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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30분,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으로 충혈된 눈을 비비는 광고대행사 5년 차 대리 A씨가 퇴근 준비를 한다. 그의 책상에는 오늘 아침 광고주에게 보내야 하는 트래픽(Traffic) 분석 리포트가 널브러져 있다. 3일을 연달아 철야 근무를 한 탓에, 회사에서 모든 숙식을 해결했다. 밤을 지새우며 커피를 여러 잔 마셨지만, 아직도 정신은 몽롱하다. 손목은 욱신거리고 배는 더부룩하다.

A씨는 지난 11월 한 달 동안 총 10번의 야근을 했다. 5일간의 휴가를 제외하면 실근무일 15일 중 10일이나 제시간에 퇴근하지 못한 셈이다. 그의 11월 한 달간 근태 기록표를 살펴보니 첫째 주와 둘째 주의 전체 근무시간이 각각 58.5시간, 61.2시간으로 주당 법정 근로시간인 52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는 만성적 과로 인정 기준(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 내외)에도 굉장히 근접한 수치다. 지난 11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광고'주님'의 말에 광고대행사는 '벌벌'

"광고주가 보통 월말에 업무를 던져줍니다. 그렇다 보니 저희는 어쩔 수 없이 업무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죠. 또 광고주가 정한 짧은 기한 안에 업무를 처리해야 해서 고강도 노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빠른 업무 송신을 요청해도 소용없습니다. 간혹 어떤 광고주는 '싫으면 관두든가'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땐 정말 답답하죠."  

광고대행사는 광고주의 요구 사항을 반영해 광고‧마케팅에 관한 업무를 대신 관리하는 상하 복종의 구조로 운영된다. 이 때문에 광고대행사에서 기획‧제작한 모든 업무는 소위 광고주의 '펜 끝'에 달려 있다. 만약 광고주 측에서 광고대행사가 제안한 기획안을 최종 기각하면 처음부터 다시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새 기획안을 제작해야 한다.

"승인이 한 번에 끝나는 일은 없어요. 오죽했으면 기획안 파일 이름이 '기획안_진짜_정말_최종.pptx'일까요. 자료를 빨리 보내도 광고주 측에서 피드백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하루 업무를 일찍 마쳐도 계속 대기합니다. 자연스레 법정 근무 시간을 초과하게 되는 거죠."

광고대행사의 수익은 대부분 계약 수수료에서 발생한다. 광고주가 광고대행사에 마케팅 비용과 수수료를 지급해 외주를 맡기는 구조다. 그러나 모든 광고대행사에 외주 업무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광고주가 입찰 공고를 내면, 광고대행사는 그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사활을 걸고 '비딩(Bidding)'을 준비한다.

비딩은 광고주의 계약을 따기 위한 경쟁적인 응찰(입찰에 참가함)로서, 기획안 작성뿐만 아니라 콘텐츠 시안 및 시제품 제작 등을 포함한 모든 과정을 일컫는다. 따라서 제안 요청이 들어오면 기획팀이 먼저 PPT를 작성하고 디자인 팀이 해당 기획안을 바탕으로 시안과 시제품을 제작한다. 이 모든 과정이 약 2~3주 안에 끝나야지만 광고주에게 제안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러한 비딩 일정은 보통 퇴근 시간 이후에 이뤄진다.

"광고대행사는 계속 일을 따내야 합니다. 작년에 어느 부서는 밤새 준비한 모든 입찰에서 떨어진 적도 있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거죠. 이는 회사의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회사는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있어도 동시에 다른 입찰도 준비해야 하는 겁니다. 일과는 일과대로 하되, 비딩을 또 준비해야 하니까 야근할 수밖에요. 비딩은 분명히 시간 '외' 근무인데 기업의 존폐가 걸린 아주 중요하고 모순적인 일인 셈이죠."

전문 비딩팀이 따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중소규모 광고대행사의 경우 비딩은 곧 야근이다. 조직 운영에 대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추가 인력 고용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초과 근무로 인해 근로자의 건강은 직접적인 악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곧 회사의 생산성 저하로도 이어진다.

지난 2016년 대한상공회의소와 컨설팅 전문회사 맥킨지가 공동으로 펴낸 '한국 기업의 조직 건강도와 기업문화' 보고서에 따르면, 상습적으로 야근하는 직장인과 일반 직장인(평균)의 업무 생산성은 각각 45%, 57%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야근을 많이 할수록 업무 성과는 오히려 떨어지는 '야근의 역설'이 확인된 것이다.

폭언과 술 접대… 야근이 낳은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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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대행사 야근의 원인은 계약서상 '갑'의 관행 때문이다. A씨가 받는 대표적인 갑질은 폭언과 접대이다. 자신에게 욕을 한 사람과 웃으면서 술을 먹는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경우 폭언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야근으로 인해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업무적인 실수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어느 날은 광고주에게 '어떻게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냐'라는 욕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동료는 아예 광고주와 얼굴을 마주 본 상태로 모욕을 당했습니다. 야근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광고주의 폭언도 줄어들까요?"

폭언을 당해도 회사 측에서 취하는 별도의 법적 조치는 없다. 회사 임원진 차원에서 광고주한테 잘 돌려 말하거나 프로젝트 담당자를 바꿔 달라는 부탁 정도로 사건은 마무리된다. 대행사 직원은 광고주 측 담당자 직급에 맞춰서 승진을 하기도 한다. 그래야 광고주로부터 무시를 덜 당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사의 수익이 광고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광고대행사는 또다시 무리한 야근을 해서라도 수익을 창출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폭언을 당하고 나서도 웃으면서 광고주를 대해야 해요. 그렇게 분위기를 풀기 위한 술 접대 자리가 만들어지죠. 야근하면서까지 나에게 폭언을 했던 '갑'의 비위를 맞춘다? 기분이 좋을 리가요."

접대 문화 또한 결국 야근으로 이어진다. 광고업계에서 광고주를 접대하는 문화는 '꽌시(关系·관계)'처럼 여겨진다. A씨는 "이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광고주와의 술자리는 많다"라며 "보통 일과 후에 진행되기 때문에 업무의 연장선인 셈이다"라고 전했다. 광고주의 입맛 따라, 일정 따라 광고대행사의 근무시간과 업무 형태가 맞춰지는 것이다.

"살인적인 야근으로밖에 설명이 안 돼요"

A씨는 상습적 야근과 술자리로 생활 습관이 불규칙해진 지 오래다. 오랜 시간 앉아서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니 손목은 욱신거리고 연이은 철야 근무 후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기도 한다.

"동료는 손목터널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근무시간 내내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일합니다.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달고 사는 저희에게는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죠. 저 또한 불규칙한 생활 습관과 스트레스로 인해 만성 위염을 앓은 적도 있습니다. 요즘은 오래 앉아 있어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요."

동종업계의 2년 차 대리 B씨 또한 광고대행사 일을 시작하면서 연이은 야근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다고 전했다.

"월경 전 증후군(PMS, Premenstrual Syndrome)이 심하게 와서 응급실에 두 번이나 갔습니다. 생리 주기가 굉장히 불규칙해지고, 배가 뒤틀리는 고통 때문에 장이 꼬인 건가 싶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수면시간 부족과 불규칙한 생활 습관, 그리고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더 비참한 건 새벽에 응급실에 가도 진통제 처방이나 안정 주사를 맞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살인적인 야근 때문으로밖에 설명이 안 돼요."

이처럼 근무로 인해 발생한 질병은 근로자가 부상, 질병, 장애 또는 사망했을 때 산재보험 처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4일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부터 보험 처리가 되며, 본인이 직접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손목 통증이나 생리 중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입증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충분한 휴식과 비수술적 치료를 통해 상태가 호전되었다면 이와 관련된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더 어려운 실정이다.

"인력을 충원한다고 야근이 끝날까요?" 
 
A씨는 5년 동안 야근·주말 근로에 대한 추가수당을 받은 적이 없다.
 A씨는 5년 동안 야근·주말 근로에 대한 추가수당을 받은 적이 없다.
ⓒ 김승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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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한 달간 A씨의 야근 당일 근로 시간을 계산해보니, 하루 평균 13.4시간을 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1일 근로 시간(휴식 시간을 제외한 8시간)을 훌쩍 넘은 수치다. 회사와 합의했더라도 1주간 연장 근로 시간이 총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는데, 결국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광고업계에서 이러한 근무 형태가 버젓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근로자들은 야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A씨에게 광고대행사 임금체계에 관해 물었다.

"광고업계는 대부분 포괄임금제로 계약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근로계약 시 급여에 야근 수당을 포함하기 때문에 새벽까지 근무하더라도 추가로 지급되는 수당은 없습니다. 식대는 밤 9시 이후까지 근무해야 만 원, 택시비는 새벽까지 근무해야 이동 거리에 비례해 받을 수 있어요. 그렇다 보니, 야근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일하는 것 같아요. 일한 만큼에 비해 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만 당장 회사를 나올 순 없으니까요."

포괄임금제는 법정 기준 노동시간을 초과하는 근무가 예정돼 있는 경우, 노사합의를 바탕으로 연장, 야간, 휴일수당을 매월 급여에 포함하여 지급한다. 그러나 근로 시간이 주 52시간을 넘어가더라도 이미 야간 근무 등을 포함해 계약했기 때문에 별도로 지급되는 수당은 없으며, 이에 대해 특별한 제재도 없다. 즉, 근로 시간을 초과한 경우 추가수당을 지급하자는 주 52시간 근무제와 정반대 취지인 셈이다.

또한, 다수의 광고대행사에는 노동조합이 없다. 이 때문에 야근 수당 및 처우 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뿐더러 개인의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에 부조리를 묵인하기도 한다. B씨는 "주위에서도 야근 수당이나 기타 지원금에 대해 말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라며 "내규로 규정돼 있는 생리 휴가를 쓰려고 해도 눈치가 너무 보인다"라고 전했다.

주52시간제가 시행돼도... 암울한 전망

내년 1월 1일부터 직원이 300인 미만인 중소기업들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중소규모의 광고대행사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대비하고 있을까? B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회사가 60~70인 정도의 규모라서 회사 임원진이 주 52시간 근무제를 대비하는 내규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없지만, 결국 회사가 꼼수를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장 내년부터 제도가 시행된다 해도 당연히 노트북을 들고 집에 가서 지금과 똑같이 야근하지 않을까? 비딩 업무가 겹칠 때는 아무리 일을 빠르게 해도 야근할 수밖에 없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장시간 근로나 과로사 등의 부작용을 해소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아 주겠다는 현 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됐다. 또 정부는 근로 시간이 주당 평균 6.9시간 이상을 감소하게 된다면 생산성과 삶의 질 향상뿐만 아니라 약 14~18만 개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명의 인력 충원으로 자칫하면 회사는 손해를 볼 수 있다. 광고주가 광고대행사에 외주를 맡길 때 계약상 따라야 하는 업무의 범위나 업무량을 정확히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B씨는 "퇴근 시간에 일을 던져주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업무를 처리해달라고 한다"라며 "인력이 충원되어도 갑과 을의 업무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라고 전했다.

또 코로나로 인해 광고주는 허리띠를 졸라맸다. 즉, 유동 비용에 해당하는 마케팅 비용을 줄여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 여파로 광고대행사가 광고주에게 받아 운용할 수 있는 마케팅 비용에도 문제가 생겼다. 만약 광고대행사가 이러한 이유로 업무 지시를 거부하거나 개선을 요구한다면 업계 내에서 자칫 '스팸 메일'이 될 수도 있다.

더불어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 회사에서 추가 근무를 할 수 없어 대부분의 사무직 근로자들은 재택이나 카페 근무를 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근로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업무 형태와 결과 중심의 업무 지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직업병과 과로사를 야기하는 새로운 '한국형 재택근무'가 될지도 모른다. 또 집이나 회사 밖에서 실근무 시간이 늘어날 수 있는 우려도 있다. 노조와 추가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업무량이 늘어난다면 산업재해를 당해도 근무로 인해 직업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산업재해는 원칙보다 법원의 해석에 맡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 기업노조가 없어도 산업별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 향후 문제가 생길 경우 같이 싸워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별 노조에서는 공익변호사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 회사 밖에서 근무하더라도 근무 일지를 꾸준히 기록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기록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럴 때야말로 민주노총 등 각 노조에서는 재판에서 통하는 근무일지 기록법을 알려주면 좋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시민단체 등에 가입해서 갑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법 개정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다. 노동자가 요구하지 않으면 결국 노동자만 피해를 본다. 노동자 스스로도 중소규모 회사에서 인력을 추가로 고용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인력 고용이 정말 어려운 것일까? 임원의 연봉이 너무 높지 않은가? 혹여 회사의 돈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과연 '합리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 문제다. 투명하지 않은 기업을 걱정하는 것은 노동자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동자를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가져야 적어도 집에서 밤새는 일은 면하지 않을까.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다고 해서 과연 광고대행사의 야근이 없어질까? A씨는 말했다.

"야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요? 퇴사밖에 없지 않을까요."

태그:#주52시간근무제, #52시간, #광고대행사, #광고업계, #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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