 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는 현지인들의 입맛을 반영한 만두로 이곳 식품업계를 제대로 공략했다. 서양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한국음식 중 하나인 불고기를 넣어 만든 것과 이들이 선호하는 식재료인 치킨과 고수를 넣어 만든 것, 그리고 찐만두 이렇게 세 가지 만두가 코스트코 냉동코너에 항상 들어차 있으니 '연간 글로벌 매출 1조 원 돌파'라는 '비비고 만두'의 신화를 현지에서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현지마트에 진열되는 한국음식들 외에도 한국음식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들은 곳곳에서 있어왔다. 2016년에는 글로벌 샌드위치 체인점 '써브웨이'에서 여름 특별식으로 '한국식 제육볶음 샌드위치(Korean BBQ Pulled Pork Sandwich)'를 선보였다. 지난 1월에는 미국의 유명 햄버거 브랜드 '쉐이크쉑(ShakeShack)'에서 "백김치 슬로우 위에 고추장 바른 바삭한 닭가슴살을 얹어" 만든 버거를 소개했다. '고추장 마요 소스'와 함께 제공되는 '한국식 고추장 순살치킨'과 '한국식 고추장 감자튀김'도 선보였다. 광고에는 "고추장: 매콤 달콤하며 감칠맛 가득한 붉은 고추 양념+한국 요리의 주성분"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캐나다 뉴브런스윅주의 한 마을에서 불고기 피자가 현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도 있다. 지난 4월 16일 <한국경제>에는 미국에서 '한국식 컵밥'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송정훈 대표의 이야기가 실렸다. 불고기, 제육, 치킨, 잡채 덮밥을 파는 '컵밥(CUPBOP)'은 2013년 작은 푸드트럭으로 시작해 최근 42번째 매장을 열었고, 매출은 매년 뛰어 지난해엔 12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예가 한국음식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한국음식을 즐기는 이들이 확실히 늘고 있음을 느낀다. 2018년 퀘백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드라마 <도깨비>가 그야말로 초절정 인기여서 골목골목 가는 곳마다 OST가 흐르고 있었는데,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레스토랑 메뉴에 '김치버거'가 있었다. 샐러드처럼 만들어진 김치를 넣은 버거였는데 꽤 맛있었다.

'김'의 경우에도 획기적이라 할만한 변화가 일었다. 예전 서양인들에게 김이란 '검은 종이' 같아 맛보기도 전에 거부감을 느끼는 음식이었다면, 이젠 딸의 친구 중에 학교에 김을 싸 오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처럼 밥과 함께 먹는 게 아니라 마치 과자 먹듯 김만 먹는다지만 뭐 어떠랴. 그것도 나름의 '현지화'일 테지.

캐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장 자주 주문한 음식
  
이곳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서양식 레스토랑이었지만, 한국분이 운영하는 터라 한국음식도 함께 팔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같이 오시는 캐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장 자주 주문하는 음식은 햄버거나 샌드위치가 아닌 돌솥비빔밥과 볶음밥이었다. '치직치지직~' 소리가 나는 돌솥비빔밥을 들고 지나갈 때면 손님들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돌그릇에 담겨 맛난 냄새 풍기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이 음식을 처음 본 손님들은 호기심에 주문해본 뒤 다음에 또 주문하곤 했다. 원어민 교사 등으로 한국에서 살다 왔거나 방문한 경험이 있는 손님들도 종종 마주치곤 했는데, 그들은 한국의 맛을 잊지 못한다며 김치를 더 줄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작년 식품업계 해외 매출이 전년 대비 2조 2769억 증가해 20조 7123억 원이라고 한다. 언뜻 잘 헤아려지지 않는 숫자지만, 그 숫자를 현지에서 실감하고 있다. 아득하게만 보이던 한국음식의 세계화 가능성은 이미 넘치게 증명되고 있다. '케이 푸드 열풍'이라고들 한다. 이 바람이 일시적 돌풍으로 끝나지 않도록, 이제 정말 시작이다.

태그:#한국음식, #케이푸드, #열풍, #북미,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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