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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배추 모종 심다
▲ 어린 배추 모종 8월 29일 배추 모종 심다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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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김장 배추 심을 땅을 골랐다. 300포기의 배추 모종이 우리 손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땅이라 남편이 손수 땅을 파고 고랑을 만들었다.
    
9월 12일, 배추 모종에서 겉잎 다섯 장이 나왔다. 떡잎이 저절로 떨어지거나 아직 붙어있는 모종도 있다.

9월 17일, 벌레 먹은 잎이 하나둘 생겼다. 잎의 구멍은 배추 애벌레가 아닌, 달팽이가 만든 것이다. 배춧잎에 초록 똥의 흔적을 남기고 숨어, 낮에는 찾아볼 수 없다. 자잘하게 풀이 보이기 시작했고, 비가 오지 않아 틈틈이 물을 주었다. 아직은 덥다.
  
벌레 먹은 잎을 가지고 열심히 터를 잡아가는 배추
▲ 9월 17일 배추는 이렇게 자란다 벌레 먹은 잎을 가지고 열심히 터를 잡아가는 배추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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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빈 땅이 보이지 않을 만큼 터를 잡아가기 시작한 배추, 겉잎들이 죽죽 뻗어 나가며 속잎들의 성장을 추동한다. 겉잎 일곱 장이 속잎을 감아올리는 듯한 모습이 눈에 띌 만큼 배추밭의 분주함을 엿볼 수 있다.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시원스럽게 비 한번 내려주면 좋을 텐데, 연일 건조주의보다.

10월 4일, 어울렁더울렁 선의의 경쟁이라도 하는 걸까? 속잎을 거느린 배추들의 초록 치마가 땅을 모두 덮어버렸다. 누가 뭐래도 꼼짝없이 배추밭의 배추 꼴을 하고 있다.

10월 23일, 너울거리는 배춧잎들이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성장이 빠르다. 둥굴둥굴 속잎들이 겉잎을 감으며 자신만의 환한 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록이 밀려난다는 기운이 느껴질 만큼, 곧 닥쳐올 추위에 대한 속잎들의 발 빠른 대처다.
  
10월 4일의 배추
▲ 제법 배추 꼴을 하고 있는 배추 10월 4일의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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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이 차기 시작한 배추
▲ 11월 7일의 배추 알이 차기 시작한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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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내려다보면 꼭 커다란 꽃송이처럼, 저마다 노란 속을 내밀고 있는 배추가 쓰다듬어 주고 싶게 예쁘다.
 
"알이 차고 있다."


남편의 말에 자세히 바라보니 배추는 포기마다 노란 알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제 가족 단속하느라 바쁜 가장의 모습을 보는 것 같고, 기꺼이 제 몫을 하느라 수고하는 것은 배추 역시 다르지 않구나 싶다.

11월 7일, 입동 날 아침, 더 추워지기 전에 흠뻑 물 한 번 더 주기로 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 가끔 물을 주었으나, 배추 입장에서는 감질나는 일일 것이다. 어디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하겠는가. 맘먹고 한참 물을 대주었다. 수확하기까지 마지막으로 주는 물이다. 이후로 주는 물은 성장에 큰 효과 없다고 한다. 이제 어둠과 추위, 외로움을 견디며 제가 가진 지금까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 발산하는 일에 집중할 때다.

11월 20일, 여기저기서 김장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김장 배추로 뽑기에는 아직 결구(結球)가 되지 않은 배추밭에 나가 빨리 커라, 주문도 하고, 혹시나 간밤 추위에 얼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누군가 배추를 사서 반 갈라보니 모두 썩어 있어서 다시 샀다는 말이 들리는데, 설마 너희 속은 그렇지 않을 거야, 지금껏 별일 없이 커가는 것 지켜봤는데, 아무렴, 괜찮을 거야... 이런저런 걱정이 늘어난다.

11월 26일, 기온이 내려간다는 일기예보가 있던 날, 배추밭 옆 무를 뽑아 시래기는 줄에 걸어 말리고, 무는 땅에 묻었다. 김장 배추는 추위에 큰다더니, 훌쩍 몰라보게 통통해진 배추를 본다. 누가 봐도 지금 딱 맞게 배추밭은 한바탕 결실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12월 5일, 동생이 먼저 김장을 했다. 실하게 여문 것 위주로 뚝뚝 따서 주는 재미가 즐겁다. 잘 자라준 배추를 차에 실으니, 마치 자식 키워 대처로 내보내는 어미 마음 같기만 하다. 농사짓느라 애썼다는 한마디 말에 형부와 언니는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받는다.

12월 6일, 아들한테 문자가 왔다.

"우리는 김장 언제 하남요?"

김장김치가 먹고 싶다는 말이다.

12월 12일, 김치를 버무렸다. 삼십 포기의 배추를 뽑아 간을 하고, 늦은 오후에 씻어 밤새 물기를 뺐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추를 앞에 놓고, 양념을 버무리기 시작한다. 입맛 까다롭기 둘째가라면 서운하다 할 딸의 입에서 "올해 김장김치 먹을만 해"라는 엄지 척이 온다.
    
배추 간을 하다
 배추 간을 하다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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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는 더는 배추가 아니다. 이제 김치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에너지를 다한 배추가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져 고스란히 김치 안에 있다. 수많은 역경을 견뎌낸 날들의 수고, 배추의 최선이 김치로 거듭난다.

오늘 김장을 끝으로 배추농사가 마무리되었다.

하늘이 함께 짓는다는 생생한 경험을 깨닫게 한, 하면 할수록 어려운 농사였다. 농사가 곧 삶 공부라는 실감했다. 아무나 할 수 있으나, 누구도 쉽게 '농사나 짓지 뭐'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겸손하지 않으면, 부지런하지 않으면, 자연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농사짓는 일이다. 

한 포기의 김치 안에는 75여 일의 햇볕과 바람, 비, 남편의 발걸음과 염려, 설렘과 기다림이 버무려진, 모두가 함께한 명품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이제 기꺼이 그 시간을 펼쳐 한껏 맛을 누리면 된다.
  
배추의 최선, 김장을 하다
▲ 김장 하다 배추의 최선, 김장을 하다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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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첫눈이 내린 아침 풍경을 담아 가족 문자에 남긴 아들의 메시지, "김치 좀 보내줘요."

다른 건 몰라도 엄마의 김장김치를 먹고 싶어 하는 아들을 위해, 내일은 우체국에 들러야겠다.

태그:#배추, #김장, #농사,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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