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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1년 에세이문학 봄호( 3월 15일 발간)에도 실렸습니다. [기자말]
"담아! 뛰자."

아침부터 개를 데리고 눈밭을 달린다. 달리다가 '멈춰!' 하면 개는 그 자리에 서서 내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시 뛰고 멈추기를 반복한다. 내가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한바탕 뛰고 나면 눈밭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뒹군다. '담아 집에 가자'라고 말하면 개는 어김없이 트리플엑셀을 시도한다. 공중으로 점프해서 두어 바퀴 핑그르르 돈다. '집에 가자'라는 말이 춤추라는 명령어쯤으로 들리는가보다.

하루에 서너 시간은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양치기 견종이라서 그런지 운동량 부족을 그런 식으로 풀어내는가 싶다. 나는 이 광경이 좋아서 부러 '담아! 집에 가자'를 연발한다. 그러다가 나도 신이 나면 개 앞발을 잡고 함께 빙글빙글 춤을 춘다. '집에 가자, 컹컹, 빙글빙글, 집에 가자, 컹컹, 빙글빙글......' 춤추다가 지치면 눈밭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언제 보았던 하늘인가. 언제 벌러덩 드러누워 보았던가.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함박눈을 덮어쓴 회양목들이 아침 햇살에 후둑 후둑, 눈발들을 털어낸다. 미루나무 우듬지 위로 까치들이 날아들고 로컬푸드 트럭이 시금치를 싣고 쿨렁쿨렁 농노 길을 빠져나간다. 앞집 농막에서는 아침부터 난로를 피우는지 연기가 소담스럽게 피어오른다.

임금피크 기간에 접어들었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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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던하고 계절은 여전한데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생의 낙오자처럼 겨울의 행간에 푹 빠진 채 낡은 전답들을 섭렵 중이다. 돌을 골라내고 하수관을 묻고 장작을 패고 개집을 만들고 개가 뜯어 먹은 농막을 수리하고, 일상이 뻐꾸기시계처럼 돌아간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안 하면 그만인 일,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이기에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즐겁다. 방임된 자유에 차츰 익숙해지는 시간이다.

서울역행 전동차가 출근객들을 빼곡하게 태우고 느리게 지나간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처럼 간간히 관제기적을 울린다. 저 전동차의 종착지는 서울역일 테지만 궁극적인 행선지는 가족들의 입이 아닐까.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구두끈을 졸라매고 전사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출근대열에 합류하던 때가 엊그제였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이제는 직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임금피크 기간에 접어들면서 시간이 많아졌다. 월급은 깎이고 깎인 만큼 근무시간도 줄었기 때문이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딱히 갈 곳도 없다. 친구들이나 친지들을 만난 지도 오래되었다. 안 보면 더 보고 싶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이란 자주 만나야 더 정든다는 것도 목하 체험 중이다. 모두가 코로나 잠수함을 타고 깊은 해저로 실종되었다. 산도 바다도 이젠 낯설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퇴직 후의 잉여시간이 걱정되었다. 동료들은 자회사를 알아보기도 하고 사업을 설계하기도 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낙천적으로, 이제는 좀 헐렁하게 살고 싶었다. 궁리 끝에 지난 가을 조그만 땅뙈기를 마련했다. 20년을 줄곧 셋방살이 주말농장을 했으니 이제는 대추나무 한 그루라도 내 땅에 심고 싶었다.

그렇게 지난가을 일산신도시 초입에 '민들레농장'이란 노란명패 하나를 달았다. 어릴 적 담배고추농사가 싫어서 도망치듯 탈향(脫鄕)한 소년이 40년을 돌아 다시 흙으로 귀환한 것이다. 흙을 만지며 흙이 주는 생명들을 보듬으며 살고 싶었다.

'땅'이라는 어감은 투기라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기에 나는 굳이 '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흙'은 생명, 모태, 밥 등의 긍정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신, 그 열성이면 책을 써도 몇 권은 썼겠네!"라는 아내의 핀잔을 들을 만큼 나는 지난한 시간 동안 흙을 대면했고 흙과 열애했다. 그래서 나에게 흙은 경제적 가치 그 이상이었다.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서니 세상살이가 원경으로 보인다. 원 밖에 서니 내가 살아왔던 동그란 원 안이 보이는 것이다. 원 안의 삶이란 아파트 평수를 늘리거나 아이들 공부 걱정을 하거나 안전한 직장생활 같은 것들이다. 동료들의 주식이나 부동산 갭투자 같은 무용담을 쓴 소주에 타 마시며 허실허실 골목을 돌아오던 소심한 가장의 삶 같은 것들이다.

사각의 모퉁이에서 일하고 사각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각의 집으로 사각사각 돌아가던 지리멸렬하면서도 엄중한 생계형 삶들이다. 그런 삶에서 나는 지금 부재중이다. 생계의 휴지기로 방출되니 사물들이 새롭게 보인다.

잊었던 하늘이 보이고 새들이 보이고 새똥 같은 밤하늘의 별들이 보인다. 작은아버지는 잘 계신지. 식당을 개업한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지. 수몰된다던 고향의 내성천은 건재한지. 잊고 살았던 세상의 안부들이 궁금해진다. 한갓진 밭둑에 앉으니 그런 생각들이 든다.

코로나 시대 이웃들과 제대로 된 봄을 맞고 싶다

요즘은 농막 원주민들과 막걸리잔 기울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화목난로를 피우고 난로 위에 양미리나 돼지고기를 굽고 막걸리 한 순배 돌리다 보면 어느새 십년지기 형님아우가 된다. 모두가 투박하고 거칠어도 마음의 품새는 넉넉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른다고, 나는 겉치레 수사와 품위를 버린 지 오래다. 소위 그들만의 '노가다 공용어'를 알아듣지 못해 난처할 때도 많았으나 차츰 익숙해져 가고 있다.

난롯가에서는 웃는 얼굴들이지만 돌아가는 뒷모습은 늘 음지쪽으로 기우뚱거린다. 코로나 한파가 여기라고 비켜 갔겠는가. 유치원생들 체험용 딸기농사를 하던 청년은 농협 빚 걱정에 시름이 깊고, 일찌감치 코로나 유탄으로 갈비집을 접고 농사일로 전업한 배불뚝이 장씨는 마땅한 거처가 없어 농막에 장기체류 중이다. 임플란트 하던 날 술을 마셔 한쪽 볼이 볼록 부어올랐는데도 어흐, 하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던 사람은 폐기물 수거업자인 앞집 포클레인아저씨다.

그 아저씨는 나의 초보농장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포클레인으로 농장배수로를 뚫어주기도 하고 가끔 버리는 목재를 싣고 와서 난로연료로 쓰라며 농막에 부려주던 참 고마운 아저씨다. 집을 부수고 지어야 일거리가 많은데 요즘은 부시거나 개업하는 공사가 없다며 공치는 날이 많아 마누라 보기가 무섭단다. 일 년 벌어서 한입(임플란트 값)에 다 털어 넣었다며 오늘도 폐기물 전화벨만 기다린다. 모두가 등짝에 시린 벼랑 하나씩 지고 힘겹게 겨울 강을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다.

개는 춤을 멈추고 사방을 멀뚱거린다. 개집을 양지쪽으로 옮기고 장작을 패고 마사 흙으로 주차장 평면을 고르고, 오늘 할 일들을 정리하며 일어서는데 앞집 포클레인아저씨의 트럭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아하, 폐기물 수거 기별이 왔구나. 그럼 난로에 쓸 나무도 좀 실려 오겠네. 나는 괜히 흐뭇해진다. 봄도 그렇게 왔으면 좋겠다.

트럭에 가득 실린 폐기물들이 저 아저씨에겐 꽃일 수도 있겠다. 아저씨 차에 꽃들이 가득가득 실려 온다는 것은 다시 세상이 우렁우렁 돌아간다는 신호일 수도 있겠다. 아, 그럼 올봄엔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갈 수도 있겠구나. 오는 길엔 오리궁둥이 배도 타고 무창포 어디쯤에서 친구들과 모꼬지를 하며 살찐 주꾸미도 먹을 수 있겠구나. 그런 봄이 오면 나는 이팝나무 꽃처럼 닫힌 생을 봄 하늘로 팡팡 터트려보고 싶다. 삭제된 작년의 인생도 소급하고 싶다.

딸기밭 청년, 배불뚝이 송씨, 포클레인 아저씨, 뼈 감자탕 아주머니... 저마다 가슴에 햇살 하나씩 꽂고 담장 아래 빙 둘러앉아 화전을 부치며 하하, 호호, 껄껄거리며 만화방창 웃음꽃을 피우는, 그런 봄을 성급하게 기대해본다. 그 찬란한 봄을 위해 나는 지금 개와 춤추기 운동 중이다. 지구가 기우뚱거리지 않게 조심조심. '담아! 집에 가자, 컹컹, 빙글빙글, 담아! 집에 가자, 컹컹, 빙글빙글.'

태그:#민들레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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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백이 익어가는 마을! 민들레농장, 농장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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