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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한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와는 달리 전문 경영인으로서 현실을 들여다보며 실제적인 경험을 쌓았다. 

맥렐런의 <마르크스의 세계>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옷차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난장판인 서재를 그대로 방치하며, 돈에 대한 관념이 없어 무절제한 씀씀이로 언제나 쪼들렸다. 

반면 엥겔스는 자신의 생각을 신속하게 정리하고 명확하게 글을 썼다. 엥겔스는 늘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격식을 갖추고 서재를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하며 금전 문제에서도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였다.

마르크스가 가족을 중심으로 가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엥겔스는 평생 결혼도 않고 다양한 여성들과 자유롭게 연애를 했다. 엥겔스야말로 전형적인 강남 좌파의 원조인 셈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보다 2년 늦게 1820년에 프러시아 제국의 라인 지방에 있는 바르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조업자였다. 1838년에 열여덟 살이 된 그는 집안 환경의 강요를 받아 김나지움(독일의 인문계 중고등학교)을 그만두고 브레멘 시에 있는 상점의 서기로 취업을 했다. 이렇게 일을 배우는 와중에서도 그는 철학을 비롯하여 여러 과학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1842년에는 영국의 산업혁명 중심지인 맨체스터 시에 있는 아버지의 공장에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삶을 목격했다. 고등학교 중퇴자이지만 학문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이러한 현상의 조건에 대한 주의 깊게 과학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는 1845년에 출간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조건>이다. 

1844년에 그는 독일로 돌아가는 도중에 파리에서 망명을 온 마르크스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물론 둘은 이 만남 이전부터 서신을 교환한 사이였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둘은 공동으로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을 출판했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1844년 파리 수고'로 더 알려진 그 유명한 <경제학-철학 수고>를 썼다. 

그러나 이듬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아 브뤼셀로 망명하지만, 마르크스는 연구를 멈추지 않고 철학의 과제를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이의 결실로 그는 철학이 더 이상 세계를 해석하는 데에 멈추지 말고 변화시키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포이어바흐 테제>를 출판했다. 

이 시기의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도움으로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둘은 공동으로 강도 높은 지적인 작업을 했다. 이런 작업은 <독일 이데올로기>로 그리고 <코뮌주의자 선언(1848년 공산당 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덕분에 프로이센 정부와 프랑스 정부의 탄압으로 이듬해 둘은 브뤼셀을 떠나 또다시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이처럼 바이올린 제1주자인 마르크스의 재능이 꽃이 피는 데에는 자기 스스로를 바이올린 제2주자로 규정한 엥겔스의 역할이 지대했다. 마르크스는 런던 생활 동안 한 번도 보수를 받고 고용되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1849년 런던 망명 이후 엥겔스는 자신이 쓰고 남은(절반 이상의) 돈은 모두 마르크스에게 보내고 자신이 아버지 공장의 경영인이 되자 회사 경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친구에게 충분한 후원금을 보내는 등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을 때까지 35년을 한결같이 물질적인 지원을 했다. 

엥겔스의 이러한 물질적 지원과 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는 그의 대작인 <자본론> 1권을 1867년에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나중에 그가 미완성 초고의 형태의 남겨놓은 <자본론> 2권과 3권을 엥겔스가 정리해서 출판했다.

1870년 이전에 엥겔스는 자신이 일하고 있던 맨체스터 시에 있고 마르크스는 런던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편지로 지적인 공동 작업을 했다. 그러다 그해 은퇴한 엥겔스가 아예 런던으로 이주해서 둘의 공동 연구는 꽃을 피웠다. 

그런데 1875년 <고타 강령 초안 비판>을 쓴 이후에 마르크스는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은 데다 주로 평생의 걸작인 <자본론>의 작업에 주력했으므로 그때 주로 󰡔자연변증법󰡕의 초고를 쓰고 있던 엥겔스는 분업의 차원에서 내외부의 사상적인 적들과 논쟁자의 역할을 맡았다. 

엥겔스는 때마침 강력한 운동 세력으로 발전 중인 독일사회민주당(약칭 사민당) 내부에서 이론적 지도자이자 논쟁의 종결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러한 결과물이 1878년에 <안티 뒤링, 오이겐 뒤링 선생의 과학 변혁>으로 나타났다. 

1880년에 프랑스의 노동자 대중이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이 책의 「서문」과 3부에 해당하는 「사회주의」 중에서 '역사'와 '이론'을 별도로 편집하여 프랑스어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출간했다. 이 소책자가 성공을 거두자 2년 뒤에 독일 사민당의 요청으로 독일어로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라는 제목이 바뀌어 발간되었다. 

이렇게 출현한 이 책들이 최초로 "모든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를 위한 핸드북"(레닌), 즉 마르크스주의의 대중적인 입문서가 되었다.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을 때까지 둘은 35년을 공동으로 사상적인 투쟁을 벌였지만, 그의 사후에는 엥겔스 혼자서 이 투쟁을 지속하면서도 공동의 유산을 계속해서 보급하려고 애를 썼다. 이 일이 바빠 결국 <안티 뒤링> 때문에 뒤로 미뤄진 <자연변증법>을 수고로 남겨 놓았다. 

대신에 그는 1884년에 마르크스의 쓴 원고를 바탕으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발간했고, 1886년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을 출판했다. 뒤의 책도 이전의 <안티 뒤링>과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교과서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가 죽은 이후에 계시로 예수를 만났다. 바울은 스승인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일 뿐이다. 이와는 다르게 마르크스보다 두 살 어린 엥겔스는 마르크스 생전에는 삶과 연구에서 우정의 본보기를 보여줬고 그의 사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공동으로 이뤄낸 사상을 오로지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널리 알리다 1895년에 사망했다. 

이와 같이 그의 모순에 찬 삶과 그 속에서 치열하게 공동의 사상을 다듬은 엥겔스는 단순히 마르크스의 사도가 아니다. 엥겔스야말로 레닌의 표현대로 "현대 노동자를 위한 두 명의 위대한 스승 중의 한 명"이다. 노동과 인간 해방을 겨냥한 마르크스의 사상적 혁명은 강남좌파인 엥겔스와 함께 이룬 것이다.

태그:#강남좌파 , #엥겔스 ,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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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연구자로서 정치존재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장자와 푸코를, 지젝과 원효, 바디우와 나가르주나, 헤겔과 의상 등 동서양 정치존재론의 트랜스크리틱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전에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강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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